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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

우리나라 최초 동성애자 국회의원 후보 최현숙

“24년 결혼생활 뒤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사연, 내가 꿈꾸는 세상…”

글·송화선 기자 / 사진·조세일‘프리랜서’ || ■ 장소협찬·Our Place

입력 2008.04.24 11:47:00

서울 종로구에서 제 1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진보신당 최현숙 후보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다. 20대 초반 결혼한 뒤 한 남자의 아내, 두 아들의 엄마로 살다 지난 2004년 커밍아웃한 그를 만나 남다른 삶과 꿈에 대해 들었다.
우리나라 최초 동성애자 국회의원 후보 최현숙

50대 여성 동성애자가 제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치 1번지’ 종로에 출사표를 냈다. 화제의 주인공은 진보신당 최현숙 후보(51). 그는 2004년 커밍아웃한 뒤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펼쳐온 레즈비언이다.
‘대한민국을 커밍아웃시킬 최초의 성소수자 국회의원 후보’라고 적힌 명함을 들고 선거운동에 한창인 최씨를 만난 날, 서울에는 예고 없이 비가 내렸다. 뿌옇게 흩뿌리는 황사비 사이로 겉옷에 달린 모자를 덮어쓴 채 씩씩하게 걸어가는 최씨의 모습에서 문득 그의 지나온 삶이 보이는 듯했다.
최씨는 커밍아웃하기 전까지 24년 동안 한 남자의 아내, 두 아들의 엄마로 평범한 여성의 삶을 살았다. 그가 커밍아웃한 것은 마흔일곱 살 되던 해, ‘평생 이렇게 강렬하게 끌리는 사람은 처음’이라는 느낌을 준 여성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씨는 자신의 커밍아웃을 ‘욕망에서 시작된 변혁’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해 결국은 제 삶 모두를 완전히 바꿔놓았으니까요. 사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제 결혼생활은 그럭저럭 일반적인 편이었어요. 남편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아내들이 그렇듯 적당히 싸우고,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거든요. 그런데 그를 만난 뒤 더 이상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함께 살고 싶어졌거든요.”
마흔일곱 된 ‘아줌마’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선언했을 때 벌어진 상황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학교수인 큰오빠는 “구역질이 난다”고 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두 여동생은 전화기를 붙잡고 엉엉 울기만 했다고 한다. 막내 남동생은 “누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마련해둔 모든 보험을 스스로 깨려는 것”이라며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라”고 타일렀다. “마흔일곱 살에도 섹스가 문제가 돼?”라며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내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겐 뒤늦게 찾은 자신의 ‘욕망’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힘든 사람은 남편이었겠죠. 처음엔 제가 이혼을 원하는 이유를 제대로 말하는 게 그 사람을 더 힘들게 할 것 같아 ‘우리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둘 다 알지 않냐.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했어요. 아이들 다 키웠으니 각자의 삶을 살자고요. 그런데 남편이 제 뜻을 받아주지 않는 거예요. 결국 한달 반쯤 기다리다 ‘실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그 여자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어요.”

47세에 깨달은 여성을 향한 사랑
두 아들이 24세, 21세일 때였다. 갑작스런 아내의 커밍아웃에 깜짝 놀란 남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화를 냈다가, 달랬다가 갈팡질팡하던 남편이 내린 결론은 “한 번 지나가는 바람일 테니 용서해주겠다”는 것. 그러나 최씨에게 ‘여성을 향한 사랑’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해 최씨는 남편을 상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성정체성을 이유로 한 이혼소송’을 제기했고, 쇼핑백 두 개에 당장 필요한 짐만 챙겨든 채 집을 나왔다. 이혼청구 사유로 그동안의 갈등과 남편의 가정폭력도 함께 적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두 아이가 엄마의 선택을 이해해줬다는 거예요. 제 커밍아웃을 듣고 큰아이가 한 첫말은 ‘오랫동안 많이 참았네’였어요. 그러고는 최근에도 가정폭력이 있었는지 물었죠. 차분하고 따뜻하게 절 이해해주면서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엄마의 삶을 아무 혐오감이나 선입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우리나라 최초 동성애자 국회의원 후보 최현숙

