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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진에 중독되다

EDITOR 김명희 기자

입력 2018.06.14 15:30:42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배우 유해진의 연기 인생은 어쩐지 나태주 시인의 ‘풀꽃’과 닮았다.
유해진에 중독되다
처음 스크린에서 유해진(48)을 봤을 때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주유소 습격사건’(1999)의 양아치 역이었다. 저 얼굴로 배우를 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험상궂은 얼굴에 새로운 모습들이 덧입혀졌다. 영화 ‘왕의 남자’의 어딘지 억울해 보이는 광대 육갑, ‘타짜’의 서민형 도박꾼 고경렬, ‘전우치’의 암캐 초랭이 등은 왠지 모르게 정감 가는 캐릭터로 그에게 ‘명품 조연’이란 수식어를 안겼다. 20대가 단역으로 기본기를 다지고, 30대가 신 스틸러로 도약한 시기라면 40대의 유해진은 주연으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는 모습이다. 흥행 성적만 놓고 보면 평균 이상이다. ‘택시운전사’가 1천만 관객을 넘어섰고 ‘공조’와 ‘1987’ ‘럭키’도 각각 7백81만, 7백23만, 7백만 관객을 기록했다. 

오랜 동료 차승원과 호흡을 맞춘 tvN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 어촌 편’은 유해진의 매력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출연자들 속에서 튀지 않으면서도 제 할 일 다 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하루도 운동을 거르지 않을 만큼 부지런한 모습은 그를 단지 연기 잘하는 배우에서 훌륭한 품성과 근성을 지닌 배우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가 최근 영화 ‘레슬러’(5월 9일 개봉)로 다시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레슬러’는 프로레슬러 출신의 아버지와 촉망받는 레슬링 유망주인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따뜻하고 유쾌한 가족 영화다. 유해진이 연기하는 귀보는 일찍이 아내를 떠나보낸 후 아들 성웅(김민재)만 바라보고 사는 인물이다. 사이좋던 부자는 성웅이 좋아하던 소꿉친구 가영(이성경)이 귀보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한다. 

레슬러 출신의 에어로빅 강사이자 프로살림꾼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소꿉친구에게 사랑 고백을 받는 이웃집 아재라는 설정을 유해진만큼 코믹하면서도 친근하게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석에선 ‘큭큭’ 웃음이 터졌다.


유해진에 중독되다
체육관에서 주부들에게 에어로빅을 가르치는 장면에서 빵 터졌어요. 

‘트레이닝복을 입은 귀보가 코치를 해주고 있다’는 시나리오의 지문에서 착안한 애드리브였어요. (귀보가)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저렇게까지 힘들게 일하는구나, 라고 관객이 생각할 수 있는 장면이 하나쯤 있었으면 싶었거든요. 에어로빅을 하다가 중간에 안에 들어가서 잠시 쉬다 나오는 것도 제 아이디어였어요. 그런데 에어로빅 장면은 진짜 힘들더라고요(웃음). 

레슬링복을 입은 장면에서 굴욕 없는 몸매가 인상적이었어요. 

아유, 저는 그냥 인간적인 몸이죠. 진짜 몸이 좋은 사람은 아들 성웅 역을 맡은 (김)민재예요. 매일 운동하고 영화를 위해 짧게나마 레슬링 연습을 해보니 힘들더라고요. 민재를 보면서 역시 ‘젊음’은 좋은 거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극 중 빨래를 툭툭 털어서 넌다든가, 청소를 하는 모습이 연기 같지 않았어요. 

영화 홍보사에서 귀보를 ‘프로살림러’라고 표현했던데, 어떻게 그런 기막힌 표현을 생각해냈나 몰라요. 그런 근사한 표현은 좀 낯간지럽지만 저 역시 혼자 오래 살았기 때문에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건 그냥 생활의 일부죠. 오늘 아침에도 밥을 해 먹고 한 주먹 정도 남아서 냉동실에 얼려놓고 나왔어요. 

집이 이 근처(서울 삼청동)인 걸로 알고 있어요. 촬영이 없는 날은 뭘 하고 지내세요. 

