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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독점 인터뷰

13년째 말기암 투병하며 꽃동네 복지대 졸업한 연극배우 이주실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살아있음에 감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베풀고 싶어요”

■ 글·최호열 기자 ■ 사진·홍중식 기자

2005. 03. 02

13년째 암과 싸우고 있는 연극배우 이주실이 지난 2월22일 눈물의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암치료 후유증으로 인해 한쪽 눈과 귀를 잃고, 수시로 구토와 하혈에 시달리면서도 공부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숭고한 도전 뒷얘기를 들어 보았다.

13년째 말기암 투병하며 꽃동네 복지대 졸업한 연극배우 이주실

뼈까지암세포가 전이되어 93년 11월 병원으로부터 말기암 진단과 함께 1년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던 연극배우 이주실(61). 하지만 그는 암투병 중에도 연극무대에 오르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쳐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런 그가 4년 전,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 복지심리학과에 합격해 사람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말기암 환자가, 그것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학에 진학한다는 게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끝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할 수 있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려고요.”
당시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때 그는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는 것처럼 아프고 왼쪽 눈이 자꾸 감기는 등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대학 공부를 강행했고, 마침내 지난 2월22일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식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들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서양미술 400년전’을 찾은 그를 만났다. 벌써 4년이 흘렀는데도 그의 평온한 미소와 낭랑한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처음으로 방학을 즐기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방학 때마다 몸살을 앓느라 집에서 누워 있기만 했거든요. 그렇게라도 해서 몸을 추슬러야 또 다음 학기 강의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로 포기할까 고민했지만 그때마다 두딸이 다그치며 격려
마지막 방학을 맞아 그동안 못 만났던 고등학교 동창들이며 친구들과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가고 연극과 영화, 미술전에 다니느라 바빴다는 그의 얼굴이 무척 밝아 보였다.
졸업하는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고 하자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정말 졸업을 하나’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며 잠시 감회에 젖은 그는 “뚜렷한 목표가 내가 살 수 있는 힘의 바탕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교수연구실 하나를 빌려줘 거기서 생활을 했어요. 처음 입학할 때 가져간 책이 국어사전과 영어사전밖에 없었는데 며칠 전 그 방을 정리하러 가서 보니까 지난 4년 동안 늘어난 책이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있는 것만큼 되더라고요. 교수님이 정해준 강의 교재만 가지고는 내용이 이해가 안 되니까 그보다 쉬운 책부터 사서 봐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책이 많아진 거죠.”
그는 올해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할 예정이다. 따라서 계속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해야 하는데 왜 굳이 방을 정리했을까.
“학교에선 저에게 계속 쓰라고 했지만 저 혼자만 그런 혜택을 받는 것도 부담스러워 사양했어요. 대학원 수업은 일주일에 이틀뿐이에요.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는 학교에서 자야 하지만 그땐 학생 기숙사에서 새우잠이라도 자면 될 것 같아요. 저도 방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저보다 더 그 방이 필요한 분들이 계실 테니까 그런 분이 쓰도록 해야죠.”
그는 이런 식이다. 4년 전에도 눈에 이상이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자신의 눈이 망가진다는 생각보다는 ‘사후에 기증할 수 있는 게 눈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못하게 된’ 것을 마음 아파했다.

