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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power_woman #interview

#리즈시절 #뚝심 #치매반려견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editor Kim Ji Youngㅣphotographer Jo Young Chul

2017. 10. 24

여성동아는 창간 84주년을 맞아 파워우먼 인터뷰를 시작한다. 첫 번째 주자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지역구 5선 여성 국회의원이자 집권당 대표인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추 대표와 결혼과 가족, 19세 반려견 등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성과 약자에 대한 깊은 사랑을 전달받았다. 잠시 정치를 잊자고 시작한 얘기에서 ‘정치인 추미애’를 제대로 발견했다.

추미애(59)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당적을 바꾸지 않고 우직하게 소신을 지켜온 뚝심 있는 정치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남성 중심의 국내 정치사에서 ‘헌정 사상 최초’라는 기록을 가장 많이 가진 여성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추 대표는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부의 2남 2녀 중 셋째이자 작은딸이었다.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85년 춘천지방법원 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그는 전북 정읍 태생, 서성환 변호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영남에서 호남 사위를 맞는 건 드문 일이었기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뤄낸 사랑의 결실이었다. 대학 동기이자 캠퍼스 커플로 7년간 사랑을 키운 두 사람은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추 대표가 정계에 입문한 건 1995년, 판사생활을 한지 만 10년째이던 해였다. 그는 새정치국민회의의 부대변인으로 정치 여정을 시작했다. 판사 출신 여성 부대변인의 등장은 남성이 장악한 국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듬해인 1996년 제15대 총선에 출마해 금배지를 단 그는 이후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지역구 5선 여성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그는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이하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캠프의 유세단장으로 활약하며 ‘추다르크(추미애+잔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2년 제16대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 캠프의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본부장으로 정권 재창출을 도우며 ‘돼지엄마’로 불렸다. 당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선거운동 성금을 모은 ‘희망돼지’ 저금통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서다. 지난 5월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정권 교체의 열망을 이뤘다.

당명이 수차례 바뀌고 분당과 합당이 거듭될 때도 흔들림 없이 민주당의 뿌리를 지켜낸 그는 지난해 6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첫 여성 당 대표로 선출됐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집권당 대표가 된 그를 추석 연휴가 끝난 직후인 10월 11일 국회 더불어민주당 대표실에서 만났다.  



새 정권이 들어선지 5개월이 지났습니다. 현 정부(문 대통령)가 가장 잘한 일 또는 정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역대 대통령 중에서 소통을 가장 잘하시는 것 같아요. 힐링이 필요할 때는 힐링하는 자세로, 민생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는 민생이 있는 곳으로 가서, 토론이 필요할 때는 격의 없는 토론으로 소통을 하시거든요. 야당에서는 ‘쇼통’이라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쇼나 가식은 하나도 없어요. 정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안 보이는 것까지 보려 하고, 쉽게 들을 수 없는 곳의 얘기까지 경청하시는 모습을 국민이 가장 감격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게 나라냐?’에 대한 응답으로 국가의 참다운 모습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개혁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부패를 도려내는 적폐청산일 수도 있죠. 그렇게 나라다운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 국민들에게 가장 와 닿는 소통일 겁니다.  

최근 부동산 시장의 안정화를 위해 “보유세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반대 여론을 어떻게 이해시킬 생각인지요.
지금 우리 사회가 땀과 노력의 대가로 기회가 주어지는 정상적인 사회가 되기 힘든 원인이 불로소득에 있어요. 다달이 버는 것보다 올라가는 임대료 폭이 훨씬 높으면 저축은커녕 살아가기도 벅차질 수밖에 없고요. 노동과 자본이 버는 소득보다 지대(땅값)가 더 높은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잖아요. 보유세 인상은 그런 문제에 대한 사회 전체의 성찰이 필요하기에 촉구하는 것이죠. 조금씩 양보를 해야 선순환이 가능한 사회로 바뀔 수 있으니까요.  

