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27일 국세청이 발표한 2004년 모범성실 납세자에 디자이너 앙드레김(69)이 선정됐다. 국세청에 따르면 앙드레김 의상실은 세무조사 결과 매출누락, 가공경비 계상, 위장·가공 세금계산서 수수 등이 전혀 없고, 장부를 성실하게 정리해왔다고 한다. 최근 사업연도 소득률 또한 동일업종의 2배 이상으로 매우 우수하고, 최근 3년간 체납이 전혀 없었다고.
수많은 톱스타들과 교분을 나누고, 고가의 의상을 제작하며 화려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그가 얼마나 청렴하게 살아왔는지 증명된 셈이다. 앙드레김은 지난 2000년에도 서울지방국세청장으로부터 모범납세자 표창을 받았다.
“많은 분들이 기뻐하시고, 칭찬도 많이 해주셨어요.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죠. 사실 모범납세자 표창을 받기 위해 그렇게 해온 건 아니에요. 성실하고 진실되게 살아간다는 것이 저 자신을 위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죠.”
지난 62년 서울 소공동에 살롱을 열면서 본격적인 디자이너 활동을 시작한 앙드레김은 패션계에 몸담은 지난 42년 동안 한결같이 정직과 진실됨을 신조로 삼아왔다고 한다. 그는 보여지는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가족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칠십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신인 디자이너 시절부터 패션쇼를 단순히 의상 홍보의 장이 아니라 뮤지컬이나 오페라의 하이라이트를 보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종합예술 무대로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메인 모델로 연기력이 풍부한 탤런트나 영화배우를 선호해왔다. 60년대부터 최근까지 최은희 윤정희 황신혜 김희선 배용준 장동건 등 여러 톱스타들을 무대에 올리며 한 편의 영화 같은 패션쇼를 연출해온 그가 모델을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역시 지적인 교양미와 깔끔한 자기 관리다. 퇴폐적인 분위기를 질색하는 탓에 누드모델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은 절대 그의 무대에 설 수 없다고 한다. 반면 연기자가 아닌 스포츠 스타가 그의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안정환과 이승엽 등의 경우 일찍이 가정을 꾸리고 가족들에게 헌신하는 모습 또한 자랑스럽게 생각됐다고 한다.
검소한 아들, 남편 도시락 싸주며 내조하는 며느리
올 초에 있었던 그의 아들 중도군(23)의 결혼식은 허영을 지양하는 그의 생활을 엿보게 해준다. 앙드레김은 40여 년간 디자이너로 생활하며 톱스타뿐만 아니라 많은 언론 관계자들과 교분을 쌓아왔지만 아들 중도군의 결혼 소식을 이들 중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지난 2월14일 그가 친선대사로 오래 활동해온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현승종 회장의 주례로 서울 하얏트호텔 리젠시룸에서 거행된 결혼식엔 미국·호주·핀란드·노르웨이 대사 부부 등 앙드레김과 친분이 두터웠던 주한외교사절과 신랑 신부의 친지, 가족들만이 참석했다. 여러 차례 그의 패션쇼 무대에 섰던 차인표를 비롯한 연예 관계자들도 뒤늦게 결혼 소식을 접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서운해 했을 정도. 앙드레김은 이날 축의금도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요란하고 번잡한 결혼식에 강한 거부감을 느껴온 탓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들의 결혼식만은 신성하고 엄숙하게 치르고 싶었다”는 그는 반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봐도 “작지만 성스러운 결혼식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20여 년 동안 혼자 힘으로 키워온 아들을 장가보내던 날 앙드레김은 아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의 선물을 안겨줬다. 연세대 졸업생들로 이뤄진 12인조 합창단이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생명의 양식’과 구노의 ‘아베마리아’ 등 앙드레김이 직접 고른 5곡의 축가를 부르고, 중도군의 어린 시절과 신랑 신부가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등이 담긴 영상물을 공개한 것.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를 배경으로 한 영상물을 보며 아들과 아버지는 끝내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익히 알려진 대로 중도군은 82년, 앙드레김이 40대 중반의 나이에 입양한 유일한 가족. 앙드레김이 “아들에게는 ‘유명해지지 않을 권리’가 있다”며 중도군의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보호해온 터라 사람들이 기억하는 중도군은 10여 년 전 아버지가 만들어준 세일러복을 입고 패션쇼 리셉션이나 콘서트, 오페라 등 각종 공연장에 모습을 드러냈던 어린 시절의 모습뿐이다. 그런 중도군이 어느새 20대 청년으로 자라 결혼식을 올린 것. 중도군은 앙드레김 의상실에서 일하는 연상의 디자이너 유은숙씨와 4년여의 교제 끝에 결혼했다.
