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김영옥(72)은 삶의 질곡에 굴하지 않고 할 말 다 하며 사는 할머니의 모습을 주로 연기해왔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거친 듯 속정이 느껴지는 인물에는 삶의 애환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래선지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대사는 욕마저도 구수하고 정감 있다. 마치 어딘가에서 정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욕쟁이 할머니의 모습이랄까. 하지만 그의 실제 모습은 괄괄함보다는 여성스러움에 더 가깝다. 평생 욕이 뭔지도 모를 것 같은 조근한 말투와 곱게 화장한 얼굴에 번지는 잔잔한 미소만 봐도 그렇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리자, 여배우는 진분홍색 스카프를 착 휘감고 나서 꽃같이 웃었다.
드라마 속에서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김영옥. 요즘 그가 출연하는 MBC 드라마 ‘보석비빔밥’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그는 우악스럽고 거친 말투의 욕쟁이 할머니 결명자 역을 맡았다. 친구면서 사돈으로 엮인 백조(정혜선)와는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날선 신경전을 벌이는데,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입심대결이 극에 감칠맛을 더한다. ‘사랑과 야망’ 등 많은 작품에서 연기를 함께한 두 배우는 차진 호흡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바람 피워 아들까지 낳은 한량 끼 많은 아들(한진희) 문제로 사돈끼리 무술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방영돼 화제를 모았다.
“처음 대본을 받아봤을 땐 이게 뭔가 했어요. 근데 방송 나간 걸 보니까 한몫을 했더라고요. 물론 무술하는 시늉만 했지만, 그것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새벽까지 찍었어요. 동틀까봐 겁나면서 했으니까요. 흉이라면 흉이고 칭찬이라면 칭찬인데, 감독이 그렇게 끈질길 수가 없어요. 배려하는 척하면서 다 시켜먹어. 새벽에 집에 와서 씻으려고 보니까 머릿속까지 흙이 버석버석하더라고요.”
김영옥은 극중에서 시종일관 몸뻬 바지와 다 해진 러닝셔츠 바람으로 나온다. 최대한 꼬질꼬질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처음에는 연출자로부터 너무 심하지 않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한다.
“대본에 충실하려고 했어요. 남편이 입던 러닝셔츠에 일부러 때를 묻혀 입었어요. 바지는 의상팀에서 준비해줬는데, 자꾸 멋지게만 입히는 거예요. 이건 아니다 그랬죠. 참 까다롭게 군다고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화면에 비치는 사람은 저니까요. 예쁘게 나와야 할 때가 따로 있는 거죠. 배우는 맡은 역할에 충실했을 때가 가장 예뻐요. 물론 브라운관 밖에서는 예쁘게 보이고 싶죠.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여자이길 포기하지는 않았어요.”
그런 숨은 노력들이 빛을 본 걸까. 요즘 ‘보석비빔밥’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도 뜨겁다. 한번은 음식점에 갔는데, 거기 있던 손님들이 기립박수까지 치며 맞아줬다. 그는 지금까지 해왔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싶은데, 관심을 가져줘서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아직까지도 칭찬받는 것이 좋아요. ‘잘한다, 잘한다’ 소리에 희열을 느끼면서 건강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백배 노력하는 것 같아요.”
자식들 세심히 챙기지 못한 회한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결혼해 아내가 되고, 자녀 셋 둔 엄마가 되고, 이제는 손자를 거느린 할머니가 됐다. 그는 3년 동안 군대 간 ‘남자친구’가 아닌, ‘남편’을 기다렸다. 입대 한 달 전에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애틋한 신혼을 보냈다. KBS 라디오국 아나운서 출신인 남편 김영길씨는 비슷한 일에 종사했기 때문에 아내의 일을 더 잘 이해해줬다.
“도중에 그만두지 않고 퇴직할 때까지 묵묵히 일해준 남편에게 고맙죠. 여자가 밖에 나가서 일하면 남자는 나름대로 사업도 하고 싶잖아요. 물론 그러겠다는 걸 뜯어말리기도 했어요. 외향적인 성격 때문에 간혹 사람들이 오해하기도 하지만 아내인 제가 더 잘 알잖아요. 자식들을 끔찍이 여기는 가정적인 남편이에요. 이렇게 칭찬해주면 기고만장하는데…(웃음).”
/물론 젊었을 땐 사소한 걸로 극렬하게 싸우기도 했다. 지금은 싸울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붙여놓아도 안 싸운다며 장난스럽게 웃는 김영옥. 결혼 50년째인 베테랑 주부의 여유가 느껴진다. 연기자로서의 삶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식들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마음이 무겁다. 연기하느라 바빠서 세심하게 챙겨주지 못했기 때문에 엄마로서 늘 미안하다. 자식들 셋이 마흔 줄에 들어선 지금도 같은 마음이다.
