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와 힙합. 언뜻 생각하면 잘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다. 85년 ‘비내리는 영동교’로 데뷔한 이후 ‘신사동 그 사람’‘짝사랑’ 등 수많은 곡을 히트시키며 ‘트로트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한 주현미(47)가 데뷔 24년 만에 힙합 뮤지션 조PD·윤일상의 프로젝트 앨범에 참여한다고 했을 때 그의 딸은 냉정하게 “엄마, 안 어울려”라며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음악에 도전하고 싶었던 그는 주저 없이 프로젝트에 참여, 트로트와 힙합이 어우러진 듀엣곡 ‘사랑한다’를 내놓았다. 신곡 발표 후 그는 귀 뒤로 넘긴 짧은 단발머리, 검정색 수트 차림의 파격적인 모습으로 한 음악 케이블방송 무대에 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신곡 통해 젊은 세대와 소통할 수 있게 돼 행복해요”
▼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나요.
“젊은 후배들이 제안해왔는데 그 마음이 고마워 거절하지 못했죠. 사실 처음에는 걱정이 컸어요. 두 사람을 좋아하던 우리 딸도 냉정하게 ‘하지 말라’더군요. 안 어울릴 거라고요(웃음). 그러고 보면 우리 딸은 참 냉정해요. 장윤정씨가 부른 ‘어머나’가 처음엔 제게 제안이 들어왔거든요. 사양했다가 나중에 그 곡이 히트하는 바람에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 딸이 ‘엄마가 불렀으면 못 떴을거야’라고 딱 잘라 말하더군요.”
▼ 노래를 처음 받았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
“멜로디를 듣고 정말 흥분했어요. 지금까지 제가 불렀던 곡들에 비해 다소 템포가 빨라 걱정됐는데 그 친구들은 오히려 ‘누님, 우리한테는 느린 곡이에요’라고 하더라고요. 또한 조PD가 쓴 가사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젊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사를 쓸 수 있는지 놀랍더라고요. 가사 중에 ‘후회와 실수는 마치 그림자처럼 그 길에 머물지만… 돌아가도 내 선택에 변함없으니’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건 우리 나이대를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웃음).”
▼ 그렇다면 과거 자신의 선택 중 후회하는 부분이 있나요.
“딱히 후회하는 부분이라기보단, 누구에게나 다 인생은 만만치 않다고 생각해요. 가수로서 순탄한 삶을 살아온 듯한 저 역시 고민이 없진 않았죠. 트로트라는 장르가 내게 맞는 건지, 능력에 비해 과분한 인기를 누린 건 아닌지 하는….”
▼ 노래가 나온 후 딸의 반응은 어땠나요.
“CD 좀 달라고 해서 줬더니 계속 반복해서 듣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노래를 통해 연세 든 분들뿐 아니라 젊은 세대와도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아 행복해요.”
▼ 인순이씨가 조PD와의 듀엣곡 ‘친구여’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는데 라이벌 의식을 느끼지는 않나요.
“인순이 선배가 제 대모이고 워낙 각별한 사이라 라이벌 의식 같은 건 없어요. 사실 인순이 선배가 젊은 가수와 함께한 모습을 보고 또래 가수들이 많이 부러워했어요. 그걸 제가 지금 하고 있으니 행복할 뿐이죠. 세대·장르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됐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 앞으로 가수로서 바람이 있다면.
“제 능력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고 또 누리고 살았기 때문에 지금은 덤으로 사는 거라고 생각하고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주어진 무대에 충실하려고 해요.”
인생 최고의 순간은 결혼할 때, 현모양처 못 되지만 집안 안주인으로 충실하려 노력해
주현미는 인기 절정이던 지난 88년 조용필 밴드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남편 임동신씨(51)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16) 딸(14) 남매를 두고 있다. 두 사람은 85년 함께 미국 LA로 공연을 떠났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88년‘신사동 그사람’으로 한 방송사 연말 가요시상식에서 대상을 받는 순간 수상 소감 대신 목멘 소리로‘여보’라고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던 주현미는 지금도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남편과 결혼할 때’를 꼽는다.
주현미 부부는 연예계의 잉꼬부부로 소문 나 있지만 둘째를 낳은 후 방송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서울 근교 청계산 자락에서 전원생활을 하던 94년‘에이즈에 걸렸다’는 소문으로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 데뷔 3년 만에 결혼을 했는데 일찍 결혼한 게 후회되지 않았나요.
“스물여덟에 했으니까 연예인치고는 좀 이르긴 했어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당시로서는 인기, 가수로서의 삶, 그런 거 다 포기하고 결혼하고 싶었으니까요. 제가 우리 남편을 굉장히 좋아했거든요(웃음). 물론 노래가 천직이다 싶고 중요하지만 저한테는 가족이 더 소중해요. 제 삶을 정리하면서 돌아보면 ‘우리 남편이 제 반쪽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 88년 한 시상식에서 ‘여보’라고 해 화제가 됐는데요.
“남편이 결혼하면서 자기 일을 접고 제 매니지먼트와 음반 프로듀싱 작업을 도와주고 있어요. 같이 음악을 하던 사람인데 저 혼자 무대 위 영광을 누리게 돼 미안하더라고요. 마음속으로 ‘이 상을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남편인데’라는 생각을 했어요.”