“처음엔 두 사람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반대를 했지만 워낙 진지하게 교제를 하기에 결혼을 허락했어요. 결혼을 허락한 뒤에는 함께 식사도 하고, 눈 축제가 열리는 일본 삿포로로 여행도 갔어요. 물론 결혼 전이니까 방은 따로 썼고요(웃음). 두 사람의 분위기가 참 잘 맞아요. 예의도 바르고 생각도 깊이가 있고요.”
앙드레김은 교제 4년 만에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에게 “진실되게 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참아주는 아름다운 미덕을 갖고 되도록 사소한 말다툼도 하지 말라는 당부도 했다고. 같은 아파트 바로 옆동이지만 분가를 시킨 것은 두 사람이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도록 한 그의 배려다. 앙드레김은 아들 내외가 어리지만 모범적으로 결혼생활을 이끌어가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우리 중도가 굉장히 진지하고, 낭비를 안 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도 가보고 하라고 했더니 ‘그런 데 취미 없어요’ 하더라고요. 데이트를 4년간이나 하면서도 생일 같은 때 함께 저녁 먹고, ‘디스코텍’에 가서 춤추고 오라고 해도 싫다고 해요. 둘 다 그래요. 외식하고, 영화 보고 하는 정도더라고요. 둘 다 생각하는 게 깔끔하고 품위 있으면서도 검소해요.”
앙드레김은 며느리의 속 깊은 마음 씀씀이와 깔끔한 요리 솜씨를 자랑하며 흐뭇해 하기도 했다.
“중도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도시락을 싸줬거든요. 근데 지금은 대학에 다니니까 그럴 일이 없는데 얼마 전 중도에게 전화를 해서 ‘점심에 뭘 먹었냐’고 물었더니 ‘오늘은 도시락 먹었어요’ 하는 거예요. 도시락을 누가 싸줬냐고 물었더니 ‘미스 유’(앙드레김은 오랫동안 입에 익은 탓인지 며느리 유은숙씨를 ‘미스 유’라고 부른 뒤 금세 입을 가렸다)가 싸줬다고 하더라고요. 그 뒤로도 매일 도시락을 싸준대요. 반찬도 매일 바꿔가면서요(웃음). 결혼하기 전에 (며느리에게) ‘어떤 음식 잘하냐’고 물었을 때 ‘전 잘 못해요’ 그랬는데 굉장히 잘하더라고요. 두 사람이 아기자기하게 요리도 자주 하는 모양이에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들이 이성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부에 열중하고, 대학교에 가면 얼마든지 데이트를 해도 좋다. 너의 몸과 너의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무엇을 해도 좋다”고 얘기한 아버지의 말을 수긍하고 대학에 입학한 뒤에야 이성 교제를 시작한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와 연인이 되고, 결국 부부로 맺어진 것은 분명 아버지에 대한 배려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0여 년간 아버지의 섬세하고 정교한 사랑을 독차지해온 아들이기에 아버지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것 같다”고 하자 그는 “그랬을지도 모르죠” 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패션쇼에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었던 앙드레김은 60년대부터 최은희, 윤정희, 이영애, 김희선 등 톱스타들을 메인 모델로 내세웠다.
