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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상처받은 3명의 여인 연기하는 연극‘바람의 키스’ 배우 이항나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박윤희‘자유기고가’ ■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 2005.03.10 14:49:00

결혼 후 찾아오는 사랑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연극 ‘바람의 키스’에서 다른 여자에게 남편을 뺏긴 여자, 외도하는 남편과 헤어지지 않으려는 여자, 그리고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여자를 혼자 연기하는 연극배우 이항나가 들려주는 사랑과 상처, 화해에 대한 생각.
남자에게 상처받은 3명의 여인 연기하는 연극‘바람의 키스’ 배우 이항나

‘나 이제 갈게요. 난 이미 울 거 다 울었어요.’ 요즘 서울 대학로에 있는 설치극장 정미소 건물에는 연극 ‘바람의 키스’를 홍보하는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다. 그 속에 검은 눈을 모닥불처럼 빛내고 있는 한 여인이 있다. 오랜 세월 많은 눈물을 흘린 대가로 얻어진 말간 얼굴을 하고 새롭게 시작될 생에 두 눈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다.
언뜻 중성적이면서도 도발적인 느낌을 주는 이 주인공은 연극배우 이항나씨(34). 그는 극단 떼아뜨르 노리의 여덟 번째 작품 ‘바람의 키스’에서 1인3역을 맡았다. 딴 여자에게 남편을 뺏긴 여자 클로에, 남편의 외도를 덮어주고 파탄난 관계의 끝에 매달리는 여자 쉬잔, 그리고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여자 마틸드. 각각 다른 사람이면서 또 한사람의 다면적인 모습일 수도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이 연극의 힘이다.
“‘바람의 키스’에서 ‘내 마음의 불행이 부메랑이 되어 아들한테 갔고 그것이 아들에게 상처가 되었다. 아들의 상처는 또다시 내 상처가 되고 말았다’고 말하는 대목이 마음에 들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러시아 유학파 1세대인 이씨는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후 93년 같은 과 동기생인 배우 박신양, 김유석 등과 러시아 셰프킨 국립연극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그는 러시아에 유학온 한국 유학생들과 극단 떼아뜨르 노리를 창단하고 러시아에서 활발한 연극활동을 벌였다. 현재 그는 이 극단의 대표이면서 연극연출가로도 일하는 멀티플레이어다.
그는 대중적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진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일단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연기파 배우’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사천의 착한 여자’ ‘날 보러 와요’ ‘클로저’ 등의 작품을 통해 기자, 창녀, 스트립댄서, 시각장애인 등 폭넓은 배역을 거침없이 소화해 냈고 연극 ‘유리가면’으로 제36회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관객들은 무대에 오른 배우가 스트립댄서 역할을 하면 ‘섹시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배우는 고역이죠. 의자 놓고 섹시 포즈 잡느라 다리에 죄다 푸른 멍이 들었다니까요. 이번 ‘바람의 키스’에서 맡은 역도 두 시간 내내 퇴장 없이 대사를 하니까 참 힘들어요. 연극을 하다 보면 이렇게 넘기 어려운 ‘산’이 나타나지만 그때마다 도전정신으로 이겨내요.”
‘바람의 키스’는 불륜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는 이 연극을 통해 ‘일탈’을 선동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빼앗긴 여자’ 혹은 ‘차이기 전에 먼저 차버린 여자’의 일방적인 시선에서 외도한 남자를 단죄하지도 않는다.
“치유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에요. 누구나 사랑의 상처를 갖고 있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보니까 대부분 자신의 영혼에 어떤 상처가 새겨져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되잖아요. 이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자기 내면과 화해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해요.”
“연극에서 사랑의 상처보단 화해와 치유 보여주고 싶어”
배우가 사람을 죽여보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범 역할을 못 할 이유는 없듯 그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상황을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각 역할의 내면을 충분히 그려내기 위해 평소 자기 관찰과 사람 탐구를 열심히 한다고 한다.
늘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까?’에 몰두해 있고 무대에서 당당하게 연기력을 과시하는 그지만 “마음속으로는 무대에 서는 일이 항상 두렵다”며 긴 숨을 내쉰다. 그가 연극 ‘차.이.다’를 무대에 올렸을 때의 일이다.

남자에게 상처받은 3명의 여인 연기하는 연극‘바람의 키스’ 배우 이항나

“스트립댄서 역을 맡았는데 담뱃불을 붙이는 장면이 있었어요. 불을 붙이려고 라이터를 꺼내들었는데 라이터를 쥔 손이 덜덜덜 떨리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무대 뒤편으로 몸을 돌려 담뱃불을 붙였지만 그때 관객들이 알아챌까 봐 속으로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그냥 웃어넘기기엔 가슴 찡한 배우 특유의 직업병도 가지고 있다.
“공연을 앞둔 며칠간은 황당한 꿈을 자주 꿔요. 꿈에 무대에 올랐는데 다른 배우들은 다 아는데 저만 대본이 바뀐 걸 모르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 제가 준비한 소품이 엉뚱한 것으로 바뀌어 있거나 중요한 의상이 없어져 버리는 꿈도 자주 꾸죠.”
그럴수록 더욱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는 완벽주의자 이항나.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를 다듬어준 결코 잊을 수 없는 스승 한 분이 그에게 있다고 한다. 러시아 유학 당시 그의 팔자걸음을 교정해준 발레교사다.
“발레 선생님한테 얼마나 혹독하게 훈련을 받았는지 몰라요. 동작 하나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어요. 제가 운동 신경이 남들보다 떨어지는 편인데 선생님께서 어찌나 구박을 하시던지 발레를 배우는 1년 반 동안 거의 매일 울다시피 했어요. 길에서 인사하다 마주쳐도 걸음걸이를 다시 잡아보라고 할 만큼 철저한 분이셨죠.”
그의 발레 지도교사는 볼쇼이발레단 프리마돈나 출신. 막상 시험발표회가 임박했을 때 스승은 제자인 그의 머리를 직접 따주고 소품까지 일일이 챙겨주는 자상함을 보였다. 이날 처음으로 그는 스승의 깊은 사랑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가 시험발표회장 무대에서 폴카, 왈츠 등을 추며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동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다.
“선생님이 저희들을 꾸며주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버스 안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제자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선생님이 잔뜩 긴장을 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 같아요. 연기자는 몸과 대화를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만일 그 선생님의 철저한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몸에 대한 감성을 전혀 깨치지 못했을 거예요.”
유학시절의 혹독한 배우 수업은 발레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96년 열린 러시아 각 대학 연극영화과 학생들과 어깨를 겨룬 ‘화술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첫 번째로 꼽는 배우의 덕목은 ‘아름다운 꽃밭’과도 같은 내면세계다.
“배우로서 갖춰야 할 매력에는 테크닉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제 내면이 담긴 연기로 관객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는 인간적인 배우가 되고 싶어요.”
‘사랑이 없는 일상’과 ‘일상이 없는 사랑’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는 사람은 ‘바람의 키스’에서 열연하는 배우 이항나를 만나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여성동아 2005년 3월 4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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