▼ 남편은 지금도 음악에 미련이 있나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식구들 모두 자는 밤에 혼자 헤드셋 끼고 기타 연주를 하곤 했는데 요즘에는 안 하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 남편과 다투는 일은 없는지, 트러블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아이들 키우며 살다 보면 의견 대립이 없을 수 없어요. 그런데 결혼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그 순간을 지혜롭게 넘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더라고요. 일단 어떤 문제로 다툼이 생기면 그 문제만 가지고 이야기하지, 다른 일에까지 확대시키지 않는 거죠. 다툴 때 제가 이길 확률은 반 정도 돼요. 남편은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고 불평할 때가 많지만 저는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 한동안 방송활동을 중단하고 청계산 근처에서 전원생활을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결혼하고 서울 여의도에 살았는데 큰아이가 아장아장 걸을 무렵 놀 곳이 마땅치 않아 주차장에서 놀게 되더라고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남편과 상의 끝에 청계산 자락에 주말농장을 지어놓고 자주 그곳에서 지냈어요. 그러던 중 둘째 낳고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그곳에 갔다가 너무 좋아서 그냥 눌러 살게 됐어요.”
▼ 그 무렵 에이즈 소문으로 고생을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그때가 마침 미국 유명배우 록 허드슨이 에이즈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에이즈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았을 때인데 한 잡지에 이니셜로 한 가수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기사가 났어요. 처음엔 저도 그 가수가 누군지 몰랐는데 어느 날 저라는 소문이 파다하더라고요. TV 틀면 매일 나오다시피 하던 가수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던 탓에 그런 소문이 돌았던 것 같은데 당시 주변 권유에 못 이겨 해명 인터뷰를 하기도 했지만 사실이 아니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 주부로서 자신을 평가한다면 어떤가요.
“현모양처라고 하면 남편, 아이들이 화낼테니까 그렇게 말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한 집의 안주인으로서 꼭 해야 할 일들은 빼놓지 않고 하는 편이에요. 철이 바뀔 때마다 옷장 정리하고,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직접 만들려고 노력하죠.”
“노래는 제게 부와 명예, 사랑을 주었지만 그로 인해 늘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 살았어요”
주현미는 데뷔 초 약사 출신 가수로 화제를 모았다. “여자도 직업이 있어야 한다”는 친정어머니의 뜻에 따라 약대에 진학, 졸업 후 한때 약국을 운영하기도 했던 것. 때문에 가수로 나설 때 친정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데뷔 20여 년이 지날 때까지 안정된 약사의 길을 마다하고 험난한 가수의 길을 선택한 딸을 못마땅해하던 그의 어머니는 몇 년 전부터 “우리 딸이 노래 하나는 잘한다”며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 ‘약사 생활을 계속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없나요.
“우리나라에서 약국 운영해서 망한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거예요. 그래서 그다지 미련은 없어요(웃음). 저는 사실 대학 졸업 후 제약회사 연구부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며 어머니가 반강제로 약국을 차리게 했는데 사업 경험 한 번 없고 내성적인 제가 어떻게 약국을 운영할 수 있었겠어요. 당시는 의약분업이 돼 있지 않을 때라 손님들 가운데는 무조건 항생제를 처방해서 달라거나, 증상과는 상관없는 약을 막무가내로 달라고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원리원칙대로 ‘이러시면 안 된다’‘약은 되도록이면 안 드시는 게 좋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동네에서‘깐깐한 약사’라고 소문 나 손님이 점점 줄더라고요.”
▼ 어머니 반대는 어떻게 극복했나요.
“극복이 잘 안되더라고요(웃음). 제가 가수활동을 시작한 뒤 드레스 입고 밤업소에 노래를 부르러 나갈 때마다 어머니가 절 붙들고 실신할 정도로 울곤 하셨어요. 그 이후로도 별말씀은 없었지만 못마땅해하신 것 같고요. 그런데 4년 전 디너쇼에서 제가 공연하는 걸 보고는 ‘잘하긴 잘한다’며 좋아하시더라고요.”
▼ 친정어머니기 자신에게 그랬듯 자녀교육에 열성적인 편인가요.
“어떻게 보면 무책임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에요. 큰아이가 학교 임원이 됐을 때도 학교에 찾아가보지 않았을 정도니까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일주일에 얼마씩 용돈을 준 적이 있는데 한번은 몇 주가 지나도록 용돈을 받으러 오지 않더라고요. 그러고는 한참 후 ‘엄마, 왜 용돈을 안 주느냐’며 원망하기에 ‘자기 건 자기가 챙겨야지, 누가 대신 챙겨주지 않는다’고 따끔하게 야단을 쳤어요. 그런 교육 덕분인지 아이들이 자기에게 맞는 선생님 찾아 학원 등록도 하고, 자기가 꼭 해야 할 일은 스스로 챙겨서 하는 편이에요.”
▼ 자신이 공부를 잘했던 것만큼 자녀들에 대한 기대도 클 것 같은데요.
“아들, 딸 모두 학교 성적은 딱 중간 정도 하는데 전 그것으로 만족해요. 한때 욕심을 부린 적도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공부하라’고 노래 부르다시피 하다가 한번은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내가 왜 아이에게 야단치고 인상을 찌푸려야 하나’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우리 아들이 어느 대학 들어갔다’고 자랑하고 싶은 부모 욕심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생각 하지 말자,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쪽으로 마음을 바꿔 먹었어요.”
▼ 당신에게 노래란 무엇인가요.
“노래는 제게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까지 모든 것을 다 주었죠. 그렇게 노래가 제게 준 건 아주 많지만 노래 때문에 치러야 했던 대가도 혹독했어요. 지금도 공연을 앞두고는 며칠씩 잠을 못 잘 정도죠. 그런 걸 잘 아는 가족들은 제가 무대에 설 때마다 ‘떨려서 못 보겠다’고 다들 도망가요(웃음).”
▼ 앞으로 살면서 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진심, 순정…. 좀 촌스러운가요(웃음). 내 의지로 선택한 사람, 그리고 사랑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을 평생 간직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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