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강은교 시인(57·동아대 국문과 교수)이 이번에 내놓은 시집의 제목이다. 모두 73편이 실려 있는 이번 시집에서 우리는 맑고 담담한 서정의 세계를 만난다. 그의 시집에서는 억지로 빚어낸 듯 현란하기 짝이 없는 시적 표현이나 무겁디 무거운 철학적 언어들을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그의 시집에는 하루살이, 풍뎅이, 장수하늘소, 게… 이처럼 작은 생명들이 뛰어노는 몸짓들로 가득하다.
두권의 선집을 포함, 열세번째 시집을 세상에 내놓은 강은교씨. 68년 <사상계> 신인 문학상에 ‘순례자의 잠’으로 등단한 이후 35년을 꾸준히 시만 써왔다. 참 오랜 세월이라는 말에, 그는 얼굴을 붉히며 “재주가 이것밖에 없어서…”라며 겸손해 한다.
“35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재주라곤 이거밖에 없어서요. 사실은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지만요. 살아오면서 고비가 많았는데, 시가 있어서 그나마 제대로 살아온 게 아닌가 해요. 제게 시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은 해보는 것조차 싫어요.”
“어릴 때부터 친구 없이 혼자 있는 게 더 익숙해요”
강은교씨는 외로운 사람이다. “전 워낙 혼자 있는 게 버릇이 되어서 외로운 게 불편한 건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할 정도다. 경기여고,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지만 친한 친구 하나 없었던 이십대. 지금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학교 교수식당에서도 그는 혼자 식사해야만 마음이 편하다. 다른 이들의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수저를 드는 일이 그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고 한다. 도리어 동료 교수가 인사하면서 옆자리에라도 앉으면, 이내 사레가 들릴 정도로 사람의 부대낌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 그가 강은교 시인이다.
“사람들은 저더러 혼자서도 너무 잘 논다며 신기해 하더군요(웃음).”
그래서일까. 그의 시집에는 꽃과 새와 등불은 있어도 사람은 없다. 그 지적에 그 역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쓴 시집들을 죽 보니까 그런 경향이 있더군요. 사람이 시에 드러나지 않더라고요. 아마, 제가 사람 만나는 반경이 좁고, 또 늘 외로운 사람이라 그런 거겠죠. 집에서 하루 종일 음악 틀어놓고 혼자 있으니까 도리어 집안의 사물들, 낡은 주전자, 수도꼭지, 천장… 이런 것들에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하지만 요즘에는 조금씩 사람이 보이는 시도 쓰고 있어요.”
그런 조짐은 그가 80년대 발표한 <소리집>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다. ‘허무의 존재증명’이라고 뭉뚱그려진 평을 받아온 그의 시세계. 그렇기에 사람들이 의외로 놓친 점이 있다. 그가 80년대를 거치며 저항시를 썼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고(故) 이한열군에 대한 슬픔과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담아 조시를 쓰기도 했던 그였다. 비록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나름의 방법으로 사회를 껴안으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그 <소리집>과 유사한 맥락에 놓인 시들을 이번 시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사물의 속삭임에서 조금씩 사람들의 소리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열세번째의 시집을 내는 동안 그의 시세계가 크게 변화를 겪은 건 아니다. ‘허무와 존재와 고독의 시인’이라는 평가 역시 그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지금도 전 삶이 허무하다고 생각해요. 글을 쓰다가 어디서 본 듯한 표현이라 생각돼 확인해보니 이미 70년대 <허무수첩>에서 그런 유사한 구절을 썼더군요.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허무를 좀더 따뜻하게 바라보게 된 점일 거예요. 허무는 장자가 말한 ‘비어있음’과도 일맥상통해요. 비어있음의 궁극은 생명이거든요. 허무가 가진 힘은 극도의 저항으로도 이어지죠. 전 허무의 창조적, 생명적 가치를 믿어요.”
그러면서 그는 말을 잇는다. “사는 게 그래선지 전 다른 시인들처럼 시의 변화가 확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제가 좀 바보라서 한 가지만 파고들어서 그래요.”
강씨는 부산 송도 부근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83년 동아대학교 교수로 임용되면서 부산으로 내려갔으니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귀에 설은 부산 사투리가 무서웠다”는 서울 토박이는 지금은 “부산만큼 정들고 좋은 곳이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바다가 있어서 너무 좋아요. 낙동강과 다대포항이 만나는 지점에 우리 집이 있는데, 아침마다 바다에 나가는 게 일이에요. 바다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잖아요.”
