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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family #relationship

시월드에 당당한 B급 며느리는 어떻게 탄생했나

editor 김지은

2018. 04. 18

동명의 영화와 책으로 화제가 된 ‘B급 며느리’는 기존 시월드 룰을 따르지 않는 발칙한 며느리에 관한 이야기다. 이 땅의 수많은 며느리들에게 ‘사이다’를 선사한 김진영 씨와, 남편 선호빈 감독의 못다 한 이야기. 

“오빠 부모님한테는 오빠가 효도해.” 

“내가 너네 집에 애 낳아주러 왔냐?” 

“난 시댁에 가면 손님이야.” 

“제사에 며느리가 꼭 참석해야 해? 내 할아버지가 아니라 오빠 할아버지잖아.” 

요즘 주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B급 며느리’ 김진영(36) 씨의 어록이다. ‘B급 며느리’는 보통의 며느리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싫어요”를 당당하게 내뱉는 결혼 8년 차 며느리 김진영 씨와, 그런 며느리가 야속하고 답답한 시어머니 조경숙 씨,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남편이자 아들 선호빈(37) 감독의 일상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다. 지난 1월 중순 개봉한 이 작품은 독립영화로는 드물게 누적 관객수 1만 명을 돌파했다. ‘난 정말 이상한 여자와 결혼한 걸까’라는 부제가 붙은 동명의 책 역시 1월에 출간돼 주부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서점가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B급 며느리’가 이토록 관심을 모은 건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가부장제에 대해 할 말 많은 며느리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선호빈 감독과 김지영 씨는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선후배 사이로 처음 만났다. 2011년 다큐멘터리 영화 ‘레즈’로 데뷔한 선호빈 감독은 같은 해 김진영 씨와 결혼한 후, 아내와 어머니의 심각한 고부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매번 만날 때마다 말이 바뀌는 어머니 때문에 증거를 남겨달라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가정의 평화를 찾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촬영은 장장 3년에 걸쳐 계속됐다.

가족 서열의 가장 마지막에 있는 존재, 며느리

“결혼을 하고서 깜짝 놀랐어요. 어느 날은 시댁에서 밥을 먹는데 시아버지가 밥상을 ‘탕’ 치시면서 ‘김치도 없이 밥을 먹으란 말야?’ 하고 화를 버럭 내시는 거예요. 더 놀랐던 건 시어머니의 반응이었어요.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이러시면서 하얗게 질려서 김치를 꺼내 오시는데,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이었죠. 딸만 넷인 저희 집에서 아버지가 그런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이셨다면 모두가 들고 일어났을 거예요.” 

결혼 전 김진영 씨의 눈에 비친 시집은 철마다 가족 여행을 다닐 만큼 화목하고 우애가 돈독한 집안이었다. 매일 복닥거리며 말썽이 끊이지 않던 친정집과 비교하면 일견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누구도 시아버지의 권위에 반기를 들지 못해서 빚어진 결과라는 걸 뒤늦게야 알게 됐다. 

“저희 집 냉장고에 반찬이 넘쳐나서 더 이상 넣어둘 데가 없는데도 시어머니는 반찬을 가져오시죠.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불쾌하게 생각하면 제가 무례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상대가 원치 않을 때 베푸는 호의는 폭력이라는 게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거든요.” 

김진영 씨는 시월드의 폭력과 억압의 관계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의 배경과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서열이란 건 앞선 사람들이 뒤에 오는 사람들을 돌봐주고 끌어줘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억압하고 하대하는 게 서열의 실체죠. 그리고 여성들은 늘 그 서열의 한 계단 아래에 있습니다. ‘피해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부터가 그래요. 여성들에게는 피해자가 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남자들에게는 ‘가해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죠. 그러니 권력의 상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지금 미투 운동을 촉발한 억압적인 상하 관계의 핵심이기도 하고요.” 

부당함을 참지 못하는 김진영 씨는 어른들과의 갈등이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대충 “네” “네” 하고 넘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선 감독은 부모님과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단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모면하고 보는 쪽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이는 그가 평생 완고한 부모님과 함께 살며 터득한 생존의 방식이기도 했다. 

“원래 다 그런 거야. 어른들은 바뀌지 않아.”

솔직하다 못해 발칙한 며느리와 그런 며느리가 야속한 시어머니의 갈등을 그린 다큐 영화 ‘B급 며느리’는 IPTV로도 볼 수 있다.

