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세 살 때 CF를 통해 데뷔, 남다른 ‘떡잎’을 자랑했던 고아성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2004년 어린이 드라마 ‘울라불라 블루짱’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2006년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괴물에 잡혀가는 소녀 박현서 역으로 열연, 영화 데뷔작부터 ‘천만 배우’ 반열에 올랐다. 같은 해 제27회 청룡영화상에서 역대 최연소로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다. ‘즐거운 인생’(2007), ‘라듸오 데이즈’(2008), ‘설국열차’(2013), ‘우아한 거짓말’(2014), ‘오피스’(2015), ‘더 킹’(2017),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 등 그의 필모그래피는 20대의 것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다. ‘공부의 신’(2010), ‘풍문으로 들었소’(2015), ‘자체발광 오피스’(2017), ‘라이프 온 마스’(2018) 등 드라마를 통해서도 꾸준히 존재감을 증명해왔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일까. 고아성은 지금까지 칸 영화제에 3번이나 초청받았고 특히 ‘설국열차’에선 크리스 에반스, 틸다 스윈튼, 에드 해리스 등 할리우드 유명 배우와도 어깨를 나란히 했다. 또래 배우들 가운데 단연 독보적인 커리어다.
이런 그가 ‘항거: 유관순 이야기’ 이후 1년 8개월 만에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으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입사 8년 차에 업무 능력은 베테랑이지만 늘 말단, 회사 토익반을 함께 수강하는 세 친구가 힘을 합쳐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고아성은 극 중에서 삼진전자 생산관리 3부 사원 이자영 역을 맡았다. 자영은 고졸 출신 말단 사원이자 오지랖도 넓고 정의감도 강한 인물로, 폐수 무단 방류 현장을 본 후 이를 덮으려는 회사의 부조리를 파헤쳐 나아간다. 약한 존재로 보이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주체적이고 강인한 캐릭터. 고아성이 지금까지 소화한 배역들을 고려하면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영화 개봉을 눈앞에 둔 10월 1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고아성을 마주했다. “안녕하세요”라고 밝게 인사를 건넨 고아성은 전날 방송 출연으로 목이 잠겨 목소리가 잘 안 나올지도 모른다며 개인 마이크를 꺼냈다. 알록달록한 불빛으로 반짝거리는 마이크에선 유쾌함이, “음…”이라는 고민 끝에 배어나오는 앳되지만 깊은 목소리와 조곤조곤한 말투에선 진중함이 느껴졌다.

재밌게 봤어요. 보통 제가 출연한 영화는 1~2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는데, 이번 영화는 재밌어서 좋았어요. 기대가 커요.
이 영화를 택한 이유는 뭔가요.
작년에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선보이고 나서 뿌듯함도 있었지만, 다음에는 밝고 명랑한 작품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마침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라는 제목부터 독특한 시나리오가 들어왔는데, 제가 정말 원하던 캐릭터였고 영화의 톤도 좋았어요. 또 시나리오를 끝까지 읽어보니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은 밝고 명랑한 것이 전부는 아니더라고요. 진중한 메시지와 일하는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점도 좋았어요.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꼭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요.
이번 영화는 씩씩하달까요(웃음). 관객들께서 이 영화를 유쾌하게 봐주셨으면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할 것 같아요.
본인이 자영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할 것 같으신가요.
자영은 내부고발을 위한 성격과 내면이 이미 갖춰진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혼자서는 못 했겠죠. 극 중 유나(이솜), 보람(박혜수), 토익반 친구들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친구들과 같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회 부조리나 불합리함에 목소리를 높이는 편인가요.
개인적으로 그런 행위를 하기보다는 작품으로 말하는 게 제 본분이라고 생각해요.
촬영 현장이나 일상에선 목소리를 내는 편인가요.
이번 현장에선 그랬던 것 같아요. 다른 때는 얌전하고 내성적인 편이었는데, 자영이란 역할을 하면서 오지랖도 넓어졌고요. 외향적으로 변했다는 말을 주변으로부터 많이 들었어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왜 이렇게 활달해졌냐” “사람이 바뀐 것 같다”라고 한다거나(웃음).
지금까지 맡았던 배역 중에 자신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하는 캐릭터가 있을까요.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의 윤나영과 많이 비슷한 것 같아요. 물론 연기를 위해서 캐릭터에 가미된 요소가 좀 있긴 하지만요. 주변 친구들한테 비슷하단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이번에 맡은 자영도 비슷한 것 같고요.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말했는데, 인스타그램도 올해 9월 27일에 시작했잖아요. 자신의 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즐기지 않는 편인가요.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사생활을 잘 드러내지 않다 보니 한편으론 제 팬들에 대한 은근한 죄책감이 있었어요. 그동안 너무 소통을 못 한 것 같아서요. 이젠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어요. 정말 행복해요.

