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지난해 8월 국제바이애슬론연맹 부회장에 당선된 전 국가대표 스키선수 김나미씨(36).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명예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90년대 베스트셀러 ‘강한 여자는 수채화처럼 산다’ 저자인 화가 이정순씨(62)의 딸이다.
70년대 초반 남편 김성균씨와 함께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빈손으로 강원도 진부령에 알프스 스키장을 일구던 당시의 아픔과 추억을 담담하게 써내려간 에세이집‘강한 여자는…’을 읽었던 독자라면 어린 나이에 스키 유학을 떠났던 그의 딸이 이제 우리나라에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앞장서 뛰고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열여섯 살 때 알파인스키 국가대표로 뽑혀 전국대회를 휩쓸며 국내 최강의 자리를 지킨 데 이어 은퇴 후에도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딸을 보며 이씨는 고인이 된 남편의 모습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김씨가 열 살 때 두 살 위인 오빠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스키 유학을 떠난 것도 자녀들이 스키선수로 성장하기를 바랐던 남편의 뜻이었다고. 요즘 같은 조기유학의 개념이 없던 시절, 남편의 결정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저는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걸 반대했어요. 하지만 남편의 신념이 확고해서 따를 수밖에 없었죠. 제 애틋한 마음 때문에 아이들 앞날을 막지 말자고 애써 마음을 독하게 먹었어요.”
가난했지만 가족 간의 사랑이 충만했던 진부령 시절
이씨 가족이 강원도 진부령에 스키 산장을 세운 것은 지난 72년. 김씨가 겨우 걸음마를 시작하던 때였다. 이정순씨 부모가 설립한 학원재단 운영에 참여했던 두 사람은 재단이 어려움에 빠져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자 진부령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알프스 산장에서의 삶은 풍요로웠다. 가족들의 끊임없이 샘솟는 애정과 그만큼 아름다웠던 꽃과 나무와 바람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곧 스키가 각광받을 것이라고 내다본 남편은 스키장을 일구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스키를 배운 데 이어 이어 자녀들도 유학을 보내 스키를 가르쳤다고.
“처음에는 오빠만 보낼 생각이었대요. 저도 같이 가겠다고 울며 매달려 덤으로 따라가게 됐죠. 그때는 너무 어려서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어요. 시골에서 자동차도 제대로 못 타보고 살다가 비행기 타고 외국에 나간다니 그저 신나고 좋았던 거죠.”
이씨가 어린 자식들과 떨어져 살며 동네 아이들이 부르는 ‘엄마’ 소리에도 놀라 문 밖으로 뛰어나가 멍하니 서 있기도 하며 울고 지냈던 시간은 그러나 예상보다 길지 않았다.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 손에 스키장을 넘기게 된 것. 이씨 부부는 기둥 하나, 창문 하나에도 땀과 정성, 추억이 배어 있는 산장을 뒤로하고 85년 아이들이 있는 오스트리아로 이민을 떠났다. ‘알프스의 심장’이라 불리는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에 터를 잡고 남편은 사진작가 겸 등반가로 활동했고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이씨는 다시 미술사 공부를 했다.
“인생이란 참 묘해요. 아이들이 돌아올 자리라고 여겼던 스키장을 잃고 참담한 심정으로 진부령을 떠났지만 그로 인해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을 수 있었으니까요. 저도 아쉬웠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요.”
오스트리아에서의 삶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고국에 대한 향수를 떨치지 못했던 남편은 89년 아이들과 함께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는 박사과정을 마치고 이듬해인 90년 귀국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남편은 서울 신촌에 지하 카페와 화실까지 완벽하게 갖춘, 진부령 산장과 똑 닮은 집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그의 가족은 이 집에‘내 사랑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진부령의 알프스에서 티롤의 알프스로 옮아갔던 생활 터전이 다시 서울의 알프스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또 우리 가족의 추억과 사랑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 지었어요.”
‘신촌 알프스’에 살던 시절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국제스키 월드컵에 참가하는 등 선수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은 김씨는 94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폐암으로 남편 잃은 후 몸에 이상 느껴 병원 찾았다가 자궁암 진단 받아
남편과의 추억이 깃든 신촌 알프스를 떠나 딸 김나미씨 내외가 사는 경기도 분당으로 이사한 이정순씨는 딸을 대신해 손자를 돌보고 강의와 그림 작업 등을 하며 살고 있다.
김씨와 바이애슬론과의 인연은 2003년 우연히 바이애슬론 국제행사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맡으면서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바이애슬론은 스키의 거리 경기와 사격을 혼합한 스포츠로, 올림픽에서 10여 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으며 특히 유럽에서는 경기장마다 수만 명의 관중이 운집하는 인기 종목이다.
지난해 8월 러시아에서 열린 국제바이애슬론연맹 총회에서 김씨가 부회장에 선출된 날은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가족의 중심이었던 아버지는 지난 98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평소 등산과 스키로 건강을 단련했던 아버지가 몸의 이상을 느끼고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로 암이 진행돼 손을 쓸 수가 없었어요. 결국 3개월 만에 세상을 뜨시고 말았죠. 투표 결과가 발표되고 당선소감을 말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가는데 아버지가 옆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것만 같았어요.”
이씨도 딸의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말할 수 없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살아서 소식을 들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어요. 스키장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지 모르는데….”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은 이씨는 극도의 무력감에 빠지게 됐다고 한다. 남편 병간호 중에도 두 번이나 쓰러졌던 그는 딸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병원을 찾았다가 뜻밖에도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고.
“‘나는 초기에 발견해 수술하면 회복이 된다고 하는데도 이렇게 암담한데 남편은 실낱같은 희망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최선을 다해 병상을 지켰지만 미안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지금 돌이켜보면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남편과 잠시라도 고통을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아 감사해요.”
요즘 김씨는 2009년 평창 세계선수권대회 준비, 2014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홍보대사로 활동하느라 한 달이면 절반 가까이 외국 출장을 다닌다. 남편과의 추억이 깃든 신촌 알프스를 떠나 딸 내외가 살고 있는 경기도 분당으로 이사를 한 이씨는 바쁜 딸을 대신해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를 돌보는 한편 대학에 출강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2003년 전시회를 연 후 작품활동이 뜸했던 그는 내년쯤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강의와 그림 작업 등 해야 할 일이 많아 손자를 보는 것에 대해 때로 갈등을 느끼지만 딸이 열심히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에서 하다 보니 요즘은 손자 돌보는 일이 가장 충만한 기쁨이고 행복이 됐어요. 딸이 남편이 그토록 바라던 이론과 실기를 겸한 전문 체육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인력으로 활동하게 된 만큼 앞으로도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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