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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화제의 인물

다문화 정치인 1호 몽골 아줌마 이라 의원의 거침없는 도전

“당찬 몽골댁의 7년 한국 생활 적응기, 이주 여성·다문화 가정 돕기 위한 출사표”

글 정혜연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2010. 08. 18

몽골 출신 이라씨는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이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광역의회 의원에 당선됐다. 한나라당 경기도의원 비례대표 1번 공천을 받아 당선된 그는 “이주 여성과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한국 사회와 잘 융합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다문화 정치인 1호 몽골 아줌마 이라 의원의 거침없는 도전


세 번째 의회 출석일이었기 때문일까. 지난 7월 중순 경기도의회 본회의장에서 만난 이라 의원(33)의 표정에서 자연스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이날 제8대 경기도의회 임시회 3차 본회의에 참석, 가족여성위원회에 배정을 받았다.
“오늘 본회의가 늦게 끝날 줄 알았는데 합의가 빠르게 이뤄져 일찍 끝났어요. 앞으로 공부가 더 필요하겠지만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라 의원은 2003년 남편 엄모씨(50)와 몽골에서 결혼한 뒤 입국, 2008년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입국 전까지 그는 한국어로 간단한 인사말만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에 잘 적응하려는 강한 의지로 한국어 공부에 매달리는 한편 성남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이주 여성을 위해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부터는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결혼이민자 네트워크에서 몽골 대표로 일했다.
이라 의원은 “그때 다문화 가정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하고 앞장서서 돕는 일이 적성에 잘 맞는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는 그를 눈여겨본 성남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센터장은 지난 6·2지방선거 때 한나라당 광역의원 비례대표로 그를 추천했다. 다문화 사회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는 시기라 이라 의원은 1번으로 공천을 받았다. 그는 당선이 거의 확실시됐기 때문에 출마 전까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가족과 상의를 많이 했어요. 의원 일을 시작하면 아무래도 집안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으니 가족들이 반대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오히려 남편이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아이들도 다 컸고 자신도 힘껏 돕겠다면서요. 또 시부모님과 아이들도 적극적으로 응원해줘서 자신이 생겼죠.”

교사 꿈꾸던 몽골 여학생, 한국 남자에 끌리다
이라 의원은 어린 시절, 학급 반장과 회장을 도맡아할 정도로 학교생활에 충실한 모범생이었다. 아주 활발한 성격은 아니지만 주변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공부도 곧잘 했다. 학창시절 그의 꿈은 교사였다고 한다.
“제가 이렇게 한국에서 의원으로 일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몽골에서 평범하게 살 줄로만 알았는데 남편을 만나서 한국까지 오게 됐죠. 친한 친구의 남편이 한국인이었는데 그분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처음에는 의사소통이 안 돼서 미숙한 영어로 대화했죠(웃음). 그냥 연락만 하는 정도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남편의 자상한 모습에 끌려 본격적으로 교제를 하게 됐어요.”
이내 서로에게 깊은 감정을 갖게 된 두 사람은 결혼을 결심했고, 이라 의원의 부모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외국인인 데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편을 부모가 반길 리 없었다. 하지만 이라 의원의 마음은 확고했다고 한다.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가족 모두를 설득했어요. 1남2녀의 장녀라 독립심이 강하고 어떤 일도 잘 헤쳐왔기 때문에 부모님이 걱정하는 것쯤은 이겨낼 자신이 있었어요. 집으로 남편이 인사를 오기 전까지 걱정하시던 부모님은 막상 남편이 제게 잘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마음을 바꾸셨어요. 딸을 마음 놓고 보내도 되겠다 싶을 만큼 남편이 믿음직스러웠던 거죠.”
이라 의원이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을 때 그의 시부모는 서툰 한국어를 쓰며 가끔은 귀여운 실수도 저지르는 그를 딸처럼 따뜻하게 대해줬다고 한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국에 남편 하나 믿고 따라온 며느리가 대견하고 고마웠던 것이다.

“처음에는 반말밖에 못했어요. 시어머니께 ‘엄마, 껌 씹을래?’라고 말해서 당황하게 해드린 적도 있고, 제사 지낼 때 남녀가 따로 앉아서 밥을 먹는데 남편 옆에 가서 앉았다가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자리를 옮긴 적도 있죠. 그때마다 남편이 중간에서 조율을 잘해줘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모두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 있어요.”
이라 의원은 지금껏 남편과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한다. 결혼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남편에게 “나는 한국 사람이 아니다. 때문에 당신과 100% 다 맞을 수 없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할 테니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살자”는 이야기를 했다고. 사소한 다툼이 생길라치면 남편은 참고 한 번 더 생각하고, 이라 의원 역시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절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주 여성의 인권, 2세 교육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 필요해요”
“사실 이주 여성들은 남편만 믿고 살기 때문에 싸워도 어디 갈 데가 없어요. 그래서 보통은 화가 나더라도 일단 참고 보는 경우가 많죠. 저야 남편이 나이 차이도 있고 하니까 늘 이해하고 져주는 편이라 갈등이 없지만 다른 이주 여성은 갈등의 골이 깊어 안타까운 일을 당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럴 때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역할이 크죠.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자원봉사자들이 많아서 많은 이주 여성이 그곳을 친정처럼 느껴요.”
이라 의원은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일하며 안타까운 사례를 많이 접했다고 한다. 한국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다가 남편·시부모와 문화적·성격적인 차이를 겪으며 이혼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고. 그럴 때면 물심양면으로 돕고 싶지만 그 역시 한계를 느낀다고 한다.
“문제가 생길 경우 자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뾰족한 대책이 없으니까 대부분 한국에 남고 싶어하지만 귀화를 하지 않은 여성은 돌아갈 수밖에 없죠. 이주 여성들이 그런 갈등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제는 그들을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끌어 안으려는 좀 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문화 정치인 1호 몽골 아줌마 이라 의원의 거침없는 도전