정계에 입문한 후 줄곧 민주당에 몸담았고, 2007년 삼성 비자금 내부 문건에 ‘돈을 받지 않은 정치인’으로 이름이 올라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목은 뭘까요.
첫 번째는 ‘강한 책임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적 영역에 자기를 던진 거니까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계산하지 말고 공적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 같고요. 그 다음은 ‘공감능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자신만의 기준으로 스스로 도덕적이라 판단하기 이전에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국민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국민은 무엇을 힘들어할까,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무엇을 원할까’ 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국민 전체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공감능력요.


최근 의외의 면모도 화제가 됐습니다. 홈쇼핑에서 ‘원 플러스 원(1+1)’으로 파는 옷을 사 입는다고 하셔서요.
종종 홈쇼핑에서 옷을 사요. 먼지 제거기로 거실 바닥을 청소할 때 TV를 틀어놔요. 옷을 사러갈 여유가 별로 없으니까 그럴 때 눈에 들어오는 옷이 있으면, 바로 주문을 하죠. 하하하.

치매 걸린 19세 반려견 ‘테리’와 함께하는 일상을 영상으로 보고나서 대표님이 한결 친근하게 느껴졌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려동물을 어떻게 키우게 된 건가요.
큰딸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의 어머니에게 미리 부탁해 그 집  개가 새끼들을 낳자마자 그중 한 마리를 데려왔는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아주 예쁜 포메라니안이었어요. 그 딸이 지금 서른한 살이 됐죠. 테리가 자기와 안 놀아주면 방문을 발로 차서 저희 집의 문이란 문은 칠이 다 까져 있어요. 지금은 테리가 관절염에 걸려 문을 찰 수가 없지만요.

동물이 치매에 걸리면 어찌 되나요.
사람이랑 똑같더라고요. 대소변을 아무데나 싸요. 그걸 치우는 건 제 몫이에요. 처음엔 하루 한 번만 치우면 됐는데 지금은 집에 있는 일요일엔 세 번은 치우는 것 같아요. 오늘 같은 평일에는 아침에 치우고 나오는데 집에 가면 엉망이 돼 있죠. 막 다니다 다칠까 봐 플라스틱 울타리를 쳐놨는데 어떤 때는 불현듯 정신이 돌아오나 봐요. 그럼 울타리가 갑갑하니까 박차고 나와요. 그러다 길을 못 찾아서 어디론가 사라져요. 어디 갔을까, 찾아보면 소파 사이에 박혀 있어요. 치매 걸린 어르신이 나가서 길을 잃고 집에 못 찾아오는 거랑 똑같아요. 마음이 짠하죠. 동물을 키워보면 생명을 함부로 하지 못해요.

엄마나 아내로서 자신에게 몇 점을 주고 싶으세요.
많은 점수를 줄 수 없죠.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고 가족에게 늘 이해를 바라는 쪽이니까요. 어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지난날을 반성하는 책을 내셨어요. 아이와 대화하기보다는 ‘몇 시까지 숙제 다 해놔!’ 하며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TV가 뜨끈뜨끈 하면 ‘방금 껐구나!’ 하며 혼내고, 그렇게 자기주장을 펴면서 아이를 잘 케어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춘기가 되니 아이들이 ‘엄마가 하라는 대로 못하겠다’고 하더라면서 ‘내 잘못된 교육방식을 반성한다’고 썼더라고요. 저도 똑같아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서 번개 불에 콩 볶아먹듯이 살았으니까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판사시절 슬리퍼를 신고 출근한 적이 있어요. 갈아 신으려고 구두를 갖고 나와서는 차 위에 잠깐 올려둔 걸 잊은 채로 시동을 걸고 출발해 버렸죠. 그렇게 정신없이 살았으니 아이들을 제 위주로, 기계적으로 대하지 않았겠어요? 그 불만이 아이들에게 쌓인 걸 2004년 총선에서 떨어지고 알았어요. 막내아들이 “요즘 참 좋아요. 엄마가 선거에서 떨어져서요!” 하기에 “왜?” 그랬더니 “집에 오면 저를 위해 오므라이스도 만들어주고 시금치국도 끓여주는 엄마가 있어서요” 하더라고요. 이전에도 제가 음식을 해놓고 출근했는데도 ‘할머니가 다 하고 엄마는 흉내만 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모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아이들에게 저를 이해시킬 수 있었어요. 이후 아이들 모두 제 편이 돼줬어요. 지금도 저를 많이 응원해주고요(웃음).