“처음엔 어리다는 이유로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며느리의) 진지하고 착한 성품이 마음에 들었어요. 더욱이 내가 모르는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결혼하는 것보다 나와 항상 같이 있어 그 성품을 잘 아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고 하니까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저 역시 우리 중도가 저를 위해 생각해준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근데 워낙 둘이 사랑하고 좋아해요. 저 때문에 중도가 희생을 하면 안 되잖아요.”
“천 년 후에 자랑스러운 한국의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싶어요”
아들 이야기를 할 때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조심스러워진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배려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동요하는 것 같다.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아들이기에 지금껏 그렇게 사랑을 쏟아 부었음에도 그는 아들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곧 돌아오는 그의 예순아홉 번째 생일(음력 8월24일)은 며느리가 생겼으니 이제까지와 다르지 않겠냐고 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너무 쑥스럽다”고 말한다.
“우리 아들 생일은 잘 챙겨주려고 하지만 제 생일을 챙기는 건 쑥스러워요. 모르고 지나가면 좋아요. 저는 생일을 음력으로 따지니까 외국 여행하면서 그냥 지나치는 게 가장 좋아요. 이번 생일에도 함께 식사하는 정도로 간단히 해야죠. 회갑이며 칠순을 챙기는 것도 너무 쑥스러워요. (그냥 지나가도) 하나도 섭섭하지 않아요.”
현재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있는 중도군은 대학원에 진학해 경영학을 공부할 계획이라고 한다. 앙드레김은 “초등학교 때는 우주 과학자가 되겠다고 하던 아들이 고등학교 때는 법조인이 되고 싶다고 하고, 대입을 앞두고는 프랑스어를 하고 싶다며 불어과에 진학했다”며 “앞으로도 후계자로 키우기보다 아들이 원하는 대로 개성을 살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수십 년간 ‘민간외교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한국을 알리기 위해 나라 안팎으로 노력하고, 여러 차례 자선 패션쇼를 여는 등 나누는 삶을 실천해온 앙드레김.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의 공적을 치하하기는커녕 때로 그의 독특한 말투와 패션 스타일을 희화화하거나 우스갯소리의 소재로 활용해왔다. 그러나 앙드레김은 괴롭고 실망스러운 일에 부딪힐수록 더욱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 되도록 빨리 잊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디자이너 생활을 40년 넘게 하며 가장 보람됐던 일과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괴롭고 실망스러웠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괴롭고 실망스러웠던 순간은 빨리 잊으려고 해요. 디자이너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어떠한 실망스러운 일이 있어도 일을 놓지 않고 열심히 하다보니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잘 떠오르지 않아요. 하지만 이집트 카이로와 스페인 바르셀로나, 얼마 전에 있었던 중국 인민대회당 패션쇼 등 해외에서 관중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할 때의 기쁨과 감동은 절대 잊을 수 없죠.”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일에 대한 열정이 조금도 줄지 않은 앙드레김은 일에 몰두하는 것이야 말로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내년이면 칠순을 맞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패션쇼 무대를 활보하며 모델들을 챙기고, 음악을 직접 고르는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그는 건강 비결이 바로 일에 몰두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일을 즐긴다. 오히려 공휴일이나 명절과 같이 의상실이 문을 닫는 날 소화가 잘 안 되고 마음도 울적해진다고. 그때마다 앙드레김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교외로 나가 자연의 경치를 감상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돌아온다고 한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아이디어로 매번 수많은 관중을 감동시키는 앙드레김. 그는 패션쇼 무대와 미술 전시회를 열 수 있는 전시관, 그리고 작은 박물관 등을 갖춘 앙드레김 문화센터를 갖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간절한 꿈은 먼 훗날 후세들에게 자랑스러운 한국인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1백 년, 5백 년, 1천 년 후에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20세기와 21세기를 거쳐오면서 외국을 모방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패션을 예술로 승화시켜서 세계인을 감동시킨 역사적인 디자이너로 남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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