그는 지난 7월 초 결혼한 지 8일 만에 정신질환을 앓던 남편에게 살해당한 베트남 신부의 이야기를 꺼내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동남아시아 여성과의 결혼 대부분이 아직도 결혼 알선업체를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이 같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라고. 그는 이제야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주여성의 인권보호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려는 것에 반색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고 한다.
이라 의원은 이주 여성에 대한 한국인의 시선이 과거에 비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한국에 거주하는 몽골인만 3만 명인데 여전히 일본을 제외한 많은 동아시아 여성이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라 의원은 이들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 아픔이 고스란히 대물림되고 있는 것 또한 안타깝다고.
“다문화 가정의 주부들은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고통을 겪기 시작해요. 아이가 외모가 다르다고 놀림받는 것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초등학교 수업을 따라가려면 집에서 엄마들이 준비를 잘 해줘야 하는데 대부분의 주부들은 교과서도 제대로 읽지 못하거든요. 저의 경우도 한국어는 잘 하는 편이지만 수학·과학 같은 경우 용어가 어려워 일일이 사전을 찾아서 가르쳐주다가 결국 포기했어요.”

다문화 정치인 1호 몽골 아줌마 이라 의원의 거침없는 도전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의 교육열이 워낙 높다 보니 다문화 가정 부모가 이를 좇으려 해도 경제적인 여유와 정보가 없어 자연적으로 뒤처진다는 것. 장기적으로 볼 때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올바른 교육의 기회도 잡아보지 못한 채 하층민으로 자리 잡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라 의원은 이를 경계하고 있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수업에서 너무 뒤처지고 같이 놀 친구도 없어 학원을 보냈어요. 그런데 이미 학원에서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6학년 과정까지 다 배운 거예요. 학교만 보내야 하는지, 학원까지 보내려면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지 등 고민이 되더라고요. 중·고등학생이 되면 격차가 더 벌어질 것 같아 걱정이에요. 이를 막으려면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에게 유치원·초등학교 교육부터 뒤처지지 않도록 기본기를 다잡아줘야 해요.”
이라 의원은 임기 4년 동안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겠다는 각오다. 더불어 아이들을 잘 이끌 수 있도록 그들의 부모 또한 함께 도울 생각이라고. 책임감 강하고 남을 도우려는 성정이 몸속 깊이 배어 있는 이라 의원에게 전국 각지에서 응원의 전화가 결려온다고 한다.
“성남에 살며 경기도의회 의원으로 일하게 됐는데 지방 곳곳의 이주 여성들에게 전화가 걸려왔어요. 정말 잘됐다며 앞으로 이주 여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해달라는 말을 해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데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요.”

든든한 지원군 돼준 사랑하는 가족
이라 의원은 현재 신구대학 시각정보디자인과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봉사를 하며 인터넷 카페를 만들 일이 생겼는데 규모가 점점 커지다 보니 디자인적으로 욕심이 생겼다고.
“처음에는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재미로 배우기 시작했는데 욕심이 나더라고요. 남편 회사의 인터넷 작업도 가끔 도왔는데 좀 더 전문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말했죠. 남편이 흔쾌히 가라고 지원해줘서 고마웠어요.”
이라 의원의 몽골 이름은 ‘게렐’이다. 30년 동안 이 이름으로 살다가 2년 전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이름을 ‘이라’로 바꿨다.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기억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남편과 고심 끝에 지었다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면 그의 곁에 언제나 남편이 있었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 남편의 존재는 특별할 것 같았다.
“나이 차가 크지만 어떤 때는 친구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보다 어른 같기도 해요. 저보다 오래 살았고 또 한국에서의 경험도 그만큼 오래됐으니까 여러 면에서 의지가 되죠. 남편 뿐 아니라 시부모님을 비롯해서 딸, 아들 모두 많이 도와줘요. 오늘 아침에도 나오는데 아이들이 ‘엄마 파이팅!’하고 응원해줬어요(웃음).”
요즘 이 가족의 최고 관심사는 이라 의원의 의회활동이다. 집에 들어가면 남편과 아이들은 그에게 하루 일정이 어땠냐며 물어본다고. 그는 TV뉴스를 제외하고 일반 사람들이 실제로 정치를 접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을 궁금해하는 것에 이해가 간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이라 의원은 친절히 설명하는데 모두들 이내 머리 아파한다고.
“저도 처음 본회의장에 들어갔을 때는 법정 같기도 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마냥 생소했던 기억이 나요. 이제는 얼굴을 익힌 의원도 있고 하나씩 인맥을 넓혀가려고 해요. 앞으로 4년 동안 저로 인해 한국 사회와 다문화 가정이 아름답게 융화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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