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전제 조건에는 ‘시행착오’가 있다. 일이든 사랑이든, 모든 것이 서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년의 사랑이 좋은 건 젊은 시절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과거의 상처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생채기를 낫게 하는 묘약이 될 수도 있고, 트라우마를 극복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찾기도 한다.
11월 2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막이 오르는 ‘연극열전’ 5번째 작품 ‘그와 그녀의 목요일’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이성 친구가 매주 목요일마다 자신들만의 추억이 담긴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는 독특한 설정의 로맨틱 드라마다. 마리 카르디날의 소설 ‘샤를르와 룰라의 목요일’을 모티프로 한 이 연극에서 저명한 역사학자인 ‘그’ 역에는 조재현·정웅인이, 은퇴한 국제 분쟁 전문기자인 ‘그녀’ 역에는 배종옥·정재은이 캐스팅됐다.
50대 인생의 황혼을 향해 걸어가는 정민과 연옥은 한때 뜨겁게 사랑했고 이별했다. 이들의 관계를 간단히 정의한다면 ‘결혼 빼고 다 해본’ 사이. 두 사람 사이에는 스무 살 된 딸도 있다. 과거 연옥은 정민과 헤어진 뒤 임신 사실을 알고 정민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하지만 때마침 정민의 결혼 소식을 접한다. 결국 연옥은 미혼모의 삶을 선택하고, 훗날 위암 판정을 받은 뒤 토론 상대로 정민과 다시 만난다.
이들의 대화는 비겁함, 행복, 역사 등 거창한 대화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비겁했고 행복했던 자신들의 이야기로 흐르며 과거와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이는 매번 사소한 싸움으로 번지면서 갈등으로 치닫지만 결국에는 사랑의 힘으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주게 된다.
우정의 형태 띤 사랑도 아름다워
배종옥(48)은 ‘연극열전’ 기획자인 조재현으로부터 직접 출연 제안을 받았다. 노희경 작가의 새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준비로 한창 분주할 때였지만, 중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을 기다려온 터라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다. 시놉시스를 받은 뒤에는 더욱 욕심이 났다고 한다.
“젊을 때는 사랑 그 자체에 목매지만 중년에는 이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삶의 깊이가 동반되는 것 같아요. 나이 들어서는 작품 속 정민과 연옥처럼 인생을 길게 두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게 더 좋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고 연극 분위기가 무겁고 심각하지만은 않다. 정민과 연옥 모두 자기 일에 열정적이고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라 이들이 주고받는 대사 속에는 위트와 재치, 기발함이 숨어 있다. 배종옥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는 아니다. 형식도 심플하고 젊은 사람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 자신한다”고 말했다.
배종옥은 이번 작품을 하면서 사람마다 느끼는 사랑의 모양이 다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흔히 사랑하면 상대를 소유하고, 결혼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도 우정의 형태를 띤 사랑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실제로 극 중 연옥은 그녀를 붙잡고 싶어 하는 정민에게 “여기서 죽으나 전쟁터에서 죽으나 마찬가지야. 이왕이면 일하다 죽는 게 나답지 않겠어?” 하고 말한 뒤 분쟁 국가로 떠난다. 물론 이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속된다.
“사랑의 형태를 한 가지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내 인생이 끝나는 시점에 굳이 남편 혹은 아내가 아니더라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한 명만 있다면 행복하겠죠. 각자 다름을 인정하고, 멀리 있어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게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중년의 쿨한 사랑을 연기하는 배종옥· 조재현 커플.