남편은 어떤 분이십니까. 외조를 적극적으로 해주시나요.
우리 세대 남편들은 부인을 마음으로는 사랑해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걸 낯간지럽게 여기고 남자 체면 깎는 일로 생각하거든요. 제 남편도 정말 마음으로는 다 알아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표현하는 데엔 서툴러요. “사랑한다” 말하는 걸 ‘닭살 돋는다’, ‘가볍다’와 동의어로 인식하고 있어요. 어른들이 가르쳐준 무게감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남편으로서는 빵점이죠. 하하하.

남편은 대표님에게 아내로서 몇 점을 주실 것 같나요.
비슷할 거예요. 하하하. 그래도 남편이 곁에 있어 힘이 되고 든든하죠. 저의 절대적인 응원자거든요. 또 한편으로는 매서운 비판자여서 제 자신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성찰하게도 하고요. 

남편과 결혼할 때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지역감정 때문이었나요.
그런 면도 있고, 또 당시 제가 상종가였어요. 하하하. 여성 사법시험 합격자가 희소할 때여서 합격한 순간부터 전국에 알려졌어요. 전국의 중매쟁이들이 들썩들썩했죠. 합격자 3백명 중 여자는 3명뿐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친정 부모님이 속물적으로 중매쟁이들의 입김에 휘둘리는 분들은 아니에요. 제 판단을 존중해주셨는데, 남편의 집안형편이 넉넉한 편이 아니니까 부모님 입장에서는 고생 좀 하겠다 싶으셨던 거죠. 그래서 끝까지 결혼을 반대하셨어요. 혼수도 결혼하고 난 후에 해주셨고요. 예식장에도 안 오시려고 하다가 “신부 입장~” 할 때 나타나셨어요.

처가에서 반대해 남편이 서운해하지 않았나요.
자기가 왜 서운해요? 저 같은 보배 덩어리를 차지했는데요. 하하하. 그런데 남편의 입장에서 이렇게 물어본 건 김지영 기자가 처음이에요(웃음). 생각해보니 서운해했던 것도 같아요. 결혼식장에서 표정이 굳어있었거든요. 부모님이 끝까지 안 나타나셔서 파행 결혼식이 될까 봐 걱정됐던 것 같아요.

남편의 어떤 면에 끌려 결혼에 이르렀나요.
이 답은 하기 싫네요. 너무 자만해져서 가정 내 질서가 안 잡히더라고요. 하하하. 남편, 멋졌어요. 외모가 아니라 내면요. 또래보다 생각이 한 차원 높아서 존경스러운 느낌이 있었어요. 철학적 깊이가 있죠. 요즘 말로 ‘츤데레’스러운 면도 있고요(웃음).

왜 판사가 되셨습니까.
원래 법률이 제 적성에 맞을 것 같았어요. 고1 때 적성검사에서 판사, 기자가 맞는다는 결과가 나왔거든요.

적성에 맞는 판사를 그만두고 정계에 입문한 이유는요.
원래 정치를 꿈꿨던 건 아니에요. 제가 모셨던 부장 판사님이 1995년 당시 김대중 총재가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저에게도 함께하자고 하셨어요.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어요. 집에 가서 남편에게 그 얘기를 전했더니 “당신이 하면 잘할 것 같다”고 격려해줬어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기꺼운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죠.

정치인으로서 가장 잘한 일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적 정권 교체에서 한몫을 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권 재창출도 거의 불가능해 보였지만 롤러코스터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뤄낸 거여서 뿌듯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어요. 특히 이번 촛불 대선에서는 당을 지휘하면서 무사히 승리를 이뤄내 남다른 의미가 있었죠. 정말 기록에 남을 역사적인 일에 더불어민주당의 대표로서 역할을 한 것이 무엇보다 큰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게 했죠.

