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선 현대차 회장이 정주영 창업주 추모 음악회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SK그룹 창립 73주년을 맞아 제작된 영상에서 인공지능(AI)으로 재현된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
SK는 창립 73주년을 맞아 지난 4월 14일 최종건 창업회장, 최종현 선대회장의 육성과 철학을 인공지능(AI)으로 복원한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은 1953년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선경직물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공장을 복구하는 데서 시작된 도전은 오늘날 SK그룹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영상 속 최종건 창업회장은 “구부러진 것은 펴고, 끊어진 것은 잇고, 무너진 것은 다시 세운다”는 신념과 함께 “할 수 있고, 해야 되고, 하면 된다”는 실행 중심 철학을 강조한다. 이후 국내 최초 나일론 생산, 선경직물의 히트 상품인 닭표 안감 개발, 워커힐호텔 인수 등 주요 결단의 순간이 이어진다.
1973년 최종건 회장 타계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최종현 선대회장은 그룹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수직계열화를 완성하며 산업 구조를 재편했고, 1994년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 인수라는 승부수를 통해 ICT·반도체 중심 기업으로 도약할 기반을 마련했다. 영상 속 그는 “기업가라면 10년 앞을 내다봐야 한다”며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강조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실사와 CG에 국한된 기존 영상과 달리 사사와 3000여 건에 달하는 육성 기록을 딥러닝을 활용해 선보인 것이다. 이를 비롯해 스토리보드 구성부터 영상 제작까지 전 과정을 AI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직접 아이디어를 낸 최태원 회장은 완성된 영상을 확인한 후 “AI 기술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상은 5분 분량으로 제작돼 4월 중순부터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1층 전광판과 사내 방송을 통해 송출되고 있다.
SK의 창업가 정신 재해석은 오프라인에서도 이어진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선혜원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통 한옥과 현대 건축이 결합된 선혜원은 최종건 창업회장이 1968년 매입해 거주하던 곳으로, 그동안 인재 교육·연구 공간으로 활용되다가 2025년 SK그룹이 ‘선혜원 아트프로젝트’를 출범하며 문화 플랫폼으로 거듭났다. ‘지혜를 베풀다’라는 뜻이 담긴 선혜원이란 이름은 최종현 선대회장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9월, 최태원 회장의 동거인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 디렉터 주도하에 ‘보따리’ 연작으로 유명한 김수자 작가의 전시가 열리며 대중에게 첫선을 보였다. BTS가 지난 3월 공개한 ‘스윔(SWIM)’ 라이브 영상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격자무늬 창호로 둘러싸인, 현대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공간이 선혜원이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SK 창업주의 사저인 선혜원(위)에서 BTS가 ‘스윔’(SWIM) 라이브 영상을 촬영했다.
오너 일가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도 한몫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창업가 정신과 현재의 리더십을 연결하는 데 적극적이다. 정의선 회장은 지난 2월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아산 정주영 서거 25주기 추모음악회’에서 “할아버님의 신념과 도전은 모두 사람에게서 시작됐다. 사람을 믿으셨고 사람을 위한 혁신을 이루셨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 정신을 이어받아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겠다”고 밝혔다. 정주영 창업주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동 건설시장 진출을 통한 오일달러 확보, 자동차와 중공업 산업 기반 구축 등 산업화의 핵심축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그의 궤적은 오늘날 현대자동차그룹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간이 됐다. 정의선 회장은 청소년기 약 3년간 할아버지인 정주영 창업주와 서울 청운동 자택에서 함께 생활하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매일 새벽 5시 30분 아침 식사를 함께하며 이뤄진 ‘밥상머리 교육’은 시간 관리와 성실함, 사람 중심의 태도로 이어졌다. ‘아침형 CEO’로 불리는 업무 스타일 역시 이러한 영향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다.정의선 회장은 서울 종로구 계동 사옥 15층에 업무 공간을 마련했다. 이곳은 정주영 창업주가 사용하던 집무실이 있던 자리이자 현대가의 역사와 리더십을 보여주는 장소다. 2000년 형제들 간의 경영권 분쟁,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그룹이 분리되며 상징성이 약해졌지만, 2011년 현대건설 인수를 계기로 의미가 복원됐다. 정의선 회장의 ‘계동 15층 입성’은 창업주에서 선대로 이어진 경영 DNA를 현재 경영 현장으로 다시 끌어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행보로 읽힌다.
앞서 HD현대는 2023년, 정주영 창업주의 어록인 “임자, 해봤어?”를 활용한 브랜드 광고를 선보이며 젊은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해당 영상은 수천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삼성은 이병철 창업주의 ‘사업보국’과 ‘인재제일’ 철학을 반도체, 바이오 등 미래 사업 전략과 연결하고 있다. 또한 삼성은 창업주의 유지를 이어 호암재단을 설립하고, 학술·예술 및 인류 복지 증진에 크게 공헌한 인물들을 선정해 호암상을 수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삼성전자를 비롯한 10개 계열사가 호암재단에 50억 원을 기부했다. LG그룹 역시 구인회 창업주의 ‘고객가치’ 철학을 경영과 접목하고 있으며, 구광모 회장은 이를 조직 전반에 확산시키고 있다. 한화그룹은 김종희 창업주의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우주·방산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으며, 김승연 회장은 실행 중심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의 배경에는 세대교체와 기업 환경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의 박주근 대표는 “오너 경영이 3세, 4세로 넘어가면서 창업자와의 직접적 접점이 줄어든 만큼, 창업 정신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요구가 커졌다”며 “일종의 기업 헤리티지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과거에는 재벌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기업의 성과와 주가 상승, 그리고 오너 일가의 대외 활동 확대 등으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기업에 대한 인식이 한층 우호적으로 바뀐 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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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동아DB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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