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승철(47)에겐 ‘까칠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평소 언론 인터뷰나 방송 토크쇼에서 보여준 직설적인 화법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년까지 4년이나 맡아온 엠넷 ‘슈퍼스타K’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게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슈퍼스타K’에서 보여준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평가는 그를 ‘독설가’ ‘까칠한 남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까칠한 남자’로 만든 ‘슈퍼스타K’에서 오히려 이승철은 대중 친화적 인물로 변화해갔다. 작년 ‘슈퍼스타K4’의 생방송에 진출할 10개 팀을 선발하는 ‘슈퍼위크’에서 이승철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출연자에게 건넨 “어서 와, 슈퍼스타K는 처음이지?”란 인사말과 다소 거만해 보이는 표정이 캡처돼 각종 패러디를 양산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어느 학교 계단에 붙은 ‘어서 올라와’란 스티커, 어느 대학이 신입생을 환영하며 내건 ‘어서 와, 관악산은 처음이지?’란 현수막, 어느 교실 뒷문에 붙여진 ‘어서 와, 추워, 문 닫고 와’란 안내문 등이 그것이다.
11집 ‘마이 러브(My Love)’ 발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이승철의 녹음 스튜디오를 찾았다. 푸른 셔츠에 멋스럽게 콧수염을 기른 이승철은 환한 미소로 “어서 와!”라며 기자를 맞았다.
일부 이승철 팬은 ‘어서 와’ 패러디를 두고 “데뷔 30주년을 앞둔 국민가수인데 괜한 놀림감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냈다. 그러나 이승철은 오히려 “허허” 웃으며 이를 반겼다. 이미 이승철은 6월 1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벌인 11집 쇼케이스 이름을 ‘어서 와’로 짓는 센스까지 보여줬다.
“내겐 천운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서 와’ 패러디가) 가수 이미지를 젊게 해주고, 10~20대에게도 친근한 존재가 되게 해줬잖아요. 사실 ‘슈퍼스타K’ 심사위원을 오래 하면서 안티도 생겼지만, 나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또 다른 세계를 만나게 해줬어요. 감사한 일이죠.”
그는 ‘어서 와’ 패러디에서 비롯된 유쾌한 이미지를 자신의 여름 콘서트에 접목했다. 7월부터 열릴 ‘비치 보이스(Beach Voice)’란 이름의 콘서트를 홍보하는 영상에서 이승철은 해변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만끽하는 소녀 옆으로 다가가 야자수를 마시며 “어서 와, 비치 보이스는 처음이지?”라고 묻는 능청스런 연기로 웃음을 안겼다. 까칠하기 짝이 없는 ‘슈퍼스타K’ 심사위원의 이미지를 뒤엎는 반전인 셈이다.
‘감각’이 뛰어난 ‘감각주의’ 가수
평범한 노래도 특별한 노래로 만드는 마법 같은 목소리를 가진 이승철을 두고 사람들은 ‘보컬의 신’이라 칭찬한다. 해외에서 활약 중인 후배 가수 싸이도 이승철 11집 수록곡인 ‘사랑하고 싶은 날’이 공개되던 6월 14일 “한국 최고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이승철의 이 음악을 들어보시길”이라는 글을 트위터에 남기며 ‘사랑하고 싶은 날’ 뮤직비디오 인터넷 페이지 주소(URL)를 링크했다.
이승철은 훌륭한 목소리로 찬사를 받지만, 사실 그의 진짜 능력은 ‘감각’이다. 대중의 감수성을 읽는 감각, 시대의 트렌드를 흡수하는 감각. 그 감각은 이승철의 참신한 음악성에 신선도를 유지시켜주고, 28년째 ‘현재 진행형 가수’로 만들어준다.
6월 18일 발표한 ‘마이 러브’는 이런 이승철의 감각을 극대화한 앨범이다. ‘네버 엔딩 스토리’ ‘말리꽃’ 같은 대중 지향적인 애절한 발라드는 없지만 새로운 감각이 진한 향기를 뿜는다. 힙합 스타일의 ‘늦장 부리고 싶어’, 레게풍의 ‘비치 보이스’ 등 그가 처음 시도한 장르도 있고, 아메리칸 스탠더드 팝 넘버 ‘그런 말 말아요’처럼 새로운 ‘이승철 발라드’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도 있다.
애절한 팝 발라드를 부르는 보컬리스트이면서, 이번 11집 홍보에서 과감하게 유머 코드를 활용하며 신선한 모습을 보여준 이승철은 새 앨범에 담긴 곡부터 이미 새로웠던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60곡쯤 녹음했다”는 이승철은 시간과 제작비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반복하며, 히트곡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음악 색깔을 선명하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 이번 앨범에 ‘센슈얼리즘(Sensualism·감각주의)’이란 부제를 붙인 것도 감각적인 음악에 대한 이승철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가을쯤 대중성 강한 발라드를 따로 담아 11집 파트2 ‘에코티즘(개인주의)’이란 이름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흔히 ‘감각적인 음악’은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악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타이틀곡 ‘마이 러브’를 비롯해 9곡의 수록곡 가운데 7곡을 작곡한 프로듀서 전해성은 이승철과 “생활을 같이하다시피 하면서” 순간순간의 감성을 악보에 옮겼다.
