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컬렉션은 다음 시즌의 트렌드를 예측해서 보여주는 쇼다. 2~3월에 열리는 컬렉션에서는 다가올 가을과 겨울에 유행할 아이템을 보여주고, 9~10월에 열리는 컬렉션에서는 이듬해 봄여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아이템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런웨이에서 선보이는 의상은 그 시기 매장에서는 볼 수 없다. ‘See It Now, Buy It Now’는 말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것을 지금 당장 산다’는 의미로, 지금 막 컬렉션에서 본 아이템들을 바로 매장에 가서 구입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새로운 발상이다. 앞에서 새마을 운동도 아니고 뭐 거창하게 무브먼트라는 단어까지 언급하나 싶었을지 모르지만, 이는 반세기에 걸쳐 구축된 패션계의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는 엄청난 변화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동안 패션 피플이라 자부하는 이들도 런웨이에 등장했던 아이템이 한 시즌 후 매장에 걸릴 때쯤이면, 컬렉션에 대한 기억은 까맣게 잊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필자만 해도 컬렉션을 보고 선주문해놓은 가방이나 의류들을 5~6개월 후에 받고 나서 ‘내가 이걸 왜 주문했단 말인가’ 하고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6개월은 사람의 생각이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 다른 한편으론 인터넷과 SNS, 유튜브 등으로 컬렉션이 실시간 중계되는 요즘 같은 미디어 환경에서 6개월이란 기간은 브랜드가 내놓은 독창적인 스타일을 카피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이 같은 문제들 때문에 오래전부터 많은 패션 브랜드들이 컬렉션 상품을 그 시즌에 판매한다는 시나리오를 구상해왔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건 쇼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모든 것을 쏟아붓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특성상 컬렉션과 판매를 동시에 진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톰 포드의 깜짝 발표에 버버리의 CEO 크리스토퍼 베일리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동참을 선언하고, 2월 런던 패션위크에서 여성복과 남성복을 동시에 선보였다. 해마다 1월과 6월에 남성복, 2월과 9월에 여성복 컬렉션을 열었던 버버리는 앞으로는 남성복과 여성복을 통합해 연 2회(2월, 9월)만 컬렉션을 진행하고 쇼 현장에서 제품도 판매할 계획이다. 마이클 코어스도 한 번에 전체 컬렉션을 다 바꿀 수는 없지만 컬렉션당 5피스 정도를 바로 매장에서 구매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고,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와 타미 힐피거 역시 다음 시즌부터 컬렉션에 등장한 아이템 중 일부를 바로 매장에서 살 수 있도록 대량 생산할 방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래그 앤 본은 이번 시즌부터 컬렉션에서 선보인 아이템들을 바로 매장에서 판매하는 발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컬렉션 현장에서 누구라도 스마트폰의 카메라나 태블릿 PC의 카메라 혹은 디지털 카메라로 런웨이를 촬영해 즉시 자신의 소셜 미디어 채널에 업로드해서 수천, 수만의 팔로어들에게 삽시간에 영상을 전파하는 것이 지금 패션계의 현실이기에, 예전에 비해 시즌이라는 개념이 모호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으로는 정말 시즌이 사라진 컬렉션과 그래도 아직 시즌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컬렉션이 공존하는 과도기가 이어지게 될 것 같다. 적어도 올해 9월에는 내년 봄여름 시즌의 컬렉션들 속에서 가을과 겨울 컬렉션을 치르게 될 디자이너 톰 포드가 있으니 말이다.
결국 시즌 개념이 없어진다면 오랫동안 공을 들여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패션 브랜드들의 노고를 날름 훔쳐서 트렌디한 상품을 생산하는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이 제일 큰 타격을 받게 되지 않을까.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문제지만 말이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팰트로, 줄리아 로버츠, 아만다 사이프리드, 미란다 커 등 세기의 뮤즈들과 함께 작업해왔다. 현재 ‘pertwo’를 이끌며 패션 광고를 만들고 있다. 〈레드 카펫〉을 번역하고 〈패션 뮤즈〉를 펴냈으며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에 칼럼을 기고한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