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9일 일요일 한낮, 국민들은 ‘대통령과 일선 검사의 대화’라는 사상 초유의 프로그램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젊은 검사들은 사법개혁과 관련해 자신들의 의견과 불만을 위험수위를 넘나들며 거침없이 쏟아냈고, 노무현 대통령은 한 검사의 말처럼 ‘토론의 달인’답게 날카롭게 받아쳤다. 그 불꽃 튀는 논쟁 가운데 이번 검찰파동의 주인공인 강금실(46) 법무장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검찰 내 서열을 파괴시킨 40대의 변호사 출신, 게다가 여성이라는 조건은 취임 이전부터 일찌감치 검찰 내 반발이 예상됐다. 강장관의 내정 소식이 알려진 이후 열흘 가까이 음해성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검찰의 집단 반발 정서가 언론을 장식했다. 50년 관행으로 굳어진 검찰의 서열주의, 기수 존중 풍토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같은 통과의례에 대해 강장관은 “장관직을 맡기로 결심하고 대비하는 과정에서 그만한 반발은 예측하고 있어서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라고 했다. 토론회에서도 그는 “나는 정치권 출신도, 외부 인사도 아닌데 ‘점령군’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라며 필요한 대목마다 차분하게 할 말을 했다. 결국 토론회는 아버지에게 대드는 아들, 학번과 학벌을 들이대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인간들, 제 것은 안 주면서 남의 것 빼앗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검사스럽다’는 신조어를 남긴 채 일선 검사의 패배로 끝났다.
이후 검찰개혁은 급물살을 탔다. 새 검찰 총수로 송광수 전 대구 고검장이 내정된 데 이어 검사장급 이상 검찰 고위간부 인사가 진행됐다. 또한 국가보안법 적용 범위, 호주제 폐지와 소수인권을 위한 법안 마련 등 제도개혁의 움직임이 뒤따르고 있다.
첫 여성 법무장관이다 보니 에피소드도 다양하다. 장관의 휴대전화를 바로 받지 못한 검찰국장이 전화에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누구십니까?”하고 물었다가 “저, 장관입니다”라는 대답에 당황하기도 하고, 어느 공보관은 한 여기자와 통화한 뒤 바로 이어 강장관의 전화를 받고는 “또 뭐가 궁금해서 전화했냐”고 반말조로 얘기를 했다가 “강금실인데요”라는 대답에 혼비백산하기도 했다고. 또한 전임자들과 달리 취임 후 모든 직원들에게 높임말과 부탁하는 어법을 사용하는 것도 호응을 얻고 있다.
그는 멋쟁이다. 세미 정장에 귀고리, 브로치 등으로 포인트를 주는데 대부분 신선하다는 반응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3개쯤 붙어다닌다. 서울지역 최초 여성 형사단독 판사와 여성 최초 법무법인 대표, 그리고 최초의 여성 출신 민변(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부회장이 그것. 이는 여성으로서 남성 중심의 제도권과 투쟁해 얻은 훈장 같은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평가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이력 이면에는 예사롭지 않은 인생사가 담겨 있다. 출생에서부터 현대사의 격랑과 뒤틀린 현실이 반영돼 있는 것. 제주 농림학교 교감이던 그의 아버지는 제주 4·3사건의 여파에 휘말리며 구속됐다. 부산과 대구로 옮겨가며 옥살이를 했고, 어머니는 옥바라지를 위해 자식들을 끌고 형무소 부근을 떠돌아야만 했다. 결국 아버지는 무죄판결을 받고 1년여 만에 풀려났지만, 이미 집안 형편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궁핍했다. 그는 그 무렵 경주에서 6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그는 총명한 아이로 자라났다. 경기여고 다닐 때는 동기생 가운데 유일하게 3년 연속 우등상을 받는 학생이었고, 아침조회 때는 전교생 앞에서 애국가나 교가를 지휘하는 등 지도력을 발휘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여고 동기생들은 “공부는 물론 모든 면에서 탁월한 신화적 존재였다”며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그를 기억할 것”이라고 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여고를 졸업하고 75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한 그는 동아리 ‘가면극연구회’에 들어가 탈춤도 배우고, 이른바 ‘학습’이라는 것을 시작하며 유신 치하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키워가게 된다.
