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정은아(43)는 완벽해 보인다.
브라운관 속에서 그는 늘 부드러운 미소와 재치있는 말솜씨로 프로그램을 지배한다. 지난 90년 KBS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데뷔한 지 18년 째. 그동안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는 늘씬한 몸매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외모도 그의 ‘완벽함’을 뒷받침해주는 요소다. 97년 일찌감치 프리랜서로 독립했고, SBS ‘김승현·정은아의 좋은 아침’, KBS ‘비타민’ ‘스펀지’ 등 연예오락 프로그램을 주로 진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그를 지적이고 단정한 ‘아나운서’로 생각한다.
▼ First keyword ; 정·사·각·형 “젊은 시절 제 꿈은 네모반듯하고 완벽한 안정을 이루는 거였어요”
“전 원래 흐트러진 걸 잘 못 참아요. 어떤 상황이든 완벽하게 알고 통제할 수 있어야 마음이 놓이죠. 삶의 규칙을 깨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요. 작은 벽돌 하나가 빠지면 모든 게 무너져내릴 것 같거든요. 규칙적으로 먹고 자고 일하고 운동할 때 편안함을 느껴요.”
정은아는 여느 사람들처럼 “제가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은 털털해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완벽함’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백조”라고 했다.
그에게 ‘완벽함을 향한 추구’는 생래적인 것이라고 한다. 정은아는 막 철이 들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고 털어놓았다.
“왜 그렇게 자의식이 강했는지, 하루 종일 벽보고 앉아 저를 분석하곤 했어요. 내 장점과 단점,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힘들어했죠. 아주 어릴 때부터 전 다른 사람의 칭찬도 믿지 않았어요. 부모님이 ‘잘했다’고 하셔도 속으로 ‘저건 사실이 아닐 거야. 이거 이거가 잘못됐잖아’ 했을 정도니까요(웃음).”
그렇게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하던 습관은 아직도 그 안에 남아 있다고 한다. 정은아가 방송을 사랑하는 건, 방송을 통해 비로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교 4학년 때 취업 준비를 하다 고등학교 시절 방송반 활동을 했던 게 생각나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방송에 특별한 뜻은 없었다고. 그런데 준비 없이 치른 시험에서 최종면접까지 가는 동안 그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카메라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 묘하게도 편안했던 것이다. 그 앞에서는 왠지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습지만 시험에서 떨어지고 난 뒤 비로소 ‘꼭 아나운서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음해 최종면접에서 또 떨어지고, 3수 끝에 KBS에 입사했죠. 저는 지금도 가끔 그때의 저를 향해 ‘너 좀 웃겼어’라고 해요(웃음). 한 번 안 되고 두 번 안 되면 ‘아, 이건 내 길이 아니구나’ 포기할 법도 한데 끝까지 매달렸으니까요. 결과적으로 그 고집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죠.”
어렵게 아나운서가 된 만큼 기쁨도 커서, 정은아는 입사 후 늘 남보다 한 시간씩 일찍 출근했다고 한다. 텅 빈 스튜디오에 들어가 남몰래 진행 연습도 했다. 그리고 입사 후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그는 동기 가운데 처음으로 아침 생방송 ‘전국은 지금’의 메인 MC가 됐다.
“저 같은 햇병아리가 생방송 메인 MC를 맡는 건 참 드문 일이에요. 그런데 겁이 나기는커녕 신나기만 했죠. 첫 방송을 하던 날, 제 앞에 앉아 있는 방청객부터 카메라, 리포팅을 하고 있는 저 자신까지 모든 게 얼마나 신기한지 하는 내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정말 재밌게 했어요. 방송을 끝내고 아나운서실에 갔더니 선배들이 전부 일어나 박수를 치며 축하해주시더군요.”
정은아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스스로도 마음을 열고 자신을 인정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도 있구나’라는 깨달음은 제게 정말 큰 선물이었어요. 늘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표만 가득하던 제 삶에 비로소 ‘아, 이거구나’ 하는 느낌표가 나타난 거죠. 지금 생각해봐도 그렇게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했던 때는 없는 것 같아요.”
정은아는 20대 시절의 자신을 회고하며 “‘극성스럽다’ 싶을 만큼 일에 매달렸다”고 말했다. 5분짜리 짧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자료를 산더미같이 준비했고, 녹화 뒤엔 편집과정까지 꼼꼼히 살폈다고 한다.
