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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거장을 보내며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뉴욕 ‘퍼포먼스 장례식’ 현장 & 부인 구보타 인터뷰

기획·이남희 기자 / 글·공종식‘동아일보 뉴욕특파원’ / 사진ㆍ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6. 03. 08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지난 1월29일 향년 74세로 생을 마감했다. 2월3일 미국 뉴욕에서 마련된 백씨의 ‘퍼포먼스 장례식’ 현장과 부인 구보타씨를 비롯해 고인을 추억하는 측근들의 생생한 회고담을 취재했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뉴욕 ‘퍼포먼스 장례식’ 현장 & 부인 구보타 인터뷰

2월3일 미국 뉴욕 맨해튼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에 안치된 백남준씨의 시신.


지난 2월3일(현지시간) 오후 뉴욕 맨해튼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 이곳은 평소 뉴욕 유명 인사들의 장례식이 자주 열리는 곳이다. 이에 따라 항상 엄숙한 분위기가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다.그러나 이날만큼은 달랐다. 생전에도 기존의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파격으로 화제를 모았던 백남준씨의 장례식이 열렸기 때문이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백씨는 1월29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자택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74세다.
장례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사회를 맡은 백씨의 조카이자 매니저인 겐 백 하쿠다씨가 “고인은 평범한 장례식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자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고인은 과거 넥타이 자르기 퍼포먼스로 유명했지요. 자, 여러분께 가위를 나눠드리겠습니다. 이제 과거 넥타이 퍼포먼스를 기념해 바로 옆에 앉은 사람들의 넥타이를 잘라주세요. 혹시 3백 달러가 넘는 비싼 넥타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잘라주세요. 비용은 아마 고인이 보상해줄 겁니다.”
하쿠다씨가 ‘보상’이야기를 꺼내자 폭소가 이어졌다.
그러자 존 레넌의 부인 오노 요코씨가 하쿠다씨의 넥타이를 자르는 것을 시작으로 조문객들은 준비해놓은 가위로 옆에 앉은 사람들의 넥타이를 잘랐다. 오노 요코씨는 자른 넥타이를 고인의 시신 위에 올려놓으면서 명복을 빌었다.
금세 백씨의 시신 위에는 잘린 넥타이들이 수북이 쌓였다. 고인을 위한 마지막 퍼포먼스인 셈이다.
백씨가 1960년 독일에서 공연 도중 그의 정신적 스승이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면서 유명해진 이 퍼포먼스는 기존 관념과 형식의 파괴를 상징한다.
이날 장례식은 이처럼 파격의 연속이었다. 98년 백악관에서 있었던 백씨의 ‘하체 노출사건’이 ‘준비된 퍼포먼스’라는 사실이 공개되기도 했다.
하쿠다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이 주최한 백악관 만찬에서 고인을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는 조전을 보내왔다”고 소개하며 “고백할 것이 있다”고 말을 꺼냈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뉴욕 ‘퍼포먼스 장례식’ 현장 & 부인 구보타 인터뷰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씨의 생전 모습.


“삼촌과 백악관에 갔어요. 그런데 휠체어에 타고 있던 삼촌이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일어서는 순간 외치는 소리가 들렸죠. ‘겐, 내 바지가 내려갔어. 어, 그런데 내가 속옷을 입지 않고 있었네!’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힐러리 상원의원 옆에 앉아 있던 클린턴 대통령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지요. 일부 기자들은 기자회견을 요청했습니다. 정치적인 의사표현인지, 예술적인 표현인지를 묻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지금 밝히지만 그 사건은 삼촌이 고의로 한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다음 날 전 세계에서 축하전화가 쏟아졌지요.”
조문객들은 이에 앞서 추모사에서 고인과의 인연에 대해 회고했다.
오노 요코씨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백남준, 당신이 존재한 것이 고맙다(Thank you, Paik Nam June, for being you)”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 내가 살던 도쿄의 작은 집에서 처음 고인을 만났는데, 마치 우리는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금방 친해졌다”고 회상했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뉴욕 ‘퍼포먼스 장례식’ 현장 & 부인 구보타 인터뷰

백남준씨의 장례식에 참가한 존 레넌의 부인 오노 요코씨.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뉴욕 ‘퍼포먼스 장례식’ 현장 & 부인 구보타 인터뷰

백남준씨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씨는 백씨와 마지막까지 함께 한 인물이다.



미국 비디오 아티스트의 스타인 빌 비올라씨는 “고인은 비디오 아트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예술가이자 후배들을 항상 격려해주는 분이었다”며 “평소에 나에게 ‘당신이 최고의 비디오아티스트’라고 말했는데, 알고 보니 사람들에게 모두 똑같은 말을 했더라”고 말해 장례식장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독일 브레멘미술관의 불프 헤르첸라트 관장은 “고인은 항상 짧은 단어로 된 영어를 썼는데, ‘오른쪽 눈으로 왼쪽 눈을 봐(Look at your left eye with your right eye)’ 등 다른 사람은 흉내낼 수 없는 영어를 많이 했다”고 말해 조문객들은 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백씨와 마지막까지 함께 한 사람은 부인인 구보타 시게코씨(久保田成子)였다. 두 사람은 동료 전위예술가로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적 차이를 뛰어넘어 77년 결혼했다. 구보타씨는 63년 백씨를 일본 도쿄에서 처음 만났고, 당시 남편을 다룬 기사를 보면서 그와 반드시 결혼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구보타씨는 “나는 마라톤을 잘한다. 쫓고 쫓아서 결국 남편을 차지했다”며 백씨와의 인연을 회상했다. 그는 “남편은 항상 ‘선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을 감안하면 내가 오래 살았지만 그래도 2012년까지는 살아야 하는데…’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2012년은 존 케이지 탄생 1백주년이 되는 해. 존 케이지는 고인의 예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곡가로 무명일 때 만나 동지적 유대관계를 맺어온 인물이다. 백씨는 존 케이지를 추모하는 퍼포먼스를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해왔다는 것.

‘대장금’을 즐겨 보며 평화로운 투병생활을 했던 백남준
구보타씨는 남편이 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10년 간 투병생활을 하면서 ‘아픈 상황’에 대해 지겨워했지만 불평은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참 강하고 야심이 큰 분이었어요. 투병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어했던 것도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마음대로 작품활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남편은 사람이 좋고 정이 많아 다른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때로는 힘들고 재정적으로 손해도 많이 입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백씨는 추천서 요청도 절대 거절하는 법이 없어 실제로 ‘백남준 추천서’를 들고 한국에 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백씨의 말년은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평화로웠다고 한다. 그는 특히 타계하기 전까지 드라마 ‘대장금’을 즐겨 봤다고 구보타씨는 전했다. “TV에서 ‘대장금’이 방송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봤어요. 보면서 ‘여주인공(이영애)이 참 연기를 잘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구보타씨는 고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아침과 점심, 저녁 모두 맛있게 먹고 잠을 잘 시간이 돼 갑자기 숨이 거칠어져서 응급전화를 걸었는데 구급차가 도착할 때는 이미 숨이 멈춰 있었다”고 전했다.
“남편은 강하기 때문에 결코 좌절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영혼이 여기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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