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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특급 박찬호 19년 야구 인생 희로애락

글·권이지 기자 | 사진·이기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연합뉴스 제공

입력 2013.01.16 09:19:00

1990년대 말 외환위기로 신음하던 시절, 한국인들에게 야구로 희망을 안겼던 박찬호.
동양인 메이저리거 최다승인 1백24승을 달성한 뒤 일본을 거쳐 한국에 돌아왔던 그가 은퇴를 선언했다.
웃음으로 시작해 눈물로 끝맺은 은퇴식 현장과 파란만장 야구사.
코리안 특급 박찬호 19년 야구 인생 희로애락


야구 선수 박찬호(40)가 2012년 11월 30일 기자회견을 열어 전격 은퇴를 발표했다. 자신의 결혼기념일, 그것도 야구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홀(서울 플라자호텔)에서였다. 박찬호는 그의 이름과 그를 상징하는 등번호 61이 새겨진 유니폼 13장을 기자회견 테이블에 전시한 뒤, 이를 보며 하나씩 회상하며 웃음 짓다 눈시울을 붉히는 등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코리안 특급은 19년간 이어온 야구 선수로서의 삶과 이별했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에 야구를 시작해 공주중, 공주고를 졸업하고 당시 140km에 달하는 빠른 공을 던져 투수 유망주로 각광받았던 박찬호. 한양대에 입학한 뒤 1994년 그는 LA 다저스의 눈에 들어 메이저리그로 직행했다. 계약금은 무려 1백20만 달러(한화 약 13억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너리그로 강등돼 인고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는 1996년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두며 주목받았다.
LA 다저스의 푸른 유니폼을 입고 화려하게 꽃핀 박찬호의 전성기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맞닿아 있다. 1997년 선발 고정 등판을 시작해 2000년 최고의 시즌을 보낼 때까지 박찬호는 시름에 빠진 한국인들의 희망이자 자부심이었다. 그가 등판하는 날이면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새벽잠을 설쳐가며 응원했다. 이후 그는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한 뒤 필라델피아 필리스, 뉴욕 양키스 등을 거치며 17년간 메이저리거로 활약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오릭스 버팔로스, 한국의 한화 이글스의 유니폼을 입으며 한·미·일 3개국의 마운드를 지켰다. 그는 메이저리그 4백76경기에 등판해 1백24승 98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4.36을 기록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총 23경기 5승 10패 평균자책점 5.06의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기자회견에서 박찬호는 전날 은퇴를 발표한 뒤 야구계 선후배들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웃었다. 아내 박리혜(38) 씨와 결혼기념일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 메시지가 와 식사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은퇴식 당일 부인 박씨는 개인 일정이 있어 참석하지 않았다. 박씨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3세 요리연구가로, 아버지 박충서 씨는 일본 부동산계의 큰손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2005년 11월 30일(현지 시간 11월 29일) 미국 하와이 빅아일랜드의 포시즌호텔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애린(7), 세린(5) 자매가 있다. 그는 자신을 지켜봐준 팬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한국 야구 역사상 자신만큼 운이 좋은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며 입을 열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멋모르고 야구를 시작했는데 참 재미있었어요. 친구나 선배보다 잘해보겠다는 경쟁심에서 출발했고, 그러다 보니 우승도 하고 대회 나가서 상도 받았죠. 이 감격을 더 느끼기 위해 야구를 계속하다 보니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꿈도 가지게 됐습니다. 시골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게 됐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영예도 얻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 느꼈죠.”

숫자로 읽는 박찬호 야구 인생

코리안 특급 박찬호 19년 야구 인생 희로애락
1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1승은 1996년 4월 7일 달성됐다. 시카고 컵스와의 원정 경기를 치르고 있던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라몬 마르티네스. 그러나 그는 2회 초 타격 후 1루로 뛰다 갑작스럽게 부상을 당해 2회 말부터는 박찬호가 구원 등판했다. 그는 당시 강타자로 이름 날렸던 새미 소사를 삼진 처리하며 2회 말을 무사히 막아내는 등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박찬호는 4이닝 동안 안타 3개와 볼넷 4개를 허용했으나 삼진을 무려 7개나 잡아내며 팀의 3대 1 승리를 견인, 대한민국 야구 선수 최초로 메이저리그 첫 승리를 기록했다.

61 메이저리그 데뷔 이후부터 그를 상징하는 등번호.
고등학교에 이어 대학교 때까지 그의 등번호는 16번이었다. 다저스에 입단해 그대로 16번을 쓰고자 했으나, 이미 쓰고 있는 선수가 있어 이를 뒤집은 61번으로 정했다. 그리고 이는 박찬호를 상징하는 숫자가 됐다. 일부 야구인들은 그의 번호를 한국 프로야구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124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챙긴 기념비적인 승수. 2010년 8월 4일 메이저리그에서의 마지막 팀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이적한 박찬호. 그는 같은 해 9월 13일 2005년 노모 히데오가 수립한 아시아 투수 역대 최다승인 1백23승과 타이를 이뤘고, 10월 2일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해 3이닝 6삼진 호투와 함께 승리 투수가 되며 역대 메이저리그 아시아 투수 최다승(124) 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박찬호만큼 메이저리그에서 꾸준히 활약한 아시아계 선수가 없어 이 기록이 깨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듯.