회사를 상대로 맞짱을 뜨는 말단 여직원 3인방의 활약을 그린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맞아요. 3~4년 전만 해도 여성이 유의미하게 나오는 영화가 많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많아졌죠. 여성 캐릭터가 없다는 불평은 이제 못 할 것 같아요. 저는 꼭 여성이 선두에 나서서 승리하는 이야기를 원하는 것만은 아니에요. 여성이 작품 속에서 유의미하게 그려지길 원하죠.
여성이 유의미하게 그려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존재의 이유가 있는 캐릭터랄까요. 예를 들자면 영화 ‘남매의 여름밤’에서 ‘고모’요. 꼭 비중이 크거나 선두에 나서지 않더라도 영화 속에 의미 있게 녹아든 그런 역할이죠. 저는 그런 역할을 맡을 때 너무 행복해요.
시사회 때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연기했다”고 했는데요.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나요.
사실 저는 너무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한 탓에 일의 의미를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후에야 찾은 편이에요. 드라마 ‘공부의 신’을 찍을 때였는데요. 제가 맡은 ‘길풀잎’은 엄마가 술집을 운영하는 바람에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저랑 동갑인 시청자로부터 싸이월드 미니홈피 쪽지가 왔더라고요. 쪽지 내용은 “네가 맡은 역할이 지금 내 상황이랑 같아. 난 너를 보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위로를 받고 있어”였는데 그때 처음으로 ‘아, 내가 하는 일이 이런 거구나’ 느꼈어요. 그때부터 제가 하는 작품들이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느끼고 더 열심히 하죠.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영화업계가 어려웠죠.
네 맞아요. 저도 코로나 사태 이후로 준비하던 프로젝트, 영화가 두 개나 엎어졌어요. 개인적으로 참 어려웠던 시간이었어요. ‘코로나 블루’라는 말을 알겠더라고요. 얼마 전 엎어져버린 작품에 같이 출연하기로 했던 친한 여배우를 만나 이야길 했는데, 그 언니도 굉장히 힘들어하더라고요. “연기를 했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면서요. 사실 저는 연기만 본업이라 생각하지 않긴 해요. 이렇게 인터뷰를 하거나 영화 홍보를 하는 것도 본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1년에 한 번은 연기를 해서 정신을 몰두시키는 게 꼭 필요한 것 같아요. 최소 한 번쯤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돼야 해요. 뭔가 리듬이 있다고나 할까요.
코로나 시기에 홀로 일상을 보내는 노하우가 있나요.
청소나 물건 정리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TMI죠(웃음).
이번 작품은 환경 영화의 성격도 느껴져요. 화학 기업의 독성 물질 유출을 다룬 마크 러팔로 주연의 영화 ‘다크 워터스’(2020)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평소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는 편인가요.
적당히 있는 것 같아요. 환경을 위해서 외출을 자제하고 있고요. 분리배출을 잘하고 있어요(웃음). 이번에 알게 됐는데, 영화의 배경인 1995년 당시엔 분리수거를 안 했대요. 좀 놀랐어요.

저는 사실 실감이 안 나요. 제가 30대가 된다는 게 거짓말 같아요. 나이를 잊은 채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 얘길 들으니 실감이 나네요(웃음). 20대가 끝나서 슬프기보다는 기대되는 부분이 더 커요. 다양한 작품을 만날 것 같기도 하고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배우 아닌 인간 고아성으로 30대에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우주에 가고 싶어요(웃음). 예전부터 익스트림한 체험을 좋아했어요. 번지점프, 스카이다이빙, 이번엔 예능 프로그램에서 요트도 운전했고요. 이젠 우주 가는 것만 남았어요. 그리고 점점 가능성이 보여요. 톰 크루즈도 내년에 우주정거장에서 영화를 촬영한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그런 배역이 저에게 들어오진 않았지만 들어오면 무조건 할 거예요(웃음).
SF 쪽에 관심이 있는 건가요.
솔직히 별로 관심은 없어요. 관심은 없지만 해보고는 싶은 그런 거? 사리사욕이죠(웃음).
곧 30대기도 하고, 나이가 들수록 배우로서 점점 성장해가는 만큼 후배들도 많이 생기잖아요. 극 중 자영은 좋은 선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떤 선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나요.
아직 그런 생각은 못 해본 것 같아요. 다만 이번 영화에서 다양한 배우들을 만났어요. 그중 박혜수 배우에게 가장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제가 정말 지향하는 사람이었어요. 단단하면서도 겸손을 갖춘 모습이 멋있어서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후배는 경력순으로 정해지지만 존경은 별개인 것 같아요. 그래서 딱히 후배에 한정하지 않고 주변 배우들, 스태프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앞으로 어떤 역할을 더 맡아보고 싶나요.
밝은 영화를 하고 싶어요. 밝은 영화의 밝은 역할요.
특별히 밝은 역할을 원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동안 힘든 역할을 많이 했잖아요(웃음).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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