작은아들 역시 “난 이미 충분히 컸다. 아빠와 우리 모두 당분간 힘들겠지만, 그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두 아들이 이처럼 ‘쿨하게’ 최씨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어릴 때부터 엄마와 격의 없이 소통하며 자라왔기 때문. 그는 “내가 사회운동하는 모습을 보며 세상의 다양한 삶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게 된 것도 그 아이들이 포용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최씨는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하기 전에도 천주교 사회운동, 민주노동당 활동 등을 해온 사회운동가였다. 대학 졸업 뒤 바로 결혼해 두 아이를 키우며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던 그가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된 건 80년대 중반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면서부터. 남편의 권유로 함께 나가게 된 성당에서 그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라’고 가르친 예수의 삶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저는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때까지 한 번도 가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서울 금천구 독산동 단칸방에 온 가족이 모여 살면서, 가난과 더불어 ‘예수’를 만난 거죠.”
그는 바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됐고, 지금도 여전히 ‘예수쟁이’라고 한다. 독산동 성당에서 빈민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장기수가족후원회 활동을 알게 돼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북송을 돕다가, 2000년 3월엔 스스로 민주노동당에 찾아가 당원이 됐다. 학생운동을 거치지 않은 ‘아줌마’가, 신앙에서 출발해 적극적인 사회운동가가 된 것이다.
“저 혼자 당사에 가서 당원 가입하러 왔다니까 사람들이 굉장히 황당해하더라고요(웃음). 그때 저는 남편과 갈등을 겪으며 사는 평범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여성과 관련된 활동을 했고, 2003년엔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 위원장이 됐어요.”
그는 당시의 삶을 “올바로 살기 위해, 예수를 닮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시간”으로 기억했다. 당시 독산동에서 그가 살던 곳은 방문 열고 나오면 바로 부엌인 집이었는데, 그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잠들고 나면 혼자 부뚜막에 앉아 밥상을 펴놓고 책을 읽으며 세상을 알아갔다고 한다.
최씨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된 것도 민주노동당 활동이 계기가 됐다. 당시 민주노동당에 결성돼 있던 동성애자 인권 모임을 돕다가 자연스레 많은 동성애자와 알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새삼 자신의 성정체성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제 나이대 사람들은 대부분 ‘동성애’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한 채 자랐어요. 그렇다 보니 젊은 시절 한 번도 제 성정체성에 대해 성찰해본 적이 없었고, 남편을 만나 그저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죠. 그런데 동성애자들을 만나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고민이 시작된 거예요.”
바로 그 무렵 동성애자 모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사로잡는 여성을 만난 최씨는 비로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게시판에 ‘47세에 성정체성을 깨닫다’는 글을 올림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세상에 알렸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커밍아웃이 어렵지 않았냐고 묻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그때 제게 가장 중요했던 건 다른 무엇보다 ‘나 자신으로 당당히 사는 것’이었죠. 주위 사람들도 저를 정말 사랑한다면, 제가 ‘진짜 나’로 살아가는 걸 이해해주리라 믿었어요. 종교적으로는 아무 걱정이 없었고요. 예수가 늘 말한 건 ‘사랑’이었거든요. 권력을 가진 집단이 자기네들의 율법 해석을 바탕으로 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건 예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최초 동성애자 국회의원 후보 최현숙

‘50대 이혼녀 레즈비언’조차도 행복한 세상 만들고 싶어
그에게 아무 아픔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06년 결국 남편이 그를 포기하고 놓아줄 때까지 길고 긴 이혼소송을 치러야 했고, 그동안 당장 끼니를 걱정할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결혼생활하며 함께 마련한 집과 재산이 모두 남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이혼에 합의해 지금은 재산분할 과정에 있어요. 처음엔 법원에서 제게 ‘당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이혼하게 됐으니 남편에게 위자료를 줘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 성정체성은 내가 책임질 부분이 아니며, 이혼 사유 중에는 가정폭력도 있는데 내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모든 책임을 떠안을 수는 없다’고 했죠. 결국 제 주장이 받아들여져 위자료를 주지 않게 됐습니다.”
2006년 12월 맏아들이 결혼했을 때 결혼식에 가지 못한 것도 최씨가 커밍아웃 후 겪은 아픔 가운데 하나다. 그는 “동성애자로 살고 있으면서, 결혼식에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남편의 아내 역할을 할 수 없었다”며 “나중에 아들과 그 사정에 대해 얘기하려 했는데 아들이 ‘시간이 지난 뒤에 말하자’고 해 아직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고 했다.
“살면서 그렇게 많이 운 적이 없을 거예요. 그 무렵엔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혼자 하염없이 눈물을 쏟곤 했죠. 큰아들은 지금 전남편과 함께 사는데, 아직 제가 계속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상태예요.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으니 저와 다른 입장이 있을 거라고, 이젠 조금씩 이해하고 있습니다.”
4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형제들은 그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묵인’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부모에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말하지 못한 것도 그에겐 상처로 남아 있다. “일흔이 넘은 연세에 충격을 받을 수 있다”며 다른 형제들이 말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 혼자만의 부모님이 아니니까 형제들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가족 모임에 갈 때마다 조심스럽죠. 특히 이번에 출마하면서 얼굴이 더 많이 알려져, 누군가 부모님께 ‘당신 딸이 레즈비언이다’라는 식으로 제 얘기를 할까봐 신경이 쓰여요. 그전에 차라리 제가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죠.”
그가 출마를 결정하며 가장 걱정한건 부모와 전남편, 큰아들과 며느리, 형제와 그들의 가족 등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또 한 번 아파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커밍아웃 이후 4년 동안 겨우 진정시켜놓은 상처를 다시 헤집게 될까봐 미안했다고.