65,000,000 2002년 박찬호는 다저스에서 뛰던 중 6년에 걸친 풀타임 선발 기간 동안 5년 연속 13승 이상을 거둔 성적과 29세라는 선수 생활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연령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5년 계약, 총연봉 6천5백만 달러(한화 약 7백억원)의 조건으로 텍사스 레인저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텍사스에서의 3년은 박찬호 개인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 박찬호가 은퇴식에서 텍사스 유니폼을 보고 스스로가 “먹튀였다”고 회고했을 만큼 연봉 규모에 비해 평균 이하의 성적을 냈던 암흑기다. 새로운 홈구장에 대한 적응 실패와 햄스트링 및 허리 부상 등으로 2003년에는 7차례, 2004년에는 16차례밖에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5·10·23 박찬호가 1년간 한국에서 세운 기록. 2012년 4월 12일 충북 청주 두산전에서 선발 등판한 박찬호는 3회 초 두산 공격 시 단 3개의 공으로 3명의 타자를 아웃시키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6과 1/3이닝 5탈삼진 2실점으로 팀의 8대 2 승리를 이끌며 화려한 한국 데뷔 첫 승을 기록했으나, 약체 한화 이글스의 부진으로 인해 고국 무대에서 총 23경기에 등판, 5승 10패를 거두고 시즌을 마무리했다.

2,400 한국 프로야구 무대에서 뛰기를 원하던 박찬호는 2011년 12월 고향 팀 한화 이글스와 계약을 맺었다. 초미의 관심사는 연봉. 하지만 그는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며 구단 측에 연봉 백지 위임 의사를 밝혔다. 한화 이글스와 박찬호는 프로야구 선수 최소 연봉인 2천4백만 원에 계약했다. 계약금 4억, 옵션 2억을 포함한 총 6억원과 연봉 전액은 한화 이글스와 박찬호의 이름으로 아마추어 야구 발전 기금으로 기부됐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 19년 야구 인생 희로애락

1 미국 메이저리그 직행이 확정된 박찬호(왼쪽 두 번째)가 1994년 입단 기자회견에서 클레어(왼쪽) 당시 다저스 부사장, 동료선수가 된 드라이포트(오른쪽 두 번째), 토니 라소다(오른쪽) 다저스 감독과 손을 한데 모은 뒤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2 90년대 후반 전성기 때 박찬호는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직구 구속과 탁월한 위기 관리 능력을 자랑했다. 3 뉴욕 양키즈에서 활약한 2010년. 재기에 성공할 것으로 예측했으나 부진이 길어져 같은 해 메이저리그 생활을 청산하게 됐다.



은퇴 후엔 야구 행정가 도전할 계획

코리안 특급 박찬호 19년 야구 인생 희로애락


미국, 일본을 거치며 박찬호의 소원은 한 달이든 일 년이든 한국 무대에서 선수로 뛰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의 소원은 이뤄졌다. KBO와 프로 구단들의 협의를 통해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2012년 시즌을 뛸 수 있었다. 그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던 연봉도 구단에 백지위임해 옵션 포함 계약금 6억원과 프로야구 선수 최소 연봉 2천4백만원을 아마 야구 발전 기금으로 쾌척했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약속한 시간은 1년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한국 야구를 경험한 박찬호는 큰 아쉬움을 남긴 채 오렌지색 유니폼을 벗게 됐다.
“여러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1년 동안 홀로 적응하는 데도 바빠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팀이라는 것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구성되는 것인데, 제가 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고, 성적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시즌 끝나고 단장님과 동료들이 ‘내년에도 함께 뛸 거라 믿고 있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1년간 뛰겠다는 나름의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은퇴 이유에 대해 “한국 야구에 도움 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향후 계획 역시 야구 발전을 위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자신을 있게 해준 많은 이들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뜻에서였다.
“오랫동안 야구를 했고, 특히 야구 기술 부분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배워오고 경험했던 부분들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한국 야구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프로그램을 더 공부해 유소년 야구 캠프나 대회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그는 앞으로 미국에서 자신이 메이저리그에서 배운 것들, 특히 한국 야구와 접목시키면 좋은 것들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계획이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산업 야구’로, 이러한 개념을 한국에도 적용시키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은퇴 발표 전 박찬호는 신생 팀 NC 다이노스 코치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딱히 어느 팀에 소속돼 일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기회가 된다면 차후 한화 이글스에서 일하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박찬호는 아직까지 세부 계획은 확정된 것이 없다면서 당장은 두 딸 애린, 세린의 학교 문제 때문에 미국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박리혜 씨가 두 자녀를 미국에서 공부시킬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연말은 미국에서 보낸다는 것만 분명히 밝혔다.