“작가와의 인터뷰 일정이 잡히면 그 사람이 발표한 모든 작품을 찾아 읽고, 너무 오래돼 구할 수 없는 책은 요약본이라도 봤어요. 녹화 뒤엔 편집실에 가서 제가 진행한 내용 가운데 어떤 게 편집되고 어떤 게 살아남는지 지켜봤죠. 그러면서 ‘아, 이게 좋은 질문이었구나’, ‘저런 리액션은 문제가 있었구나’라는 걸 배웠어요. 사람들은 제가 별로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진행하는 것 같다고 하지만, 실은 진짜 노력 많이 했답니다(웃음).”
정은아는 입사 1년 만에 ‘아침마당’ MC를 맡아 편안하고 순발력 있는 진행을 보이며 스타덤에 올랐고, 이후 지금까지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겐 여전히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한다. 늘 스스로를 완벽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하루에 7시간 이상씩 충분히 자고,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운동도 두 시간 이상씩 한다. ‘김승현·정은아의 좋은 아침’을 9년째 진행하다보니 가끔은 그의 삶을 거의 다 외우고 있는 듯 느껴질 만큼 친근한 게스트가 출연할 때도 있지만, 방송 준비는 늘 ‘처음처럼’ 한다.
“가끔 전 제가 원하는 게 정사각형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네모반듯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틀에 둘러싸여 안정감을 느끼길 원하는 거죠. 제가 부족한 걸 알기 때문에 늘 ‘더, 더’ 완벽을 좇았기에 치열한 방송계에서 지금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Second keyword ; 호·기·심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으면서 세상과 주변 사람들 둘러볼 여유 갖게 됐어요”
하지만 그는 종종 이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선택을 한다. 지난 97년 ‘잘 나가던’ 아나운서직을 버리고 프리랜서로 독립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여자 아나운서는 남자 진행자의 보조 MC 역할을 하는 게 일반적이던 시절, 그는 KBS에서 자신의 색깔과 목소리를 드러내는 여자 MC로 평가받으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안전한 정사각형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참 이율배반적이죠(웃음). 생각해보면 저는 안정을 끝없이 추구하지만 그게 현실이 되는 순간,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그때 기분이 그랬어요. 어린 마음에 일이 점점 쉬워지는 것 같으니까 지루하게 느껴지고, 다른 환경에 가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여성 프리랜서로서 롤 모델이 드문 시기였지만 ‘바깥 세상은 어떨지 한 번 경험해보자’는 마음이었죠.”
정은아는 “하지만 뛰쳐나가고 나선 또 바로 그 불안정한 상황을 안정적으로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며 웃음지었다. 다행히 프리랜서를 선언하자마자 다른 방송사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오고, CF 계약도 성사돼 휴식기 없이 일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게 무슨 도전이냐’ 할 수도 있는데, 똑같은 MC를 해도 프리랜서로 일하는 건 굉장히 달랐어요. 저 스스로 결정할 부분이 많아졌거든요. 특히 전 매니저 없이 일했기 때문에 프로그램 선택뿐 아니라 제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협의하는 일까지 직접 했죠. 힘들었지만 흥미진진하고 재밌었어요(웃음).”
정은아에게 삶의 키워드를 물었을 때 그가 처음 답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읽기’였다. 완벽한 안정을 향한 추구와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 서로 충돌할 수 있는 두 지향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신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쉼 없이 읽어온 그에게 가까운 사람들은 종종 “그렇게 읽고도 아직 책이 좋으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는 “생각해보면 나는 완벽한 안정을 위해 일하면서, 늘 책을 통해 내가 볼 수 없는 세상의 문을 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전 요리도 참 좋아해요. 원래 맛에 관심 많은 사람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많다고 하잖아요. 어디든 여행을 가면 꼭 그 나라 식료품점에 들러 재료들을 살펴보죠. 제가 모르는 채소나 과일이 있으면 하나라도 사다가 호텔방에서 맛을 보고요.”
그는 일에 매달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20대 시절엔, 자신의 이런 호기심이 낯선 세계를 향한 도전과 통할 수 있다는 걸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아나운서 생활을 통해 자신이 만족할만한 ‘정사각형’을 이뤘을 때, 호기심은 그 너머의 세계로 정은아를 데려갔다. 그리고 프리랜서 생활 11년을 보내며 다시 견고한 안정을 이룬 지금, 그는 또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있다고 한다. 그건 “그동안 나와 더불어 살아온 주위 사람들”이다.