그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넌 남쪽으로 가야 잘 산대”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예감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그걸 어떤 말로 부르든 그 자신 수긍한다. 부산은 내게 맞는 곳이라고. 이곳에 와서는 크게 아픈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강씨는 72년 스물일곱의 나이에 삶의 커다란 고비에 선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빨래를 하던 중이었다. 마지막 빨래를 헹구기 위해 세면대의 물을 트는 순간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뚝’하는 소리가 났고 그는 쓰러졌다. 의사는 뇌동맥이 끊어진 것이라 했다. 정확한 병명은 선천성 뇌동맥 정맥 기형.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핏줄들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환갑이 가까워가는 나이에 이르도록 그는 머릿 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고 있다.
“신경안정제를 지금껏 복용해왔어요. 그게 몸에 좋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약을 안 먹어보려고 노력했는데, 지난 7월 부천에서 강의하는 중에 머릿속에서 다시 스파크가 팍! 하고 일어났어요. 부산 내려와서는 10년 동안이나 그런 적이 없었는데… 늘 조심해야 해요, 저는.”
이런 자신의 상태를 비관하거나 괴로워할 법도 한데, 그는 담담하게 고약한 병을 껴안고 산다. 자신의 경련을 두고 ‘살과 피의 스파크’라고 이름 붙인 그. 뇌 사진을 찍은 후 그가 쓴 글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형광 램프에 비쳐진 나의 뇌사진은 마치 나비들이 엎드려 있는 것 같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날지 못하는 수많은 나비들….’
비록 몸은 불편하다고 해도 그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산다. 혼자 힘으로 물에서 헤엄치는 법을 터득했고, 다리가 불편하지만 등산도 다닌다. 그리고 재작년엔 미국 버클리 대학에 교환교수로도 다녀왔다. 1년여간의 미국 체험은 그에겐 많은 것을 깨우치게 했다.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왔나 하는 자각을 했어요. 격식이라는 것에 너무나 매여 살았구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됐고요. 게다가 전 모범생 콤플렉스가 있어서, 모든 걸 잘해야만 직성이 풀렸어요. 논문도 잘 써야 하고, 시도 잘 써야 하고 집안일도 남 못지 않게 잘해야 하고…. 미국 가기 바로 직전 진공 청소기를 구입할 정도였어요. 그러다가 미국에 가서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죠. 그 모든 걸 다 잘 하려고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는 거로구나….”
이제 그는 적당히 어질러놓고, 그걸 게으르게 치우는 재미를 알겠노라고 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시 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쪼개 한달에 한번 부산에서 시 낭송회를 하고 있다. ‘시 치료’라는 이름으로 해오고 있는 이 작업을 그는 뿌듯해 한다.
“시 낭송회를 좀더 다르게 해볼 수는 없을까 생각해요. 시는 언어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시에는 소리, 리듬이 있으니 노래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봤어요. 그래서 이번 9월말 미국에서 열리는 낭송회에는 낭송이 아닌 한국의 소리, 노래로 시를 전달하려고 해요.”
집에 있을 때는 늘 음악을 켜두고 있을 만큼 음악광인 그다운 말이다. 클래식 음악과 러시아 민요를 좋아하는 그는 얼마 전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바이엘부터 시작 한 의욕적인 피아노 레슨이 비록 바쁜 일정에 밀려 정년 퇴임 후로 늦춰지긴 했지만 그만큼 그는 ‘소리’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개강했죠, 미국 나갈 준비해야죠…. 요즘 참 바쁘네요. 게다가 사물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럴 수도 있나 싶어요. 전 마이크 없이는 강의를 못하는데 마이크가 나가질 않나. 인터넷이 다운돼버리질 않나. 밥솥이 고장나질 않나. 오죽하면 등산화 밑바닥까지 망가져 버렸어요. 전부 새로운 걸로 바꾸라고 하는 계시인가 싶기도 해요. 그래도 전부 바꿀 순 없으니까 급한 대로 인터넷만 전용선 회선을 바꿔버렸어요.”
‘사물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인답게 사물들 얘기를 통해 근황을 대신하고 강씨는 홍익대 시각디자인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외동딸과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총총히 일어섰다. 딸과 떨어져 사는 게 외롭지 않은가 하고 기자가 마지막 질문을 던지자 그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사실 전 너무 풍족한 상태는 겁이 나요. 가르치는 아이들한테도 그러는 걸요. 문학을 하려면 고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렇지 않겠어요? 뭔가 결핍이 있어야 그걸 찾기 위해서 글을 쓰지 않겠어요. 전 너무 풍족한 상태는 그래서 겁이 나요. 시가 안 나올까봐요.”