정치인은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떤 점을 최우선에 두시나요.
정치인의 길을 걸어온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선택의 기로에서 한 번도 사심을 얹어본 적이 없어요. 이게 공의롭다, 공적 분노를 표출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판단에서 결정했어요. 그런 기준에서 크게 일탈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일관성 있게 예측 가능한 길에 죽 있었어요. 그게 저의 개인적인 보람이고 긍지죠.

가장 후회되는 일을 꼽는다면요.
2004년 제가 몸담고 있던 당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에 동참할 때 끝내 막지 못하고 당론에 따랐던 일요.

처음부터 탄핵에 반대하셨고,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탄핵 발의를 할 때도 반대한 2인 중 한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쩌다 탄핵 추진에 찬성하게 된 겁니까.  
당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3인에게도 서명을 받으려고 했어요. 대통령 탄핵 사유에 대통령이 아닌 측근의 부정과 비리를 지적하는 내용이 담긴 것도 석연치 않았고요. 그래서 ‘3인이 소추자가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정말 분노에 차서 대통령의 잘못에 대해 법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하고 싶으면 그 잘못만 지적해라, 탄핵을 추진한 쪽도 흠결이 없어야만 국민들이 이해한다, 당을 지키고 싶은 만큼 당의 윤리성도 지키고 싶다’고 호소하며 탄핵을 반대했던 거예요. 그런데 당 최고의원으로서 당론으로 채택된 탄핵을 계속 무시할 수만은 없었어요. 막바지에 ‘당 최고위원으로서 내 이름을 얹게 허락해주겠다. 대신 구속 수감된 그 3명은 빼라”고 했는데, 저를 속이고 3인을 포함시켰더군요.




그 역풍을 맞아 민주당은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9석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당시 추 대표는 당 선대위원장으로서 민주당이 탄핵에 동참한 것을 당을 대표해 사과하고, 사죄의 의미로 ‘3보1배’도 하셨어요. 당시 심정이 어땠습니까.
몸도 마음도 천근만근이었죠. 제가 탄핵을 주도하거나 앞장선 것은 아니더라도 당 최고의원으로서 저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진심을 다해 사과하는 것만이 국민에게 용서받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보1배를 시작했는데, 사실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혈압이 40 이하로 내려가니까 응급차량이 계속 따라다니며 중단하라고 했어요. 더 강행하면 죽는다고요. 정신력으로 버텼던 것 같아요.

정치인으로서 가장 힘든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 사회가, 권력이 비정상일수록 언론도 얄팍해지고, 기사의 왜곡이 심해지는 것 같아요.정치적 주장이 가감없이 전달돼야 하는데 그 때문에 순기능이 안 될 때 힘들죠. 저도 사람인지라 상처도 많이 받고요.

그럴 땐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극복이 잘 안 되죠. 꾹꾹 참는 거죠. 아마도 사리가 많이 나올 거예요. 하하하. 매일 밤 8시 이후에 한강둔치를 산책하면서 평정심을 찾는 것이 제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라 할 수 있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 대해 최초 여성 대통령의 불행한 사례라고들 이야기합니다. 그 때문에 여성 대통령이 다시 나오겠냐고 우려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기우’라고 생각합니다. 남성 대통령이 잘못해서 감옥 가도 또 남성을 대통령으로 뽑아주잖아요.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여성이어서 당선된 게 아니고 아버지의 후광 효과가 컸죠. 그분의 사례는 특수한 경우이지, 모든 여성에게 일반화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지요. 보통 엄마라면 아이가 학교에서 다쳤다는 얘기를 들으면 한걸음에 달려가요. 머리 손질할 정신이 있을 리가 없죠. 엄마들은 어딜 가도 항상 집을 먼저 생각하고 가족을 먼저 챙겨요. 그건 여성이 타고난 헌신성과 책임감이에요. 남성이 갖지 못한 성향이죠. 우리는 모두 엄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여성 정치인에게 엄마 같은 모습이 투영될 거고, 오히려 엄마가 정치하면 더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싶어요.