“언젠가 한번 아들이 그래요.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그 집 엄마가 맨발로 뛰어나와 맞아주고, 밥상까지 차려 함께 식사했다고요. ‘우리 엄마가 언제 그런 적 있는지 한번 떠올려 봤다’는 거예요. 딸들이나 아들이 친구를 데려오면 저 나름대로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두 딸도 엄마가 늘 바빴던 게 싫어서 자기들은 집에서 아이들 키우겠다고 하더라고요. 시집가서 정말로 일을 안 했어요. 이제는 엄마처럼 일을 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저희들끼리 얘기하더라고요.”
젊었을 땐 모르다가 쉰 넘어서야 바쁜 가운데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이었구나 깨달았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을 거울 삼아 젊은 엄마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 물론 일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 아이들이 보배가 되고, 세상의 중심이 돼야 한다.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지금이라도 못다 한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 주말에 자식들이 찾아오면 한번이라도 더 안아주려고 노력한다.
여행하면서 삶의 여유 즐기고 싶어
브라운관에선 와락와락 소리 지르는 괴팍스러운 할머니로 살지만, 현실에선 화초 가꾸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는 한 여성으로 살아간다. 화초를 가꾸는 이유는 두 가지다. 키우는 재미도 있고, 햇볕도 쬘 수 있기 때문이다. 화초와 사람 모두가 광합성을 하는 것이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요즘 건강관리에 부쩍 신경을 쓴다. 과격한 운동은 못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스트레칭을 꼭 한다. 또 음악에 맞춰 살살 춤추기도 한다. 그는 “운동 삼아 한다”는 단서를 달아 민망함을 감춘다. 먹을거리도 주의한다. 육류는 가급적 삼가고, 야채 위주로 먹는데, 날 야채보다는 살짝 데쳐서 먹어야 소화가 더 잘된다. 특히 아침식사는 거르지 않고 꼭 챙겨먹는다. 주 식단은 커피 한 잔, 사과 두 쪽, 떡 한 쪽이다.
“요리는 자주 못하지만 가끔 해요. 남편이나 자식들한테 맛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칭찬을 굉장히 바라는 성격인가봐요(웃음). 맛있게 먹어주면 기분도 좋고요. ‘내가 했다! 내가 했다!’ 아직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는 자신을 ‘방안퉁수’라고 소개할 정도로 집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보석비빔밥’에서 견원지간처럼 나와서일까. 사람들이 정혜선과 성격이 잘 맞는지 묻곤 한다. 답은 전혀 아니다. 외향적인 정혜선은 자주 밖으로 나가는 반면, 그는 오로지 집이다. 최근 촬영 중간에 짬을 내서 여행을 다녀왔다는 정혜선의 말에 자극을 받았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훌쩍 기차 타고 혼자 여행을 떠나보자는 결심이 섰다.
“아침에 떠났다 저녁에 돌아오는 여행을 못해봤어요. (정)혜선이는 혼자 몸이지만 저는 남편이 있잖아요. 근데 생각의 차이인 것도 같아요. 남편이 제가 여행 가겠다고 하면 ‘가지 마!’ 그럴 사람도 아니거든요. 자고 온다고 해도 가라고 그럴 거예요. 스스로 조심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또 하나는 제가 운전을 못해요. 눈이 너무 나빠서 운전면허도 겨우 땄어요. 그러고 나서 5년 뒤 갱신하러 갔는데, ‘위험할 수 있으니까 운전 하지마세요!’라는 그 한마디에 포기했어요.”
반평생 넘게 연기자로 살아온 김영옥. 영화 ‘워낭 소리’를 보면서 지금껏 짐승같이 일했구나 싶었다. 자신이 영화 속 소 같기도 하고, 노인 같기도 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다. 사실 좋아서 하기는 했다. 잘한다는 칭찬 한마디에 힘을 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뒤도 돌아보면서 여유를 즐기고 싶다.
“부모님이 주신 재주를 부리며 지금껏 연기해왔다고 생각해요. 연기를 천직으로 받아들이면서요. 나이가 들어 힘들다고 해서 대강대강 하자는 건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아요.”
연기에 정석은 없다. 연륜이 생겼다 해서 연기가 쉽게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일까. 연기에 있어선 아직도 부끄럽다는 김영옥. 베테랑 배우의 겸손이 오히려 그를 더 커보이게 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 그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데리러 온다는 남편의 전화였다. “집이 가까워서 걸어가도 된다는데, 괜히 그러네요. 과잉 충성하는 면이 있다니까요(웃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싫지 않은 얼굴이다. 여배우로서 소임을 마치고, 다시 한 가정의 아내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가을바람에 진분홍색 스카프가 가볍게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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