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하는 런웨이
라고스를 넘어 코펜하겐과 베를린, 그리고 상하이까지. 서로 다른 도시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2025년 패션위크에서 완전히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중에서 멕시코시티는 단연 돋보이는 스타 도시였다. 루이스 바라간 건축의 웅장한 분위기와 지역 공예가 결합된 무대는 산드라웨일, 줄리아이레나타 등 색과 질감을 중시하는 하우스들에게 더없이 최적의 배경을 선사했다. 라고스는 음악과 춤, 스트리트 감각이 혼재된 압도적인 에너지로 라고스스페이스프로그램, 아이아미시고 같은 걸출한 하우스를 배출하며 아프리카 패션 플랫폼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지속가능성과 실용주의를 앞세운 코펜하겐에서는 니클라스스코브가드, 스컬스튜디오, 스타인고야 등이 주목받으며 북유럽 하이패션 신의 핵심 무대로 부상했다.


국위선양, 젠몬
서울 성수동에 파격적인 새 랜드마크가 탄생했다.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를 필두로 향수 브랜드 탬버린즈, 디저트 브랜드 누데이크, 헤드웨어 브랜드 어티슈, 테이블웨어 브랜드 누플랏까지 총 5개 브랜드를 전개하는 아이아이컴바인드(iicombined)가 지난 9월 공개한 신사옥 ‘하우스 노웨어 서울(Haus Nowhere Seoul)’이다. 건축, 패션, 예술의 경계를 허문 이 미래적인 공간은 ‘화성에 불시착한 우주선’ 같다는 반응과 함께 공개 전부터 뜨거운 시선을 받았다. 살아 숨 쉬는 수백 개의 검은 비닐봉지, 황금빛 봉지를 들고 선 노인, 갑옷을 입은 거대한 닥스훈트 같은 초현실적인 설치물은 가치의 발견과 경이로움을 은유하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젠틀몬스터는 아이웨어를 넘어 미식과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세계관을 확장하며 오감을 자극하는 브랜드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브랜드 캠페인 역시 예술적 감각이 두드러진다. 틸다 스윈튼이 등장한 2025년 ‘볼드(Bold)’ 컬렉션은 하우스 노웨어를 무대로 현실과 가상이 교차하는 초현실적 영상미를 구현했고, AI 군중과 사운드가 고조되는 거대한 세리머니 장면은 압도적인 몰입감을 전했다. 이어 공개된 2025년 가을 캠페인 ‘더 헌트(The Hunt)’는 헌터 샤퍼가 출연한 1분 길이 단편영화로, 클래식 호러 영화의 문법을 재해석하며 충격과 몰입을 동시에 안겼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캠페인 세계관을 확장한 인터랙티브 게임까지 선보이며 대중을 브랜드 세계관 속으로 깊숙이 초대했다. 젠틀몬스터는 특유의 독창성과 예술적인 감각으로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브랜드 경험의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다. ‘국위선양’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만큼 글로벌 시장에서도 괴물 같은 존재감을 발휘하는 중이다. 새로운 시대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는 대담한 시도들은 앞으로의 K-크리에이티브 브랜드들에게 분명한 영감이 될 것이다.
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패션 하우스의 영화에 대한 도전이 계속되고 있다. 화제가 된 건 단연 구찌였다. 밀라노 패션위크 기간 런웨이를 열지 않고 대신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은 것. 데미 무어가 주연을 맡은 단편영화 ‘더 타이거(The Tiger)’는 ‘구찌 가문의 생일 파티’라는 설정 아래, 화려한 인물들 사이에 감춰진 권력 관계를 긴장감 있게 풀어냈다.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구찌의 의상은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더욱 깊이 끌어당겼다. 르메르 또한 영화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미학을 담아냈다. 2025 F/W 시즌을 맞아 공개한 영화 ‘나인 프레임즈(Nine Frames)’는 배두나를 비롯한 배우 9명의 각기 다른 표정과 몸짓으로 채워졌다. 대사 한 줄 없이 고요하게 흐르는 롱 테이크 영상은 ‘느림의 미학’이라는 르메르의 세계관을 오롯이 보여준다. 버버리 역시 2025 S/S 캠페인에서 예측할 수 없는 영국 날씨를 삶의 순간에 빗댄 단편 시리즈를 선보였다. 비 내리는 런던의 한 카페에서 트렌치코트를 걸친 손석구의 모습은 더없이 서정적인 무드를 자아냈다. 절제된 카메라 워크는 코트의 소재와 실루엣을 더욱 부각하며 관객의 시선을 이끌었다. 한편 패션 하우스 최초로 프로덕션을 설립해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해온 생로랑의 노력은 올해 더욱 빛났다. 2025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 주연의 ‘에밀리아 페레즈(Emilia Perez)’가 뮤지컬·코미디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며 문화적 영향력을 널리 알린 것. 패션 하우스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감각적인 패션 필름은 브랜드 세계관을 미적으로 드러내는 독립된 장르로 자리 잡았다. 하우스들은 옷에 얽힌 인물의 감정선을 이야기로 엮어내며 자신들만의 시네마틱한 세계를 꾸준히 확장해가고 있다.