저야 뭐 집 아니면 도서관이죠. (정말요?) 하하. 그걸 진짜 믿으시네. 농담이고요. 시간이 좀 길게 나면 여행을 가고, 아니면 등산도 다니고, 자전거 타고 이 근처에 나와 차도 마시고, 운동도 하고 그래요. 

장성한 아들을 둔 아버지를 연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나이 드는 걸 조금씩 느끼고 있어요. 20대 초반에 결혼해야 가능하겠거니 했는데, 20대 후반에 결혼했어도 민재 또래 아들이 있겠더라고요. 보시는 분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어색하거나 좀 그랬다면 ‘(김)민재가 몇 살인데 그게 말이 돼?’라고 하셨을 텐데 그런 말이 하나도 없어요(웃음). 다만 귀보 연기를 하면서 자식 키우는 게 역시 쉽지는 않겠다는 걸 느꼈어요. 귀보가 엄마(나문희)에게 ‘자식 키우기 참 힘들어’ 이러니까 엄마는 ‘넌 20년 키웠지만 난 40년 키웠다’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인생이 다 그렇지 않나 싶어요. 

비록 연기지만 아버지 입장이 돼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부분이 있던가요. 

‘삼시세끼’를 찍을 때는 그냥 예능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주부들이 이래서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는 부모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되더라고요.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보면 저러면 안 되는데, 부모가 속상하겠다 싶고. 그러면서 저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예전에 무심코 했던 말이나 행동이 부모님께 상처가 될 수도 있었겠구나 싶은 생각에 후회가 일기도 해요. 

유해진 씨는 부모님께 어떤 아들이었나요. 

고등학교 때 연기를 시작하면서 부모님과 마찰이 많았어요. 부모님으로서는 자식이 어려운 길을 택했으니 잔소리를 하는 게 당연한 거였을 텐데, 그때는 반항심에 부모님 가슴에 못 박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아들이 잘되는 걸 보셨으면 괜찮았을 텐데 어머니는 너무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지금 건강이 안 좋으셔서 더 후회돼요. 귀보가 아들 성웅을 사랑하는 마음을 연기하면서, 우리 부모님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을 텐데, 나도 이런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싶은 생각이 들어서 울컥했어요. 예전에 자식이 속을 썩이면 부모님들이 ‘너도 애 낳아봐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 이해가 되더라고요. 

최근 출연작들의 흥행 성적이 좋아요.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데. 

하하하. 그런 말들이 감사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데, 그만큼 책임감도 커요. 슬슬 믿음이 없어질까 봐 걱정도 되고요. 단역이든, 조연이든, 주연이든 배우는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검증을 받는 직업이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늦을 수 없어요. 

유해진 씨가 갖고 있는 책임감의 상당 부분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일 듯해요. 

매번 새로울 수는 없겠지만 어떡하면 조금 더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어떡하면 작품에 더 녹아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죠. 참 익숙해지지 않는 숙제예요. 다른 배우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저 자신을 뛰어넘는 연기를 할 수 없을 거 같아요. 그걸 알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거죠. 

배우들은 촬영 현장이 회사고 일터잖아요. 회사에 나가기 싫을 때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배우 생활을 하면서 힘들 때가 있어요. 연기가 안 풀리고 상대 배우와 합이 잘 안 맞을 때는 왜 이렇게 꼬일까 생각해요. 그렇지 않고 반대로 뭐가 잘 풀려가는 느낌이 들면 현장만큼 재미있는 곳도 없죠. 촬영장에서 되게 행복한 날이 있어요. 삼박자가 맞는다고 하죠. 날씨도 좋고, 걱정했던 신도 잘 넘어가고 그런 날은 기분 좋게 동료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현장에 있을 때 최고라고요. 

배우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사실 저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배우를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 사랑받을 줄은 몰랐어요. 감사할 따름이죠. 이 자리나 위치를 지킨다기보다는 그냥 배우로서 극장을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연기하려 합니다. 지금의 제 위치야 뭐 처음부터 이랬던 것도 아니고(웃음).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덜 미안하고 싶고, 극장 찾는 사람들에게 덜 미안하고 싶어요.


디자인 최정미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여성동아 2018년 6월 6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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