“조용필 선배의 활약에 충격과 자극”
앨범 막바지 작업이 한창일 때 접한 ‘가왕’ 조용필의 컴백은 이승철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자신도 항상 트렌드를 앞서가며 불황에도 앨범을 고집하는 행보로 후배들의 귀감이 됐지만, ‘가왕’의 또 다른 참신한 시도는 이승철을 더욱 분발하게 했다. 이를 두고 ‘이승철이 조용필에 자극받아 앨범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사실 조용필 선배의 새로운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그분의 활동에 충격을 받았죠. (4월 말 발표된 조용필 19집 타이틀곡) ‘헬로’ 티저 영상을 보는 순간 그 감각에 놀랐어요.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 또 그런 시도로 대중을 열광시킬 수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죠. 조용필 선배의 음악은 대중으로 하여금 ‘아티스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나게 하고, 후배 가수들에게도 새로운 이정표가 돼주셨죠. 그런 면에서 존경스럽고, 부럽고,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조용필 19집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바운스’만큼이나 이승철 11집 수록곡 ‘40분 차를 타야해’도 파격적인 스타일로 꼽힌다. 동아방송대 실용음악과에 재학 중인 정수경이 만든 이 노래가 참신하면서도 생소했던 이승철은 “이런 노래를 불러야 내가 새로운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녹음 작업에 임했다.
신곡을 처음 받았을 때 ‘첫 느낌’을 중요시하는 이승철은, 녹음에서도 작곡가가 처음 들려준 데모 느낌에 충실하게 한두 번의 가창으로 작업을 끝내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40분 차를 타야해’를 녹음하면서는 7번이나 가녹음한 후, 이들 가운데 최상의 소절만 조합해 데모를 만들어 다시 노래 연습을 했다. “변화를 위해서는 기존 스타일을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스태프들이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걸 처음 봤다고 하더군요. 지난 3개월간 거의 매일 밤을 새우고 노래 연습을 하고, 그렇게 노력했습니다. 이번 앨범은 그래서 후회보다는 뿌듯함이 많은 작품입니다. 노래하면서 일어난 많은 에피소드가 지금 다시 생각나고… 감회가 새롭네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노력하게 만들어주신 분이 바로 조용필 선배예요. 이번 11집은 (가수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앨범입니다. ‘11’이란 숫자에서 앞의 1자를 빼면 다시 1이 아닙니까.”
사실 이승철은 늘 변화를 추구해왔다. 솔로 데뷔 초기엔 록 발라드가 많았지만, ‘오늘도 난’처럼 ‘달리는’ 곡도 불렀다. 그런가 하면 다시 팝 발라드로 대중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음색을 가졌지만, 자신의 창법을 고집하지 않고 노래에 맞는 스타일의 목소리를 내왔다.
“나는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보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노래를 부르는 편입니다. 대중적이란 의미죠. 사실 내게 어떤 창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노래도 이승철 창법에 맞춰서 만들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난 평소 작곡가가 원하는 대로 노래를 불러왔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부르지 않아요. 내 것만 고집하며 안 됩니다. 그래야 다른 걸 받아들일 수 있어요.”
“아내는 인생 매니저, 가족은 산소 같은 존재”
이번 앨범에는 앨범 부클릿엔 표기되지 않은 이른바 ‘히든 트랙’이 한 곡 담겨 있다. 한웅재 목사가 만든 CCM(기독교 음악) ‘소원’이 그것이다. 이는 “찬송가를 부르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아내를 위한 선물이다. 이승철은 2007년 1월 홍콩의 한 호텔에서 지금의 아내 박현정 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섬유사업을 하던 박씨는 두 살 연상이다. 불교 모태 신자였던 이승철은 아내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승철은 과거 한 토크쇼에서 아내를 두고 “내 인생의 매니저”라고 소개하면서 “급하고 다혈질인 내 성격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더욱이 이승철은 아내와 교제를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청혼했다고 고백해 놀라게 했다.