정은아는 “부끄럽지만 지금까지는 언제나 내 부족한 점, 내가 해야 할 일만 생각했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 바빠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다”며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지금까지의 내 삶을 이끌어온 건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그 시간을 지내온 수많은 이들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요즘 새삼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주위 사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그동안 전 사람들에게 저를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절 언제나 여유있고 뭐든지 척척 잘 하는 정은아로 보는 이들에게, 실상은 혼자 많이 고민하고 발버둥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요. 일하는 공간과 내 공간, 밖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적인 사람이 섞이지 않게 딱 갈라놓고 살았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면이 조금씩 사라지더라고요.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으면서, 내 주위의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그동안 ‘인터뷰 안하는 방송인’으로 소문났던 정은아가 기자를 만나 자신의 삶을 얘기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런 변화의 한 모습일지도 몰랐다. 그는 최근 가까운 후배들과 함께 만든 모임에 대해 들려주기도 했다. 와인을 마시자는 구실로 종종 모이는데, 그때마다 한 명이 파티를 주재해 직접 요리를 하고 적당한 와인과 음악을 고른 뒤 자신의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고 한다. 집주인의 개성이 듬뿍 담긴 자리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취향을 나누고 편안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정은아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신선한 자극을 많이 받는다”며 “이런 만남이 참 재미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많이 가볍고 자유로워졌다.
▼ Third keyword ; 구·석 “혼자 살아온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한 든든한 ‘믿는 구석’ 남편”
정은아는 이런 변화를 서른두 살, 프리랜서를 선택했을 때에 뒤이은 삶의 두 번째 전환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때 아나운서 정은아에서 프리랜서 정은아로 자연스럽게 변해갔듯, 이번에도 ‘자신의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던 정은아’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정은아’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이 변화를 지켜보며 그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는 건 정은아의 ‘믿는 구석’ 남편이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게 85년이에요. 혼자 산 시간보다 그와 함께 살아온 날들이 더 길죠. 그래서 이젠 피붙이라고 해야 하나…, 제 삶에 아주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또 다른 나 같이 느껴져요.”
사실 그의 남편은 정은아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굳이 묻지 않아도 끊임없이 등장했다. KBS에 입사한 뒤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인터뷰이에 대한 자료를 찾느라 고생할 때 늘 그를 도와준 건 남편이었고, 그가 프리랜서 독립에 대해 고민할 때 “그렇게 해”라고 흔쾌히 말해 “아, 이게 별 일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해준 것도 남편이다. 요리에 관심 많은 정은아가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 가장 먼저 먹어주는 이도, 새로운 책을 읽고 받은 감동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을 때 가장 먼저 귀를 기울이는 이도 남편. 그에 대해 정은아는 “내가 세상에서 부딪히고 상처 입을 때면 늘 들어가 쉴 수 있는 ‘구석’”이라고 했다. 그는 프리랜서 독립 뒤 일주일에 나흘 일하고 사흘은 쉬는 스케줄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사흘 동안 자신을 재충전해주는 것이 바로 남편과 가정이라고 한다.
“결혼 초엔 갈등도 있었죠. 남편이나 저나 고집이 센 편이라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다툼이 있을 때 둘 사이를 오가며 중재해줄 아이가 없으니까 서로 눈치보다 손을 내밀 때까지 힘이 들기도 했고요. 예전엔 우리가 한 대의 자전거에 앉아 서로 다른 쪽으로 페달을 밟느라 고생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젠 두 사람이 각자의 자전거를 몰고 같은 방향으로 달릴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워졌어요.”
정은아는 자연스럽게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가장 궁금해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왜 아이를 갖지 않느냐”는 것. 이에 대해 그는 “결혼 초엔 일에 몰두하느라 아이 갖는 걸 미뤘고, 그 뒤엔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한동안 아이를 갖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지만, 이젠 ‘세상엔 사람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도 있나보다’라는 걸 받아들이는 중”이라고 한다.
“아직 ‘저희 부부는 아이 없이 살기로 했어요’라고는 못하겠어요. 마음 한 편에 ‘언젠가는’이라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젠 둘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생각하곤 합니다.”
젊은 시절 “온 국민이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되리라”는 꿈을 품었던 정은아의 지금 소망은 “삶이 묻어나는 얼굴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무표정한 스틸 컷 한 장 속에서도 살아온 세월이 느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가끔 책을 읽을 때 저는 책 날개에 실린 작가의 얼굴 사진을 보며 그는 어떤 목소리를 가졌을까 상상하곤 해요. 그리고 그 목소리로 글을 읽을 때가 있죠. 자신의 삶과 문학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작가의 얼굴, 스쳐가는 작은 사진 한 장으로도 모든 걸 얘기하는 듯한 그런 표정과 삶의 결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갖고 싶어요.”
정은아는 그것이 저절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제 그의 새로운 도전은 ‘진실한 삶’을 사는 게 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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