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라이아의 2026 S/S 쇼는 환상적인 빛으로 물든 ‘코쿤(cocoon)’ 속에서 시작됐다. 디지털 스크린으로 꾸며진 무대 바닥에는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의 얼굴이 투사됐고, 그 움직임은 천장 거울에 반사되며 몽환적인 디지털 필름을 만들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터 뮬리에는 ‘absolute dream(10분간의 꿈)’을 콘셉트로, 가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무대를 통해 소셜 미디어 시대의 막연한 불안과 종말론적 정서를 시각화했다. 우아한 순백의 코튼 튜닉으로 시작된 컬렉션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프린지 팬츠와 대담한 커팅의 드레스, 공작부인을 연상시키는 새틴 볼 스커트로 이어졌다. 다채로운 실루엣과 형태미로 예술과 패션의 경계를 흐리며 실험 정신을 이어간 뮬리에. 더 새로울 게 없는 디지털 시대에 맞서는 우아한 방패 같은 컬렉션으로 해답을 제시했다.

에펠탑의 불빛 아래, 밤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생로랑의 쇼는 1970~80년대 향락적인 파리의 밤 문화를 소환했다. 거대한 YSL 로고를 형상화한 수국 정원을 중심으로, 오버사이즈 가죽 재킷과 펜슬 스커트를 입은 모델들이 날카로운 스틸레토 힐 소리를 울리며 어둠 속을 활보했다. 가죽 군모를 눌러쓴 올 블랙 룩에서는 당대 미국의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렌즈에 담겼던 금지된 쾌락의 향취가 번졌고, 정원을 배회하는 모델들의 실루엣에는 은밀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어 색색의 트렌치코트를 걸친 모델들이 행진하듯 무대를 가르며 등장했다. 단단히 여민 앞섶과는 달리 얇은 나일론 소재가 빛을 받아 몸의 곡선을 은근하게 드러냈다. 대미를 장식한 건 바로 실크 이브닝드레스다. 풍성한 주름과 러플 장식이 밤바람에 나부끼며 런웨이를 화려하게 물들였다.

1739년 지어진 런던의 맨션하우스. 번쩍이는 금빛 돔과 대리석 기둥 아래서 시몬로샤의 쇼가 시작됐다. 저스틴 컬랜드의 사진집 ‘Girl Pictures(소녀 사진들)’에서 영감을 받은 이번 컬렉션은 여성의 자의식이 처음 깨어나는 찰나를 포착한다. 삐딱하게 솟은 크리놀린 드레스, 헝클어진 브라렛, 이불을 본뜬 플로럴 퀼팅 셋업과 온몸을 감싼 비닐 랩, 과장된 주얼리는 사춘기 소녀의 불안과 혼란을 시각화한 장치다. 베개 모양의 백을 끌어안고 무표정으로 걷는 모델들의 모습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아의 한 조각을 투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로 상반된 소재와 실루엣을 교차시켜 순수함 속의 저항을 드러낸 시몬로샤. 그의 쇼는 향수 어린 로맨티시즘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는 사춘기의 초상일 것이다.

화려함과 부를 찬미하는 패션계에 대한 미우치아 프라다의 반문이 이번 컬렉션에 고스란히 담겼다. 18세기 궁정의 휘황찬란한 복식 대신 그 시대 여성 노동자의 옷차림을 상징하던 앞치마를 선택한 것. “공장에서 가정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담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이번 컬렉션은 보이지 않는 여성의 노동과 현대 사회의 불평등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관객들은 식당을 연상시키는 붉은 고무 바닥과 천으로 덮인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쇼를 지켜봤다. 희미한 세척액 냄새가 퍼지는 가운데 투박한 가죽과 거친 면, 손뜨개 앞치마를 맨 모델들이 걸어 나왔다. 비즈로 촘촘히 수놓은 앞치마를 비키니 위에 겹쳐 입거나, 가죽 앞치마를 재킷과 매치한 파격적인 스타일링은 전통적 성 역할과 복식의 경계를 흔들었다. 쇼의 말미를 장식한 1970년대풍 꽃무늬 앞치마 드레스는 오랜 세월 가사 노동을 이어온 무명의 여성들에게 바치는 조용한 헌사처럼 다가왔다.

지속가능성에서 즐거움을 찾는 콜리나스트라다의 쇼는 마치 거울 앞에 선 듯 완벽히 호흡을 맞춘 2명의 모델로 시작됐다. 분홍빛 엠파이어 웨이스트라인 톱에 풍선처럼 부푼 카고 데님 팬츠를 입은 모델 뒤로, 같은 디자인을 올 블랙으로 연출한 또 다른 모델이 그림자처럼 따라 나왔다. 이어 등장한 모델들도 마찬가지였다. 근사한 드레이프 드레스를 입고 짝을 맞춰 걷는 그들은 빛과 어둠의 이중주처럼 서로를 비췄다. 과거의 흔적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빛 속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컬렉션 전반에 스며 있었다. 동시에 변화를 향한 희망 어린 서사가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겹치고 어긋난 불협화음이 만들어낸 새로운 실루엣과 불규칙한 리듬은 예측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품게 했다. 꿈의 파편 같은 몽환적인 색채와 정교한 연출 속에서 콜리나스트라다는 자신만의 신비로운 디자인 세계를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61명의 어린이 오케스트라 군단이 연주하는 클래식 선율 속에서 막을 올린 메종마르지엘라의 2026 S/S 컬렉션. 16세기 낡은 성벽을 옮겨놓은 듯한 세트 위로 중세 수도사를 연상시키는 긴 로브 차림의 모델들이 환영을 드리웠다. 고딕풍 가죽 코트와 드레스, 미스터리한 실크 베일 테일러링, 즉흥적인 테이핑 기법, 업사이클링 주얼리는 하우스가 오래도록 탐구해온 ‘낡은 것의 새로움’이란 패션 철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강렬했던 건 모델들의 입을 틀어막은 포 스티치(four stitch) 금속 마우스피스. 억지로 웃는 듯한 섬뜩한 비주얼은 불편할 만큼 소름 끼쳤고, 그 부자연스러움이야말로 이번 쇼의 핵심 메시지였다. 마우스피스로 ‘익명성’을 부여한 대담한 연출에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이 충격적인 피스가 실제 유행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지만, 메종마르지엘라의 새 시대가 강렬한 첫 장을 써 내려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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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강현숙 기자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알라이아 콜리나스트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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