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중심에 서 있다. 어렵고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사회운동도 그를 통하면 ‘친숙한 삶의 일부’가 된다. 참여연대를 주도한 시민운동의 대부이며 ‘아름다운 재단’을 통해 ‘나눔 전도사’로 활약해온 박원순 변호사(50)가 지난 3월 말 민간 사회창안연구소인 ‘희망제작소(www. makehope.org)’를 열었다.
‘희망제작소’라는 흥미로운 이름은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꾼다”는 박 변호사의 평소 지론이 반영된 것. 애초 떠올린 이름은 ‘창안연구소’였지만, “운동은 모름지기 재밌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언어적 감각을 십분 발휘했다. 그는 “이름만큼이나 ‘희망제작소’가 추구하는 콘텐츠도 실속 있고 재밌게 채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희망제작소는 21세기형 실학운동을 펼치는 곳이라 할 수 있죠. 지금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실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작은 정책들이거든요. 18세기 조선에서 명분에 집착하던 양반들이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를 놓고 벌인 정쟁의 틈에서 실학이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미래를 체계적으로 디자인하는 것이 바로 희망제작소의 역할이라 할 수 있어요.”
시민이 제안한 ‘초기 임신부 배지 달기 캠페인’ 본격화될 예정
희망제작소의 창립선언문에는 ‘삶의 현장에 깊이 닻을 내리겠다’는 문구가 들어있다. 다양한 삶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생생한 어젠다(의제)를 발견하고, 구체적 대안을 모색해나가겠다는 것. 현재 희망제작소는 시민의 ‘사회창안 아이디어’를 접수받고 있는데, 지금껏 홈페이지에 올라온 아이디어만 해도 2백여 건에 이른다. 이렇게 나온 시민의 의견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으로 채택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제안하는 것이 희망제작소의 역할이다.
선거철이 지나 버려지는 현수막을 서울문화재단과 같은 공공기관에서 재활용, 판매해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의견이 최근 누리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초기 임신부가 임신 사실을 알리는 배지를 달아 공공장소에서 타인의 배려를 받게 하자’는 한 시민의 아이디어는 현재 정부부처에서 실행을 검토하는 단계다. 살아 숨쉬는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생활밀착형 정책을 만들겠다는 그의 구상이 조금씩 현실로 드러나는 중이다. 이는 정쟁만 일삼는 정치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듯하다.
온라인으로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외에도, 박 변호사는 5월 내내 지방을 찾아다니며 지방자치단체·시민단체 관계자, 일반시민들을 직접 만나고 있다. 그는 노동력의 노령화 현상과 부채로 고통 받는 농촌, 대형 마트의 출현으로 죽어가는 재래시장 등을 방문해 시민이 원하는 정책이 무엇인지 듣고 있다. 또 각 지역에서 진행되는 사업의 특별한 성공 사례는 다른 지역에도 널리 퍼뜨릴 생각이다.
“시민단체인 광주 남구 시니어클럽이 노인의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사업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10개 경로당과 인연을 맺은 이 클럽은, 노인들이 경로당에서 콩나물을 재배하게 한 뒤 콩나물을 팔아 얻은 수익금을 노인들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있어요. 또 시립도서관과 연계해 그 구내식당을 여성 노인들이 운영하도록 만들었고요. 건강한 노인들에게 일하는 기쁨을 선사한 시니어클럽의 활동은 전국의 많은 단체가 배울 만하다고 봐요.”
박 변호사가 희망제작소를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그는 여러 국가를 돌아보며 새로운 사회운동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갔다. 호주 및 뉴질랜드를 방문한 그는 이들 국가의 정부 부처가 지닌 ‘유동성’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관료와 법조인으로만 이뤄진 한국의 법무부와 달리, 호주와 뉴질랜드의 법무부는 법률 전문 기자, 홍콩 출신 판사 등 다양한 인적구성으로 이뤄진다는 것. 그는 이를 보며 “조직이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면 더 많은 지혜를 모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또 그는 건축가 승효상씨의 유럽 건축기행에 동행하면서 우리 사회에 문화마을을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다녔다. 도시의 확산과정에서 과거의 도축장을 새로운 생태공원으로 만든 프랑스의 라 빌레테 지역을 보며 특히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천을 개발할 때 물이 마르지 않고 생태계가 보전되도록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유럽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졸속과 난개발이 판치는 한국의 건축문화를 반성했다.