13년째 말기암 투병하며 꽃동네 복지대 졸업한 연극배우 이주실

이주실은 암투병 중에도 연기 활동과 봉사활동을 계속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학점은 그렇게 좋지 못해요. 가까스로 졸업했을 정도죠. 그래도 F학점 없이 전 과정을 이수했다는 것에 만족해요.”
그의 대학생활은 그 자체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었다. 1~2학년 때는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큰 고통을 겪기도 했다. 시험을 치르다 구토를 하고, 눈이 터질 듯한 고통과 하혈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젊은 학생들보다 성적은 좋지 못해도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강의실에서 버텼다고 한다.
“사회에서와 달리 학교에서는 제가 쉬고 싶다고 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몸에서 지금 상태가 안 좋으니 누워서 쉬라는 신호가 와도 저 때문에 수업 시간을 옮길 수도, 수업을 잠시 중단할 수도 없으니까요. 딱딱한 의자에 앉아 3시간 동안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죠.”
수십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공부라 정신을 집중해 듣지 않으면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암치료 후유증으로 입학하기 전부터 한쪽 눈이 안 보이고,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았던 그는 맨 앞자리에 앉아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1년 선배에게 얻은 강의노트를 미리 보고 수업을 들었지만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화학요법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자신의 전화번호마저 문득문득 잊어버릴 정도여서 강의시간 내내 귀를 쫑긋 세우고, 강의내용을 녹음해 다시 들으며 공부를 했다고.
“지금도 항암 치료제를 먹어요. 그런데 약이 너무 독해 먹고 나서 시간이 조금 지나면 구토 증세와 어지럼증이 생겨요. 종종 그 증세가 심해질 때가 있어요. 수업중에도 그럴 때가 있는데, 그러면 수업에 피해를 주지 않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강의실 입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야 했어요.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부터가 저에겐 전쟁이었죠.”
그는 대학공부를 하면서 2000년 자신이 연극을 가르쳤던 전남 영광에 있는 대안학교인 성지고등학교를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연극지도를 계속했다.
“첫 중간고사를 보고 나니까 잠시 긴장이 풀어졌는지 갑자기 몸이 확 나빠지더라고요.”
그는 그 후로도 3학년 1학기까지 무리를 하거나 시험을 볼 때면 몸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특히 환절기에는 몸 상태가 안 좋은데 시험기간이 항상 그때여서 더욱 고생했다고. 심지어 시험을 보다 풍에 걸린 것처럼 목이 저절로 돌아간 적도 있다고 한다.
“전 한쪽 눈이 안 보이는 데다가 다른 쪽도 시력이 좋지 않아요. 그래서 시험문제를 읽으려면 안경을 쓴 상태에서 돋보기로 봐야 해요. 한번은 그렇게 읽어가며 문제를 푸는데 단어 하나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답을 쓸 수 없는 거예요. 순간 ‘이러면서 무슨 공부를 한다고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면서 맥이 탁 풀리는데 속에서 확 올라와 시험지에 토한 적도 있어요.”
또 시험 날 새벽에 갑자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아 충북 음성에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느라 시험을 못 본 적도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인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와 시험을 치르면 되었지만 그는 암 환자라 담당 주치의에게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로 건강이 더욱 악화됐다. 암 환자는 특히 먹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영양실조에 걸린 적도 있었다. 학교 식당에서만 끼니를 해결한데다 군것질을 안 좋아하는 편이어서 별다른 영양보충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제가 저를 봐도 참 불쌍해 보였어요(웃음).”
그렇게 힘들 때 ‘내가 왜 이 짓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냐고 묻자 “왜 안 그랬겠어요” 하며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13년째 말기암 투병하며 꽃동네 복지대 졸업한 연극배우 이주실

“공부는 따라가기 힘들고, 몸은 아프고…. 그래서 짐을 싸려고도 했어요. 문득 ‘내가 지금 의자에 앉아 있을 기운이 있으면 아이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엄마로서의 역할을 접고 내 삶의 질만 높이겠다고 이러고 있는 게 잘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럴 때마다 그를 주저앉힌 건 도란이와 단비, 두 딸이었다고 한다.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할 때마다 “엄마가 앓아누워 있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라”며 다그쳤다는 것.
삶의 속도 느리게 하고 자연의 일부 되어 살면서 건강 회복
하지만 힘든 적응 기간이 지나면서 그는 오히려 힘을 얻게 됐다. 교수와 학생들의 사랑이 그에겐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학생들과 함께 MT도 가고, 같이 어울리면서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젊어지는 것 같아요. 덕분에 딸들과의 간격도 더 좁혀진 것 같고요. 학교에선 아줌마 파마를 할 일이 없어요. 생머리를 대충 자르거나 묶고, 옷도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입고, 운동화 신고, 등에 가방을 메고 자전거를 타고 교정을 달리거든요. 그러니까 교수님들이 ‘이 선생은 뒤에서 보면 20대보다 더 젊어 보인다’고 하세요. 제가 좀 날씬하잖아요(웃음). 그 맛에 지냈어요.”
또한 그는 노래를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 가곡 합창동아리 ‘그린비’를 만들어 교도소와 고아원 등을 돌며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가 3학년이 되면서부터 건강을 회복한 데는 학교생활에 적응이 된 까닭도 있지만 학교가 산속에 있어 자연 속의 기운을 많이 받은 것도 한몫했다고 말한다.
“얼굴을 간질이는 아침햇살과 맑은 새소리에 잠이 깨요. 그럼 ‘오늘도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요. 아침에 자연을 거닐며 명상을 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고요.”
4년 전 인터뷰를 할 때도 그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말해 기자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이젠 아침에 눈뜨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지 않냐”고 하자 “아니”라고 한다.
“지금도 이 순간 제가 살아 있다는 데 감사해요. 공기 냄새를 맡는 게 기분 좋고, 걸을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해요.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다 말기암 판정을 받은 후 삶의 속도를 느리게 하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유롭게 산 것이 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다. 현재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다뿐이지 암에서 완치란 없기 때문이다.
건강이 회복되면서 그는 한동안 중단했던 배우로서의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지금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그동안 영화 ‘고독이 몸부림칠 때’ ‘4인용 식탁’ ‘결혼은 미친 짓이 다’ 등에 출연했는데 올해부터는 활동 영역을 더욱 넓힐 생각이다. 오는 7월에는 연극 ‘맨드라미’ 무대에 선다.
방황하는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 진행하고 싶어
“영화에도 출연할 계획이에요. 김성수 감독의 ‘야수’라는 작품에서 권상우 엄마로 캐스팅되었어요. 김 감독이 저를 놓고 한 달 동안 고민을 했대요. 왜냐하면 권상우 엄마가 암으로 죽는 역할이거든요. 그래서 저를 캐스팅하고 싶어 하면서도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고 해요. 전 괜찮다고 했어요. 뭐 어때요. 그건 역할일 뿐이잖아요.”
아무리 영화일 뿐이라고 해도 말기암 환자인 그가 암으로 죽는 역할을 한다는 건 마음에 걸릴 것 같다. 그런데도 출연을 결심할 만큼 배역이 마음에 들었냐고 하자 “권상우를 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라며 웃었다.