“하지만 단 한 번만 ‘미안하다’고 말하고, 더 이상은 사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제가 출마하는 건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동성애자들, 그리고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당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 같은 많은 소수자와 함께하기 위한 거니까요. 저로 인해 이런 소수자들의 삶과 꿈이 널리 알려지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세상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최씨는 자신의 얼굴과 성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며 ‘정치 1번지’ 종로에 출마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종로는 70년대 레즈비언의 집결지였고, 지금은 게이들의 커뮤니티가 모여 있는 곳으로 성소수자 역사에서 의미 깊은 곳. 서울의 중심이지만, 정작 그 안에 사는 서민들의 삶은 어렵다는 점에서 늘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고자했던 그의 정치적 목표와도 부합되는 곳이라고 한다.
“선거운동을 하며 시민들에게 나눠드리는 명함에 제 블로그 주소(http://blog.naver.com/bebreaking)와 휴대전화 번호를 적었더니, 격려 메시지가 참 많이 와요. 그 가운데는 혹시라도 자신이 드러날까봐 전화번호를 감춘 채 ‘1004’ 같은 번호로 문자를 보내는 동성애자 분들도 많죠. 그분들이 보내는 ‘최 후보님 덕분에 힘을 얻고 있습니다. 기운 내세요!’라는 문자 하나, 사무실로 오는 이름조차 쓰여 있지 않은 후원금 봉투 하나를 받을 때마다 ‘내가 출마하기를 잘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현재 만나고 있는 파트너는 트랜스젠더, 그의 선거운동 돕고 있어
얼굴이 알려진 동성애자로서 그의 안전을 걱정해주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최씨는 “선거운동 관계자들과 함께 회의를 하다가 ‘하비 밀크’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하비 밀크는 미국 동성애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 7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뒤 시의원에 당선됐지만, 이듬해 동성애를 혐오하는 동료 의원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 외에도 다른 나라에서는 동성애 인권운동을 하는 사무실에 불이 나거나 활동가들이 무차별 폭력을 당하고, 심할 경우 목숨을 잃는 사건도 계속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최씨는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전 늘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죽어도 좋다. 죽으면 예수와 마주 보겠지’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미 많이 알려졌으니 혹시라도 내게 폭력사건이 일어난다면 다른 평범한 동성애자가 당하는 것보다 훨씬 파급효과가 크겠구나’라고도 생각하고요. 하지만 저만큼 준비돼 있지 않은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최악의 상황에 처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고 싶어요.”
최씨는 그사이 처음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했던 파트너와 헤어졌고, 지금은 남성으로 태어났다가 여성으로 성전환한 트랜스젠더를 만나고 있다. “서로 평등하게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최씨의 파트너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최씨를 돕고 있다고 한다.
최씨가 원하는 건 바로 자신들 같은 사람, ‘50대 이혼녀 레즈비언’이나 ‘트랜스젠더’조차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처럼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조차 행복해질 수 있다면, 이 사회에 사는 모두가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제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동성애자 인권문제가 가장 크게 부각되고 있지만, 사실 저는 우리 사회에서 배제당하고 소외돼 있는 모든 사람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내였고, 가난한 서민이었고, 동시에 이혼녀이면서 동성애자니까요. 그런데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제 모습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한 걸음씩 당당해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저처럼 ‘욕망에서 시작된 변혁’을 이루길 바라요.”

여성동아 2008년 4월 5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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