선수 교체 나가신다
2025년 패션계는 큰 격변을 겪은 해였다. 올해 초, 조나단 앤더슨이 디올 하우스의 여성복·남성복·오트쿠튀르 전 부문을 총괄하는 CD로 공식 임명되며 지각 변동을 예고했다. 이미 LVMH 그룹의 로에베에서 10여 년간 장인정신의 헤리티지를 되살려온 그는, 디올에서도 무슈 디올의 정신에 신선한 감각을 불어넣으며 부드러운 전환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어 샤넬의 새 수장으로 합류한 마티유 블라지의 행보도 업계 판도를 뒤흔들었다. 하우스 고유의 정통 클래식에 스포티즘을 결합한 2026 S/S 컬렉션으로 성공적인 첫 장을 써 내려갔다는 평가다. 존 갈리아노의 바통을 이어받은 메종마르지엘라의 글렌 마틴스 역시 하우스 고유의 문장인 포 스티치에서 착안한 마우스피스로 익명성을 강조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외에도 절제된 테일러링으로 회귀한 보테가베네타의 루이스 트로터, 장폴고티에의 게스트 디자이너로서 그 어느 대보다 위트 넘치는 컬렉션을 선보인 듀란 랜팅크 등 핵심 하우스들의 선수 교체가 잇따라 이어졌다. 한편 남성복의 거장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별세 소식은 패션계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의 부재는 한 시대의 막을 내리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시사한다. 지금 패션계는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전환기의 중심에 서 있다. 거대 하우스 수장들의 교체는 업계의 경쟁 구도를 근본부터 흔들며 패션의 다음 장을 새롭게 써나가고 있다.
트렌드의 부재가 부른 트렌드
올해는 특정 트렌드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다채로웠다. 발렌시아가가 점화한 대디코어를 필두로 로에베와 스텔라맥카트니가 아버지의 슈트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룩을 선보이며 트렌드에 힘을 실었다. 그런가 하면 캘빈클라인, 브랜든맥스웰, JW앤더슨은 지속가능성과 가치 중심의 소비를 반영한 절제된 디자인 및 실루엣의 피스들로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강조했다. 조용한 럭셔리의 흐름 속에 등장한 네오부르주아는 올해의 패션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리본과 자보 장식, 허리선 아래로 퍼지는 풍성한 실루엣 등 클래식 요소로 런웨이를 가득 채운 발렌티노가 대표적이다. 이는 미니멀리즘에 대한 반작용이자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의 회귀로 읽힌다. 여기에 해적코어와 고프코어를 넘어 실용성과 테크를 결합한 어번 시티웨어까지 더해지며,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장면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다양한 미학이 공존하는 흐름은 오히려 ‘트렌드의 부재’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낳았다. 트렌드의 우열을 가리기보다 각자 취향을 중요시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누군가 낡은 옷장에서 오래되고 해진 옷을 꺼내 입더라도, 그 선택 자체가 스타일로 존중받는 시대다. 그래서 2025년의 패션은 더욱 흥미롭다.#2025패션트렌드 #2025패션이슈 #여성동아
기획 강현숙 기자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구찌 니클라스스코브가드 라고스스페이스프로그램 마네마네 맨스 메종마르지엘라 브랜든맥스웰 사무엘귀양 산드라웨일 슈슈통 스컬스튜디오 스타인고야 아이아미시고 오디 장폴고티에 줄리아이레나타 캘빈클라인 JW앤더슨 SF10G 사진출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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