13년째 말기암 투병하며 꽃동네 복지대 졸업한 연극배우 이주실

이주실은 대학원에 진학하며 또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김 감독이 영화에서처럼 어머니를 잃었다고 해요. 자기 어머니 생각을 많이 하며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참 잘 형상화되어 있어요.”
아직은 그에게 들어오는 배역이 대부분 단역이다. 한때 최고의 배우로 찬사를 받았던 그로서는 성에 차지 않을 법도 한데 오히려 그는 “늙은 암 환자를 불러 주어서 고마울 뿐”이라고 한다.
“욕심 부리지 않고 급하지 않게 제 길을 갈 거예요. 그동안 쉬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퇴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른 많은 것을 체화했으니까요. 제가 다시 배우로 돌아가려는 것은 본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배우고 느낀 것들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서예요. 그러니 배역의 비중은 중요한 게 아니죠. 그리고 그동안 인연을 맺은 소외계층 사람들을 제가 일일이 자주 찾아볼 수 없어도 방송이나 영화, 연극을 통해 교감을 하고 싶어요.”
그는 30년 넘게 꽃동네와 소록도, 동두천 기지촌 등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말기암 판정을 받은 후에도 그의 봉사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사회봉사를 더 잘하기 위해 대학에 다녔다.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 상황에서 남을 돕는 일을 하는 이유는 뭘까.
“사람들은 제가 무척 대단한 일을 한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생각해 보면 단순해요. 저에겐 할 게 봉사밖에 없어요. 이혼했으니까 남편이랑 뭘 할 것도 없죠, 술 마실 일도 없죠, 이 나이에 저에게 데이트 신청하는 사람도 없죠, 아이들은 외국에서 공부하니까 돌봐줄 것도 없어요. 남는 시간에 뭘 하겠어요(웃음). 복지대학에서도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소년원에 가서 아이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는 게 소일거리였어요.”
그가 올해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 대학원 임상사회사업학과에 진학한 것도 사회봉사를 위해서라고 한다. 대학에서 전공한 복지심리학이 개인의 마음을 분석하는 학문이라면 임상사회사업은 그걸 실천하는 학문이라고. 이곳에서는 알코올 중독 환자, 각종 폭력에 시달리는 어린이, 여성들을 위한 사회복지사업과 저소득층, 노인, 탈북자들을 위한 복지환경을 심도 있게 다룬다.
“2006년 3월에 탈북 청소년을 위한 교육시설인 한겨레학교가 문을 열어요. 전에 봉사활동을 한 성지고등학교의 법인인 성지학원에서 만든 거예요. 거기에서 일을 하기로 되어 있어서 이왕이면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대학원도 진학했어요.”
벌써부터 학교 일로 마음이 분주하다는 그는 “그동안 받은 사랑을 봉사활동으로 갚는 데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작은 소망을 이야기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청소년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방황하는 청소년, 흔들리는 청소년을 위한 진지한 프로그램이 없었어요. 이젠 방송에서도 그런 프로그램이 하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가수 강원래씨가 장애우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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