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무거운 옷은 협찬받지 말란 말이야, 내가 무슨 역도 선수도 아닌데.” SBS 주말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 촬영이 한창인 SBS 탄현제작센터 G 스튜디오. 탤런트 조인성(23)이 검정색 외투를 벗어던지며 제작진을 향해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린다. 촬영장 분위기는 일순간 풀어지고 조인성은 웃는 얼굴로 땀을 닦았다.
촬영에 임박해서야 대본이 완성되는 빡빡한 상황. 그러나 촬영장 분위기는 의외로 화기애애했다. 제작진 사이에서 몇 번이나 웃음의 물결이 지나갔다. 여기에는 제벌2세 ‘재민’을 연기하는 조인성의 역할이 크다. 그는 약혼녀 ‘영주’ 역의 박예진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나도 우리 애기 집에서 밥 좀 얻어먹고 싶어요∼” 하며 능청스럽게 달라붙는 어머니 역의 김수미와도 장난을 치며 일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발리에서 생긴 일’이 시청률 30%대를 넘기고, 드라마가 전개될수록 시청자들의 반응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발리에서 생긴 일’은 가난 때문에 평생 힘겹게 살아온 수정(하지원)과 인욱(소지섭), 항상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익숙한 재민과 영주라는 네 남녀의 미묘한 관계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 관계는 단순하지도 진부하지도 않다. 빈자는 선하고 부자는 이기적이라는 흑백논리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재벌 2세 재민은 새로운 유형의 부잣집 아들을 보여주고 있어 신선하다는 평이다. 그동안 재벌 2세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뭐든지 다 해주는 ‘백마 탄 왕자’ 이거나, 어려운 사람들의 작은 행복마저도 빼앗기 위해 온갖 수를 쓰는 이기주의자였다.
그런데 재민은 다르다. 연출을 맡은 최문석 PD는 재민을 ‘사이코’로 표현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 감정 표현이 너무나 서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극중 재민은 수정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친절한 말 한 마디, 따뜻한 미소 한번 건네지 않는다. 자기 어머니에게 뺨을 맞고 나서 눈물을 흘리는 수정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다. 수정을 보내고 나서야 혼잣말로 “오늘은 정말 미안했는데…” 하고 중얼거릴 뿐이다. 뒤늦게 수정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내 곁에 있어줘” 하고 말하지만 이때도 고백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말투다. 표정은 차갑지만 눈빛에서는 고민이 감지된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하고 속에서부터 동요하는 듯 말이다.
많은 여성 시청자들이 재민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단지 186cm라는 키와 귀티 나는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재민이 내비치는 내면의 동요가 여성들의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것이다.
복잡한 성격의 재민은 매력적인 캐릭터, 재민이가 된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날 때도 있어
촬영이 끝난 뒤 분장실에서 만난 조인성은 빠른 말투에 촬영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목소리와 표정에 생기가 넘쳤다. 하루 3시간밖에 못 자는 만만찮은 스케줄에 지쳐 있을 법도 하건만 조인성은 ‘싱싱’하기만 했다. 재민을 연기하는 것이 그만큼 재미있다고 한다.
“작가 선생님께서 ‘재민에게는 기본적으로 사랑 연민 질투 등 세 가지 이상의 감정이 복합됐다’고 말씀하셨어요. 배우로서 탐나는 역할이긴 한데 그만큼 고민이 많아요. 간혹 재민이 된 꿈을 꾸다 벌떡 일어날 때도 있는데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어요(웃음).”
조인성은 지난해 영화 ‘남남북녀’가 흥행에 실패해 한 영화잡지가 뽑은 ‘최악의 배우’로 선정됐지만 ‘배우’로 불린 것만으로도 기뻤다고 한다.
“착하고, 건방지고, 귀엽고, 불쌍하고, 섹시하고, 싸가지 없고…” 그는 복잡한 성격의 재민을 설명하는 데 여러가지 수식어를 동원했다. 그런데 그중 핵심은 ‘불쌍함’이라고 한다.
“재민이는 ‘발리에서 생긴 일’에 나오는 모든 인물 중 가장 슬픈 인물이에요. 사랑이 뭔지 모르죠. 만약 재민이 같은 사람이 제 앞에 있다면 말 없이 껴안아줄 것 같아요. 너무 불쌍해서….”
그는 그러면서도 ‘재민을 아직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대신 매회 대본이 나올 때마다 재민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재미가 시청자들만큼이나 쏠쏠하다고 한다.
본심과 말이 늘 따로 움직이는 재민을 연기하기가 만만찮지만 부잣집 아들이라는 설정 때문에 편한 점도 있다고 한다. 말끔한 외모와 달리 조인성은 그동안 SBS ‘피아노’ ‘별을 쏘다’ 등에서 가난한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
실제 조인성의 집안 형편 역시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는 배재고 재학시절 태권도 선수였으나 허리 부상을 당한 뒤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연기 학원비 2백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내야 했지만 곧바로 의류광고 모델로 데뷔하는 행운을 얻어 빚은 금세 갚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전도연과 함께 주연한 SBS ‘별을 쏘다’를 통해 스타가 됐다. 같은해 출연했던 코미디 영화 ‘남남북녀’는 비록 흥행에서 참패했지만 그때 익힌 유연한 연기가 ‘발리에서 생긴 일’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재벌 2세 역할의 좋은 점요? 좀 무식한 말일지도 모르겠는데요(웃음) 차도 있고, 으리으리한 집도 있어서 좋아요. 야외촬영을 할 때도 차 안에 있으니 따뜻하고요. ‘피아노’도 겨울에 찍었는데, 계속 밖에서 뛰어다니느라 추워 죽는 줄 알았어요(웃음).”
‘발리에서 생긴 일’의 방영 횟수가 늘어날수록 결말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일찌감치 비극으로 끝을 맺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퍼졌다. 내용도 자못 충격적이다. 재민이 연적인 인욱과 수정을 죽인 뒤 자신도 권총으로 자살한다는 것. 드라마가 인기를 모으면서 열성팬들 사이엔 수정과 인욱을 청부살해하려던 재민의 계획이 실패하자 재민만 자살한다는 또 다른 결말이 얘기되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들을 살려달라는 시청자들의 ‘구명운동’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저도 어떻게 끝날지 아직 모르겠어요. 단지 분명한 것은 제가 발리에서 자살 장면을 찍고 왔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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