그의 대답을 듣고 있으려니 그가 왜 시인이며, 또 시 밖에 할 줄 아는 재주가 없다고 했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그는 천상 시인이었다.
두권의 선집을 포함, 열세번째 시집을 세상에 내놓은 강은교씨. 68년 <사상계> 신인 문학상에 ‘순례자의 잠’으로 등단한 이후 35년을 꾸준히 시만 써왔다. 참 오랜 세월이라는 말에, 그는 얼굴을 붉히며 “재주가 이것밖에 없어서…”라며 겸손해 한다.
“35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재주라곤 이거밖에 없어서요. 사실은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지만요. 살아오면서 고비가 많았는데, 시가 있어서 그나마 제대로 살아온 게 아닌가 해요. 제게 시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은 해보는 것조차 싫어요.”
“어릴 때부터 친구 없이 혼자 있는 게 더 익숙해요”
강은교씨는 외로운 사람이다. “전 워낙 혼자 있는 게 버릇이 되어서 외로운 게 불편한 건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할 정도다. 경기여고,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지만 친한 친구 하나 없었던 이십대. 지금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학교 교수식당에서도 그는 혼자 식사해야만 마음이 편하다. 다른 이들의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수저를 드는 일이 그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고 한다. 도리어 동료 교수가 인사하면서 옆자리에라도 앉으면, 이내 사레가 들릴 정도로 사람의 부대낌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 그가 강은교 시인이다.
“사람들은 저더러 혼자서도 너무 잘 논다며 신기해 하더군요(웃음).”
그래서일까. 그의 시집에는 꽃과 새와 등불은 있어도 사람은 없다. 그 지적에 그 역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쓴 시집들을 죽 보니까 그런 경향이 있더군요. 사람이 시에 드러나지 않더라고요. 아마, 제가 사람 만나는 반경이 좁고, 또 늘 외로운 사람이라 그런 거겠죠. 집에서 하루 종일 음악 틀어놓고 혼자 있으니까 도리어 집안의 사물들, 낡은 주전자, 수도꼭지, 천장… 이런 것들에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하지만 요즘에는 조금씩 사람이 보이는 시도 쓰고 있어요.”
그런 조짐은 그가 80년대 발표한 <소리집>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다. ‘허무의 존재증명’이라고 뭉뚱그려진 평을 받아온 그의 시세계. 그렇기에 사람들이 의외로 놓친 점이 있다. 그가 80년대를 거치며 저항시를 썼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고(故) 이한열군에 대한 슬픔과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담아 조시를 쓰기도 했던 그였다. 비록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나름의 방법으로 사회를 껴안으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그 <소리집>과 유사한 맥락에 놓인 시들을 이번 시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사물의 속삭임에서 조금씩 사람들의 소리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열세번째의 시집을 내는 동안 그의 시세계가 크게 변화를 겪은 건 아니다. ‘허무와 존재와 고독의 시인’이라는 평가 역시 그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지금도 전 삶이 허무하다고 생각해요. 글을 쓰다가 어디서 본 듯한 표현이라 생각돼 확인해보니 이미 70년대 <허무수첩>에서 그런 유사한 구절을 썼더군요.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허무를 좀더 따뜻하게 바라보게 된 점일 거예요. 허무는 장자가 말한 ‘비어있음’과도 일맥상통해요. 비어있음의 궁극은 생명이거든요. 허무가 가진 힘은 극도의 저항으로도 이어지죠. 전 허무의 창조적, 생명적 가치를 믿어요.”
그러면서 그는 말을 잇는다. “사는 게 그래선지 전 다른 시인들처럼 시의 변화가 확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제가 좀 바보라서 한 가지만 파고들어서 그래요.”
강씨는 부산 송도 부근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83년 동아대학교 교수로 임용되면서 부산으로 내려갔으니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귀에 설은 부산 사투리가 무서웠다”는 서울 토박이는 지금은 “부산만큼 정들고 좋은 곳이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바다가 있어서 너무 좋아요. 낙동강과 다대포항이 만나는 지점에 우리 집이 있는데, 아침마다 바다에 나가는 게 일이에요. 바다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잖아요.”