2000년대 중반 ‘인연’ ‘네버 엔딩 스토리’ ‘불새’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던 이승철이지만, 결혼 후 그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이승철의 표현처럼 “인생의 매니저”를 만난 덕분이리라. 이승철은 방송 출연이나 언론 인터뷰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아내 자랑에 딸 자랑을 하면서 가정적인 면모를 드러내왔다. 미국에서 사업을 한 박현정 씨는 능통한 영어 실력에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나 이승철의 회사 운영과 앨범 작업에 절대적인 도움을 줬다. 이승철도 결혼 후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아내의 도움이 컸다”고 말해왔다. 요즘 그의 활동을 진두지휘하는 진앤원뮤직웍스는 그의 두 딸 진(21)과 원(5)의 이름에서 땄다. “매일 나의 아침은 세 여자와 함께 시작됩니다. 하지만 요즘엔 하나 더… 새로운 나의 음악이 흐릅니다”며 11집 앨범 재킷에 그의 달달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승철은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도 아내의 존재에 고마움을 나타냈다. “캐나다에서 녹음할 때나 미국에서 마스터링 작업을 할 때 아내가 통역에서부터 회계 문제 등 많은 도움을 줬다”고 소개한 이승철은 “아내는 나의 정신적 지주이고 이정표다. 가족은 내게 산소 같은 존재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가족은 언제나 내게 힘을 준다”며 행복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이승철은 시즌 5를 맞는 이번 ‘슈퍼스타K’의 심사위원을 또 맡았다. 시즌 1부터 심사위원을 맡았기에 이승철은 자신의 음악적 행보에서 ‘슈퍼스타K’를 빼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번 앨범 작업을 하면서 “‘슈퍼스타K’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많은 후배 가수도 보겠지만 ‘슈퍼스타K’ 심사위원이기에 더 신경이 쓰였어요. 평소 제 심사에 공감하지 못했던 분들의 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죠. ‘당신은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시선이 느껴졌어요.”
이승철은 그래서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히트곡보다 색깔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시도에 용기를 냈고 “11집 ‘마이 러브’라는 만족스런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슈퍼스타K’, 새로운 친구 만나는 행복을 얻는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심사평으로 괜한 안티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승철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게 매우 행복하다”며 ‘슈퍼스타K’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얼마 전 지역 예선을 시작했는데, 이번에도 좋은 재목이 많았어요. 주위에선 ‘그렇게 오디션을 하는데 아직도 인재들이 나오느냐’고 묻는데, 진짜 끊임없이 계속 나옵니다. 특히 갈수록 참가자들이 더 정제된 느낌이랄까요. 예전엔 사실 참가에 의의를 둔 응시자들도 많았는데, 이번엔 진짜 가수가 되고 싶은 사람이 많아요. 그만큼 실력이 뛰어난 응시자들이 많다는 것이죠. 이번 시즌 5에서도 진짜 실력 있는 친구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가 큽니다.”
11집 ‘마이 러브’ 앨범엔 동아방송대 실용음악과 2008학번 학생들이 만든 두 곡이 담겨 있다. ‘늦장 부리고 싶어’와 ‘40분 차를 타야해’가 그것. 이승철이 두 곡의 ‘게스트 송’을 담은 이유는 ‘슈퍼스타K’ 심사위원을 계속 맡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평소 신인이나 무명 작곡가의 곡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유명 작곡가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줬던 이승철은, 이번에도 신예 작곡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대학의 실용음악과 졸업생이 1년에 수천 명씩 배출되지만 그들이 활동할 만한 분야가 없어요. 동아방송대 학생들이 나한테 40곡을 보냈는데, 드라마 OST로 사용하면 히트할 곡이 30곡은 되더군요. 정말 좋은 곡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런 노래가 빛을 못 본다는 거죠. 일부 히트 작곡가에게만 몰리다보니 기회가 없는데, 이런 신인 작곡가들을 기용하면 신선하고 좋은 음악이 가요계에 많이 나올 겁니다. 그래서 이번 제 앨범에 학생들 노래를 담았죠. 홍대 출신들, ‘슈퍼스타K’에서 소개되는 작곡가들의 감각은 참 신선합니다. 아이디어 면에서 배울 점이 많았어요.”
인터뷰를 마친 이승철은 자신의 녹음실 내부 곳곳을 살피면서 “이번 앨범엔 많은 추억과 경험, 정성이 담겨 있다.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앨범을 낼 것 같다”며 미소를 보였다.
“이 스튜디오를 12년 전에 완공했는데, 그때 CD 시장이 무너지고, 녹음실 사업도 사양길이었죠. 그래서 사람들은 제게 ‘왜 막차를 타느냐’며 수십억원을 들인 녹음실 건축에 의구심을 나타냈어요. ‘내가 늙어서 인기도 없고 아무도 앨범 안 내줄 때 내가 직접 내겠다’고 해서 만든 녹음실입니다. 음반 시장이 무너진 것과 내 앨범을 결부시키고 싶지 않아요. 나는 죽을 때까지 앨범을 낼 겁니다. 음반 시장이 무너졌다는데도 요즘 LP 바는 계속 생기잖아요. 음악을 재생하는 데 차이는 있겠지만, 음악에 대한 애정은 언제나 변함없을 겁니다. 사람은 음악 없이 살 수 없으니까요.”
이승철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개인 녹음실을 소유하고 있다. 12년 전 40억원을 들여 만든 녹음실은 완벽한 시스템을 자랑한다. 그는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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