솔직하다 못해 발칙한 며느리와 그런 며느리가 야속한 시어머니의 갈등을 그린 다큐 영화 ‘B급 며느리’는 IPTV로도 볼 수 있다.

선 감독은 고부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기는 쪽을 택했다. 물론, 선 감독이라고 늘 회피성 대답만 늘어놓는 쪽은 아니었다. “진영이 걔는 친정 부모님 앞에서도 그런다니?”라는 어머니의 한숨 섞인 질문에 선 감독은 진심 어린 “Yes”로 어머니를 위로할 수 있었다. 사실이 그랬다. 김진영 씨는 친정 부모와도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에요. 학교 다닐 때 저는 부모님께 늘 ‘굿 걸’이었거든요. 공부 잘하고 말썽 안 부리는.” 

그것은 진영 씨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다. 딸만 넷인 집안의 둘째가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조금이라도 나눠 받기 위해서는 착하고 순종적이어야 했다. 김진영 씨는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을 가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밖에서는 할 말 다 하고 사는 까칠한 명랑 소녀였지만 부모님은 그런 그녀의 사생활을 알 리 만무했다. 친정 부모님은 여전히 공부 잘하고 착하기만 하던 그녀가 남편을 잘못 만나 ‘인생 망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선호빈 감독은 고부 관계에 관한 한 자신을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평화주의자”라고 말한다. 영화가 개봉된 후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이것이 비단 선 감독만의 독점적 캐릭터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은 자신이 이 모든 재앙의 씨앗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남자들은 단순해요. 그래서 ‘관계’에 대해 복잡하고 심각하게 고민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아내와 어머니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기보다 관계 맺음의 복잡함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결혼하길 잘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 감독은 체납고지서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영화는커녕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 가난한 30대 가장이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남편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지해준 사람은 전업주부인 아내 김진영 씨였다. 시어머니에게는 ‘B급은커녕 F급’이라 욕을 먹는 며느리일지언정 남편에게는 적어도 돈 못 벌어오는 걸로 꼬투리를 잡거나 바가지를 긁어대는 일이 없는 아내. 그녀는 오히려 “당신은 영화에 재능이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라”며 수시로 확신에 찬 메시지를 보냈다. 선 감독은 꼬치꼬치 입바른 소리를 하거나 어머니와 전면전을 펼칠 때는 아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밉다가도, 이 여자가 아니면 과연 결혼이란 걸 생각이라도 해보았을까도 싶단다. 

예상과 다르게, 다큐멘터리가 고부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면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그렇듯, 어느 날은 마음을 조금 열었다가 또 어느 날은 영 남처럼 멀게 느껴지는 관계. 평행선보다는 등고선처럼 멀어졌다 좁아졌다 주기를 알 수 없는 기복이 반복되는 관계다. 

“인간관계에 있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를 관찰하고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고부 관계 역시 시간 들여 서로를 파악하고 가까워지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버릇없게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고부 관계에서도 우정을 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직 저와 시어머니의 관계는 그런 단계는 아니에요. 서로 탐색하는 과정이죠.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잘 지내기 위해 서로 공들이고 노력하면 분명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부 갈등이 그렇듯 이들 부부의 결혼 생활 역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결혼 전 한 번도 싸운 적 없던 부부는 아이를 낳고부터 지긋지긋하게도 싸웠다. 다큐멘터리를 찍는 동안에도 부부는 몇 번이고 이혼을 생각했고, 또 몇 번이고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어떻게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이들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여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에는 누구나 울고 웃을 수 있을 만한 보편적인 삶이 담겨 있다. 그래서 조금 슬프기도 하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통쾌하다”고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부부는 속이 싸하고 쓰리다. 김진영 씨는 사람들이 얼마나 할 말을 못 하고 살았으면 그럴까 싶다며, 답답하다고 했다. 

“그래도 결혼하길 잘한 것 같아요. 물론 종종 외로워요. 결혼을 해도 외롭다니, 왜 결혼을 한 건가 후회가 될 때도 많았죠. 그래도 남편은 가족들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 모습이 좋다고 해준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예요. 친구 이상이죠.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선 여자들이 목숨 걸고 싸워야 해요. 설령 그 대상이 시부모님이라 해도.” 

인생은 언제나 반전의 연속이다.

director 김명희 기자 photographer 지호영 기자 designer 김영화
장소제공 투미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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