“내게 수고했다, 장하다 말해주고 싶어”
19년간 쉴 틈 없이 달려온 박찬호는 “수고했다, 장하다”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래전부터 아침이나 자기 전에 거울을 보며 거울 속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어요.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던 것 같아요. 끊임없는 도전을 하고, 지금까지 목표하고 계획했던 것도 많았거든요. 제가 복이 많아서 좋은 분들이 주위에서 제 꿈을, 목표를 잡을 수 있게 해주고 실현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박찬호는 야구를 학교에 비교했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야구 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자신이 책으로는 배우지 못할 현실을 야구를 통해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또한 야구를 통한 만남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해준 계기가 됐다고 여겼다. 야구를 통해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는 것도, 전성기와 슬럼프 그리고 대기록을 달성하면서 배우고 얻을 수 있던 게 많았다고.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시작하는 이형기 시인의 시 ‘낙화’처럼 박찬호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알고, 또 아름다운 모습으로 야구 선수의 삶과 이별했다. 그리고 새로운 봄이 찾아오면 꽃이 피듯 그의 제2의 인생도 아름답게 필 것이다. 이것이 선후배 야구인들이 그에게 아쉽다는 말보다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넨 이유이지 않을까.

인복 많은 박찬호의 사람,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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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오말리 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공동 구단주. 박찬호의 정신적 지주다. 1994년 LA 다저스 구단주로 있던 그는 야구 변방국이던 한국의 신인 투수 박찬호를 눈여겨보고 미국으로 데려온 사람이기도 하다. 2005년 박찬호와 박리혜 씨의 비공개 결혼식에도 참석했을 만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결혼식 당시 박찬호 부부는 가족과 친지를 포함, 30여 명만 초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적 부진으로 슬럼프에 빠진 박찬호는 2007년 마이너리그에서 1년을 보내고, 200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선발 투수로 시즌을 맞이해 재기를 꿈꿨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불펜 투수로 보직이 바뀌었고,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남모를 괴로움에 신음하던 그는 LA 원정 당시 아침 일찍 오말리의 집을 방문해 그에게 처음으로 ‘은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오말리는 박찬호에게 여유를 가지라고 조언하며 “그동안 쌓아온 경력이 있기 때문에 한 경기에서 부진했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테니 후회 없이 선수 생활을 한 다음 은퇴하라”고 했다. 2012 시즌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간 뒤에도 오말리와 수차례 만난 박찬호는 앞으로의 진로 역시 그와의 상담 후 야구 행정과 경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장성호 은퇴식에 유일하게 찾아온 프로야구 선수. 박찬호의 절친한 후배다. 은퇴식 직전 트레이드를 통해 롯데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게 된 그는 소식을 들은 뒤 부산에서 차를 몰고 은퇴식장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고. 행사장 뒤편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는 양준혁의 대기록을 깰 수 있는 유일한 선수로 평가받는데, 자신이 2012년 달성한 대기록인 개인 통산 2천 안타 기념 배트를 박찬호에게 선물했다.

이승엽 박찬호와 대표 팀 유니폼 외에 해외에서 유일하게 같은 팀 유니폼(오릭스 버팔로스)을 입은 선수. 은퇴식 당시 박찬호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선수로 메이저리그의 강타자였던 배리 본즈를 언급하면서 한국에는 이승엽이 있다며 그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강호동 KBS ‘1박2일’ 진행 당시 박찬호를 두 번이나 출연시킨 일등 공신. 그 덕에 많은 시청자들이 박찬호의 순박한 면모와 그간 털어놓지 않았던 개인적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강호동과 ‘1박2일’ 팀이 연예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자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등 끈끈한 우정을 과시한 바 있다.

안승민 박찬호가 한국 생활 중 가장 귀여워한 공주고 출신의 한화 이글스 후배 투수. 미국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당시 한 방에서 지낸 룸메이트였다. 박찬호가 수염을 기르는 걸 보고 따라 기르기도 하고, 나이 차 많은 선배라 불편할 법도 한데 장난도 곧잘 치는 등 편하게 대해준 덕에 박찬호가 팀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일등 공신이다.


박찬호 이제까지 얼마나 벌었나?

코리안 특급 박찬호 19년 야구 인생 희로애락
박찬호의 최소 연봉은 2012년 한화 이글스에서 받은 2천4백만원이며, 최고 연봉은 2006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받은 1천5백50만5천1백42달러다. 최고 연봉을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1백69억원.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받은 순수 연봉 수입만 8천7백75만 달러이며 광고 수입을 포함하면 약 1천억원이 넘는다.
그의 재테크는 부동산 투자가 대부분이다. 일본 부동산계의 큰손인 장인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는 대목.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지상 13층, 지하 4층 213.m² 규모의 ‘박찬호 빌딩’은 그 가치가 약 3백억원으로 추정된다. 부동산 임대업만으로도 매년 약 10억원을 벌어들인다고. 대전 서구 탄방동 땅에 완공 후 가치가 약 3백억 상당에 달한다고 밝혀진 빌딩(지상 15층, 지하 4층)을 건축 중에 있다. 이 땅은 2002년 당시 한국토지주택공사로부터 3.3m²당 4백50만원 대에 분양받았으며, 총 대지 면적은 1940m², 건축 전체 면적은 2만156m²에 달해 신사동 박찬호 빌딩보다 그 규모가 크다. 이 빌딩은 2013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여성동아 2013년 1월 5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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