여권 신장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보다 스스로 실천하는 방식으로 성평등을 위해 노력해오셨다고 평가합니다. 그럼에도 정치인으로서 여성이기에 차별받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까.
아주 많죠. 여러 케이스에서 늘 느껴요. 우리 사회가 특히 심하죠. 유교적인 전통이 뿌리내려 있고, 남성 중심 정치다보니 불편부당한 대우를 많이 겪어왔어요. 그걸 굳이 내색을 안 한다 뿐이지요.

성평등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얘기를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남성은 성 역할을 구분하려고 해요. 반면 젊은 세대는 성 역할의 구분에 의미를 두지 않고 남성도 집안에서 역할 분담을 하죠. 가정의 문화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가정 내에서 성 역할에 대한 적절한 배려를 해주면 그걸 보고 자란 아이들이 밖에서도 성평등 문화를 확산시켜요.

자녀들에게 성 역할에 대한 배려를 하도록 가르치시나요.
아들아이가 자기 입맛에 맞게 요리를 썩 잘해요. 누나들 식사까지 차려주는 건 아니지만 남자니까 부엌에 출입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아요. 아이들에게 특별히 성평등을 강조한 건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그런 습성이 몸에 배었어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부대변인으로 출발해 첫 여성 집권당 대표까지 되셨어요. 어떤 각오로 대표직을 수행하십니까.  
하루하루가 숨 가쁘지요. ‘이게 나라냐?’를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기 위한 고민을 매일 해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저는 최초의 여성 집권당 대표라는 말보다 “최초의 집권당 대표다운 대표였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요. 그래서 날마다 “정말 그 대표다운 대표가 있어서 다행이었어”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대표가 되기 위한 시간을 차곡차곡 쌓고 있습니다(웃음).

복잡한 국제정세를 비롯해 풀어야 할 문제들이 국내외에 쌓여 있습니다. 현재 여당 대표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일까요.
북한이 우리 쪽의 인내와 성의에도 여전히 ‘통미봉남(미국과의 실리적 통상외교를 지향하면서 남한 정부의 참여를 봉쇄하는 북한의 외교전략)’ 자세로 미국을 상대하며 여러 긴장 고조행위를 계속하고 있고, 미국도 어떤 날은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강경 기조로 나와서 그에 따른 국민들의 불안감과 안보 위기 해소에 대한 고민이 가장 큽니다.

개인적인 고민도 있으시겠죠.
베이비부머들 입장에서는 다 큰 자녀들의 취업난이 제일 큰 걱정일 겁니다. 본인의 노력과 상관없이 꿈을 가질 수 없는 시대라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좌절감이 극에 달에 있지 않습니까. 저도 아이들 고민을 하고 있어요. 이 숙제를 빨리 풀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끼고요.

2004년만 빼고 5선을 모두 서울 광진구을에서 이뤄낸 추 대표는 인터뷰 말미에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지역구민의 한 표, 한 표가 산소 같고 물 같은 은혜로운 선물”이라며 “나무로 자라도록 주는 표의 의미를 늘 새기고 좋은 정치로 보답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런 그에게 자신을 음식에 비유해달라고 청하자 “따뜻한 차 한 잔”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민생이 곤궁하고 힘들 때 당장 내가 크게 배부르게 해드리지는 못하더라도 정치를 통해서 따뜻한 위로가 되고 싶다는 의미”라는 친절한 해설과 함께. 추 대표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대선에 출마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흔쾌히 답했다.

“그건 계획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제가 그걸 목표로 포석을 깔고 물밑작업을 할 사람도 못 되고요. 다만 언젠가 제게 그런 기회가 오고, 제 역할을 국민이 필요로 한다면 마다하지 않을 것 같아요. 하하.”

인터뷰 후  ‘서울시장 출마설’에 대해 추가 질문을 보내자 비서실장은 “아직 결정된 게 없다. 현재 출마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당 대표로서 역할을 다해 좋은 성과를 내고자 한다”고 알려왔다.

designer Choi Jeong Mi
사진제공 더불어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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