그렇다면 연옥은 처음부터 쿨한 사랑을 인정했던 걸까. 이 질문에 배종옥은 고개를 젓는다. 연인으로 시작해 아이까지 낳은 남자를 언제나 한 발 물러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예전에 노희경 작가가 쓴 대사 중에 ‘인간이 정말 쿨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있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스스로 그런 질문을 자주 던지게 되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봐도 누구나 100% 쿨할 순 없어요. 연옥도 정민과 연인에서 친구로 돼가는 과정 동안 끊임없이 고민을 했겠죠. ‘과연 이게 사랑일까 아닐까’ 하고요. 처음부터 정민에게 ‘난 너의 아이를 낳았지만 결혼하지 않을 거야. 난 내 일이 있고 충분히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죠.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정민과 다시 만나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렇지만 숱한 방황 속에서 결국 연옥은 해답을 찾아가요. 그게 관객들에게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고요.”
9년째 ‘마음공부’중
현재 그의 러브스토리는 일시 정지. 1994년 결혼 2년 만에 이혼해 스무 살 된 딸을 둔 배종옥은 최근에는 연애 경험이 없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과거 누군가와 만날 때도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관계를 진전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연애 패턴을 궁금해하자 그는 “무덤덤한 편”이라며 빙긋 웃었다.
“연애를 하면 여성스러워지기보다 오히려 와일드해져요. 당연히 애교는 많지 않죠(웃음). 그건 딸한테도 마찬가지예요. 애정 표현 내지 스킨십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제 마음속에 딸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 있다는 건 아이도 잘 아는 것 같아요. 사랑은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성과의 사랑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고 외로움을 외면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40대부터 해온 ‘마음공부’ 덕분에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생겼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다는 것. 마음공부는 연극, 영화, 드라마에 종사하는 작가, 배우, 감독들이 모여서 만든 ‘길벗모임’이 주관하는 정기 모임으로 인간이 고민하고 있는 마음의 문제들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해결점은 무엇인지를 토론하며 배운다고 한다.
“마음공부를 한 지 9년 정도 됐어요. 배우들은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수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한때는 저 역시 많은 흔들림이 있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마음공부를 통해 깨달은 건, 저란 사람은 이성과의 만남으로 모든 행복을 충족할 수 없다는 거예요. 사실 예전에는 봄을 많이 탔어요. 봄이 되면 마음이 설레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누구라도 만나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시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감정이 느껴질 때면 ‘지금 내가 설레는구나’ 하고 제 안의 감정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게 됐고, 또 컨트롤하게 됐어요. 그렇다고 이성으로부터 멀리 있는 건 아니에요. 만약 인연이 있어서 누군가 사랑으로 나타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지만, 그걸 찾기 위해 방황하고 싶지는 않다는 얘기죠.”
또 그는 로맨스는 이성 간의 설렘이 아니어도 소소한 일상에서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젊은 시절 갈망했던 로맨스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였던 것 같다고.
“로맨스는 뭔가 거창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어느 날 집 마당에 하얀색 국화가 피었는데 정말 예쁘더라고요. 집안일 봐주시는 분한테 ‘우리가 언제 이걸 심었어요?’ 하고 물었더니 ‘작년에 심었는데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았어요’ 하는 거예요. 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싹을 움튼 국화를 보면서 고맙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것 또한 로맨스가 아닐까 싶어요. 또 제가 원래 커피를 아주 좋아하는데, 건강상 이유로 커피 대신 핫초코를 마시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 핫초코를 한 모금 마셨는데 온몸으로 퍼지는 따뜻함과 에너지가 정말 큰 행복감을 안겨주더라고요. 어릴 때는 거창한 걸 통해서 모자란 에너지를 충족시키려고 했다면 이제는 작은 것에서도 큰 행복을 찾게 됐어요.”
1985년 데뷔 이후 지금껏 쉼 없이 연기 활동을 이어온 배종옥. 앞으로 그는 쉰다섯 살까지만 열정적으로 일한 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낯선 곳으로 떠나 1년씩 현지인처럼 살아보고 싶다고 한다. 마치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처럼 아침 산책을 즐기고 할 일 없이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보고 싶은 책과 영화를 보면서 인생을 돌이켜보고 싶다고. 그때는 배우 배종옥이 아닌 인간 배종옥과 진짜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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