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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생 사용설명서 여섯 번째 | 연애소설을 쓰다

“곁에 있을 때 더 잘 해주지 못해 미안할 뿐”

사별한 아내 향한 그리움과 회한 시로 엮은 정선용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조영철 기자

2012. 04. 17

쉽게 사랑하다 헤어지고, 밀고 당기다가 안 맞으면 확 놓아버리는 가벼운 사랑이 흔한 요즘, 이별에도 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이가 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한시를 번역해 엮은 정선용 씨가 그 주인공이다.

“곁에 있을 때 더 잘 해주지 못해 미안할 뿐”

정선용 씨는 평소 사진을 좋아했던 아내를 위해 자신이 번역한 한시와 아내의 사진을 함께 엮은 책을 펴냈다.



부부는 동갑내기다.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고전을 연구하는 학생, 아내는 영어 선생이었다. 시골 학교에 부임한 참한 여선생을 며느릿감으로 점찍은 남자의 어머니는 부랴부랴 아들에게 선 볼 것을 권했고 어머니의 성화에 읍내 다방에서 수줍게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가 싫지 않았다. 강한 끌림은 없었지만 여자는 한문을 전공한 남자가, 남자는 영어를 잘하는 여자가 왠지 멋져 보였다. 그렇게 1년 가까이 만나다가 당연한 수순인 듯 결혼을 했다.
남자는 가난한 집안 3남1녀 중 장남. 자녀 교육에 욕심이 많았던 어머니는 형제들을 모두 대학까지 보냈고, 그러는 사이 집안은 기둥뿌리가 흔들리다 못해 빚더미에 앉았다. 결혼할 때 사채를 제외한 은행 빚만 4천만원. 아내는 결혼하자 군소리 없이 처녀 적부터 부었던 적금을 시댁의 빚 갚는 데 내놓았다. 성정이 부드러운 아내는 다른 여자 같으면 잔소리를 늘어놓을 일도 대범하게 넘겼다. 결혼하고 나서는 집안일을 비롯한 모든 일이 뜻대로 잘 풀렸다.
1남1녀를 낳아 키우며 함께 사는 동안 티격태격하는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맞벌이였던 탓에 집안일과 직장 일을 병행해야 했던 부부는 종종 서로에게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자 그런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소됐다. 마흔이 넘으면서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됐고, 아이들도 심성 바르고 반듯하게 잘 자라줬다.
욕심 없는 부부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또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모두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문학과 예술 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아내는 뒤늦게 소일 삼아 사진을 배웠다. 노후엔 고향 근처에 전원주택을 짓고 그 옆에 작은 작업실도 만들어 아내는 사진을 찍고, 남편은 한시를 번역해 함께 책을 내자는 약속도 했다. 그런데 그만, 아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동호회 회원들과 경기도 화성 시화호에 출사를 나갔다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탱크로리가 덮치는 바람에 다시는 못 올 길로 떠난 것이다.

가을밤은 어쩜 이리 쓸쓸도 한가 (秋夜何寥寥) 나의 마음 슬프고도 또 슬프다오(我懷方戚戚) / 하얀 달은 휘장 사이 내려 비추고(素月間照) 찬 이슬은 잎새 가에 맺혀 있다오(寒露葉上滴) / 수심 깊어 앉은 채로 잠 못 드는데(憂人坐不眠) 풀벌레는 벽 틈에서 칙칙 운다오(草蟲鳴在壁) /떠난 당신 그리워도 볼 수 없기에(之子不可思) 외로운 밤 찬 서재서 당신 꿈 꾸오(獨夢寒齋夕)-조선시대 문장가 월곡 오원의 추소독좌(秋宵獨坐)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더 아끼고 사랑해주세요”

“곁에 있을 때 더 잘 해주지 못해 미안할 뿐”

아마추어 이상의 사진 실력을 지닌 정선용 씨의 아내는 출사를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고 이미란 씨의 사진 작품들. 1 남해 다초지에 새싹이 나온 모습. 2 정읍 산내면 구절초. 3 이천의 산수유.





위의 사연은 한국고전번역원 수석 연구위원 정선용(55) 씨와 경기도 고양시 호곡중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던 중 2011년 6월 11일 유명을 달리한 고(故) 이미란 씨 이야기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정씨는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고 한다.
“안식구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내가 뭔가 잘못해서 아내가 그런 일을 당했나’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미안하더군요. 안식구가 겪었을 가장 큰 고통은 아마 자신을 살갑게 대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이었을 겁니다. 저는 참 못난 남편이었어요. 조그마한 흠결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우리 나이 남자들이 다 그렇듯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으니까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든 것이 후회스럽지만, 그러면 뭐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데.”
정씨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새삼 그 소중함이 사무쳤다. 밤늦게까지 서재에서 번역 작업을 하고 있으면 따뜻한 차와 과일을 내주던 아내가 그리웠고, 부부 동반 모임에 갈라치면 아내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땐 부부 동반 모임에 혼자 참석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허허허. 언제 더 생각나고 그립고 그런 건 없어요. 수시로 생각나고 보고 싶죠.”
그는 아내의 빈자리를 한시를 정성스레 번역해 책으로 묶는 것으로 달랬다. 한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은 또 다른 창작이다. 원작에 알맞은 시어를 찾아내거나 조어를 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함께 1만 수 가까운 시를 우리말로 옮긴 그는 여기에 운율까지 맞췄다. 그리고 아내가 생전 찍었던 사진을 곁들였다. 그렇게 해서 ‘외로운 밤 찬 서재서 당신 그리오’라는 책이 세상에 나왔다. ‘가장 소중했던 사람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의 1편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이 지은 시들이, 2편에는 떠나간 연인 혹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마음이 담겨 있는 시들이 실려 있다. 특히 1편에 실린 도망시(悼亡詩 :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 86수에는 먼저 간 아내를 그리워하는 수백 년 전 선비들의 마음이 오롯이 묻어난다. 내외가 분명했던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처럼 많은 도망시를 남겼다는 사실 자체도 흥미롭다.
“사실은 더 많은 도망시가 있었지만, 개인 문집을 남기는 과정에서 빼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선인들은 아내의 죽음에 지나치게 슬퍼하는 남자들을 팔불출이라고 했으니까요. 실제로는 조롱의 의미보다는 아내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할 길이 없으니까 역설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겠지만요.”
아내는 세상을 떠났지만, 정씨는 아직 아내의 흔적 속에서 산다. 아내의 퇴직금 중 일부를 마지막으로 봉직했던 학교에 도서 구입 기금으로 기부하고, 함께 내기로 했던 책도 마무리 짓는 등 아직도 아내를 위해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씨에게 요즘 부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물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이 책에 실린 선인들의 시를 보고 ‘여자는 배우자가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사랑을 하는 반면 남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후에야 애달파 한다’고 하더군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있을 때 잘 해주세요. 황망한 일을 당하고 나니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후회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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