그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넌 남쪽으로 가야 잘 산대”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예감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그걸 어떤 말로 부르든 그 자신 수긍한다. 부산은 내게 맞는 곳이라고. 이곳에 와서는 크게 아픈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강씨는 72년 스물일곱의 나이에 삶의 커다란 고비에 선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빨래를 하던 중이었다. 마지막 빨래를 헹구기 위해 세면대의 물을 트는 순간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뚝’하는 소리가 났고 그는 쓰러졌다. 의사는 뇌동맥이 끊어진 것이라 했다. 정확한 병명은 선천성 뇌동맥 정맥 기형.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핏줄들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환갑이 가까워가는 나이에 이르도록 그는 머릿 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고 있다.
“신경안정제를 지금껏 복용해왔어요. 그게 몸에 좋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약을 안 먹어보려고 노력했는데, 지난 7월 부천에서 강의하는 중에 머릿속에서 다시 스파크가 팍! 하고 일어났어요. 부산 내려와서는 10년 동안이나 그런 적이 없었는데… 늘 조심해야 해요, 저는.”
이런 자신의 상태를 비관하거나 괴로워할 법도 한데, 그는 담담하게 고약한 병을 껴안고 산다. 자신의 경련을 두고 ‘살과 피의 스파크’라고 이름 붙인 그. 뇌 사진을 찍은 후 그가 쓴 글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형광 램프에 비쳐진 나의 뇌사진은 마치 나비들이 엎드려 있는 것 같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날지 못하는 수많은 나비들….’
비록 몸은 불편하다고 해도 그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산다. 혼자 힘으로 물에서 헤엄치는 법을 터득했고, 다리가 불편하지만 등산도 다닌다. 그리고 재작년엔 미국 버클리 대학에 교환교수로도 다녀왔다. 1년여간의 미국 체험은 그에겐 많은 것을 깨우치게 했다.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왔나 하는 자각을 했어요. 격식이라는 것에 너무나 매여 살았구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됐고요. 게다가 전 모범생 콤플렉스가 있어서, 모든 걸 잘해야만 직성이 풀렸어요. 논문도 잘 써야 하고, 시도 잘 써야 하고 집안일도 남 못지 않게 잘해야 하고…. 미국 가기 바로 직전 진공 청소기를 구입할 정도였어요. 그러다가 미국에 가서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죠. 그 모든 걸 다 잘 하려고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는 거로구나….”
이제 그는 적당히 어질러놓고, 그걸 게으르게 치우는 재미를 알겠노라고 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시 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쪼개 한달에 한번 부산에서 시 낭송회를 하고 있다. ‘시 치료’라는 이름으로 해오고 있는 이 작업을 그는 뿌듯해 한다.
“시 낭송회를 좀더 다르게 해볼 수는 없을까 생각해요. 시는 언어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시에는 소리, 리듬이 있으니 노래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봤어요. 그래서 이번 9월말 미국에서 열리는 낭송회에는 낭송이 아닌 한국의 소리, 노래로 시를 전달하려고 해요.”
집에 있을 때는 늘 음악을 켜두고 있을 만큼 음악광인 그다운 말이다. 클래식 음악과 러시아 민요를 좋아하는 그는 얼마 전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바이엘부터 시작 한 의욕적인 피아노 레슨이 비록 바쁜 일정에 밀려 정년 퇴임 후로 늦춰지긴 했지만 그만큼 그는 ‘소리’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개강했죠, 미국 나갈 준비해야죠…. 요즘 참 바쁘네요. 게다가 사물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럴 수도 있나 싶어요. 전 마이크 없이는 강의를 못하는데 마이크가 나가질 않나. 인터넷이 다운돼버리질 않나. 밥솥이 고장나질 않나. 오죽하면 등산화 밑바닥까지 망가져 버렸어요. 전부 새로운 걸로 바꾸라고 하는 계시인가 싶기도 해요. 그래도 전부 바꿀 순 없으니까 급한 대로 인터넷만 전용선 회선을 바꿔버렸어요.”
‘사물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인답게 사물들 얘기를 통해 근황을 대신하고 강씨는 홍익대 시각디자인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외동딸과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총총히 일어섰다. 딸과 떨어져 사는 게 외롭지 않은가 하고 기자가 마지막 질문을 던지자 그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사실 전 너무 풍족한 상태는 겁이 나요. 가르치는 아이들한테도 그러는 걸요. 문학을 하려면 고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렇지 않겠어요? 뭔가 결핍이 있어야 그걸 찾기 위해서 글을 쓰지 않겠어요. 전 너무 풍족한 상태는 그래서 겁이 나요. 시가 안 나올까봐요.”
그의 대답을 듣고 있으려니 그가 왜 시인이며, 또 시 밖에 할 줄 아는 재주가 없다고 했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그는 천상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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