아름다운재단의 가장 큰 성과는 우리 사회에 기부문화 정착시킨 것
희망제작소 간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박원순 변호사.
지난해에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한국의 시민사회’를 주제로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하며 희망제작소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했다. 박 변호사는 “끊임없이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내 활동의 원천”이라며 기자에게 미국에서 잔뜩 스크랩해온 신문·잡지 자료를 보여줬다.
“(뉴욕타임스의 한 기사를 보여주며) 미국의 건축가들은 9·11테러 이후 그라운드 제로(뉴욕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된 지점)에 분수를 세우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연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물이 아름답게 떨어지도록 만들까 등 다양한 측면을 고민하는 거죠. 이러한 모습을 보며 하룻밤 사이에 건물 하나가 뚝딱 들어서는 한국의 풍토를 반성하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장기적인 미래를 그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어요.”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참여연대 주도)로, 나눔 운동가(아름다운재단 주도)로 끊임없이 변신한 그는 희망제작소를 만들어 또 한 번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대체 어떤 직함으로 불리길 원하느냐”는 질문에 박 변호사는 웃으며 “사회 디자이너죠”라고 답한다.
“영국의 시민단체 ‘데모스’의 관계자들이 ‘당신은 사회 기업가’라고 제게 말하더군요. 저는 고개를 저으며 ‘나는 사회 디자이너’라고 말했죠. 기업가라는 말은 좀 딱딱하잖아요.”
박 변호사가 2003년 아름다운재단을 만들며 설파해온 ‘나눔 운동’은 우리 사회에 어느덧 뿌리를 내렸다. 지난해 아름다운재단의 모금액은 1백17억원, 기증받은 재활용품을 판매해 수익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는 ‘아름다운 가게’의 지난해 매출액은 무려 64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아름다운재단의 성과는 상당한 돈을 모금한 것보다 우리 사회에 기부문화를 획기적으로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아름다운가게가 탄생한 이후 지난 3년간 7만5천 명의 사람이 7백60만 점의 물건을 내놓았고, 전국 21개 도시에 무려 50여 개 점포가 생겼다. 그 결과 박 변호사는 최근 기부문화 전문잡지인 ‘얼라이언스’에 표지인물로 소개되기도 했다.
“나누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몰랐던 일반인들에게 기부의 습관을 심어준 것이 아름다운 재단의 역할이었다고 봅니다. 주부들은 집안에서 안 입는 옷들과 헌 물건을 챙겨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고, 직장인들은 아름다운재단에 ‘월급의 1%’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거든요.”
그의 나눔 철학은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도 아름다운재단이 설립됐다. 아름다운재단은 ‘대안무역’이라고 해서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생산하는 커피를 직접 사오기도 한다. ‘아름다운 커피’를 지속적으로 구입하며 제3세계 사람들을 돕자는 취지다. 여기서 얻는 수익금은 그곳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짓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환원할 생각이다.
“나눔의 기쁨은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큽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전우익 선생이 ‘혼자서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라는 책을 썼듯이, 같이 나눠 먹고 남에게 선물하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즐겁습니까?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싼 집을 사는 데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 같아요. 집을 떠메고 저 세상 가는 사람 봤어요? 좋은 집을 사는 것보다는 자녀에게 다양한 세상을 보여주는 데 더 많은 돈을 투자했으면 합니다. 사람들의 3대 착각이 바로 ‘자신은 안 죽는다고 생각한다’ ‘죽어도 재산을 갖고 갈 수 있다고 여긴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면 잘 사는 줄 안다’예요. 자녀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면 재산 다툼만 일어날 뿐이죠. 이 세 가지 착각을 깨면 우리는 보다 성숙하고 합리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정치권의 러브콜을 수차례 받았지만, 그는 시민단체에 몸담고 있으면서 결코 옆가지로 옮아가지 않았다. “정치에 입문할 생각이 전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도 희망제작소란 당을 만들어 일종의 정치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저는 남들이 간 길을 따라가는 것보다, 새로운 길을 만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게 훨씬 재밌어요. 지금 제 위치에 더없이 만족하고요. 제가 정치권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방을 돌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박원순 변호사는 21세기 한국의 희망엔진에 시동을 걸고 있다.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사회운동을 창조한 그가 또 어떻게 우리를 놀라게 할지 자못 기대된다.
|
||||||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