하지만 기울어진 가세를 세우는 것도 그에겐 중요했다. 졸업 후 고시공부에 전념했고, 드디어 81년 사시23회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도 7등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강금실 법무부장관은 카리스마적이라기보다는 합리적이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법조계 동료, 선후배들의 평가처럼 판사 시절 그는 진보적인 판결을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5·6공화국 때는 형사단독 판사로 재직하며 집시법 위반으로 검거된 대학생들의 구속영장을 잇따라 기각하거나 무죄 석방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 복학생으로 있었던 유시민 개혁정당 전 대표는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집시법 위반으로 잡혀갔던 후배들이 예상외로 쉽게 풀려나곤 했다. 그 뒤엔 강금실 판사가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는 또 93년에는 사법부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판사 회의’ 설립에 적극 가담, 당시 김덕주 대법원장에게 ‘사법개혁 건의서’를 전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96년 5월 서울고법판사를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난 강장관은 개업하자마자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99년 9월 민혁당 사건 변호인을 맡은 데 이어 11월에는 납북 귀환어부 함주명씨를 고문한 혐의로 이근안 전 경감에 대한 고발을 주도하는 등 정열적인 활동을 펼쳤다.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와 관련한 음란물 제조사건, 이영자 지방흡입 사건 등도 그가 맡았던 사건. 2000년 4월에는 법무법인 ‘지평’을 설립, 대표에 올라 2년여 만에 업계 10위의 중견 로펌으로 키워냈고, 그해 5월엔 여성으로선 최초로 민변 부회장에 선임됐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아시아 차세대 지도자 18인’에 한국 대표로 선정된 그는 취임 당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철의 여인’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혼 15년 만에 남편 김태경씨와 이혼해 현재 언니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것. 자녀는 없다. 그는 최근 본지의 자매지인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세간에 떠돌던 남편에 대한 소문과 ‘위장 이혼설’에 대한 진상을 비교적 소상하게 밝혔다.
“지난 79년 광화문에 있는 사회과학서점인 ‘민중문화사’ 주인의 소개로 남편을 처음 만났어요. 남편은 서울대 미학과 74학번으로 이미 학내시위로 구속과 제적을 한 차례 겪은 정통 운동권 출신이었죠. 4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어요.”
하지만 88년 그가 부산지법 판사로 재직할 당시 ‘이론과 실천’이라는 사회과학출판사를 운영하던 남편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출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결혼생활의 첫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판사의 신분으로 남편을 뒷바라지한 일화는 유명하다. 책이 출간된 지 일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당시 법원은 영장담당 판사를 두 차례 바꾸는 등 남편의 구속을 강행했고, 그는 구속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장문의 의견서를 검찰에 제출했던 것. 현직 판사로서 법원을 상대로 ‘시비’를 걸어 눈길을 끌었다.
진보적이며 합리적인 평가를 받는 강금실 법무부장관. 국민들은 그에게 진정한 사법개혁을 기대하고 있다.
강장관은 임명되기에 앞서 이혼 문제로 집중적인 인사검증을 받았다. 전 남편의 부채 때문에 위장 이혼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서적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남편의 출판사가 부도를 냈어요. 96년에 변호사로 개업한 것도 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고, 확실한 보증을 요구하는 채권자들의 요구에 밀려 제가 남편의 빚을 모두 떠안게 됐어요.”
상황이 계속 악화되자 두 사람은 결국 3년전 합의 이혼을 했다. 강장관은 ‘더 이상 빚을 떠맡지 않기 위해서’였고, 남편은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결혼 15년 만의 일이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부채를 피하기 위한 위장이혼’이라고 공격했지만 청와대 조사 결과 강장관은 아직도 남편의 빚을 갚으며 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남편도 힘이 들었겠지만…. 심지어 파산신청을 할까 고민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혼 이후 두 사람은 지금도 친구처럼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는 강장관의 전 남편을 만나기 위해 그가 운영하는 출판사를 찾았다. 부도 이후 한동안 책 출간이 뜸하고, 수차례 이사를 했기 때문에 연락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사장님은 현재 유럽 도서박람회에 나가 계세요. 원래 3월말부터 시작하지만 최근 기자들이 한두 분 찾아오니까 서둘러 나가신 겁니다. 한달 반 정도의 일정이고, 이후에도 인터뷰는 일절 안하겠다는 말씀만 남기셨어요.”
가장 오래 재직했다는 직원에 따르면 강장관의 입각 소식을 접한 김사장은 “검찰 조직이 만만치 않을 텐데…. 어려운 때 들어가 걱정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사장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진 저희도 전 부인이 강장관님인 줄 전혀 몰랐죠. 교류가 잦지는 않아도 나쁜 감정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은 것 같아요.”
부도가 나 망했다는 보도와는 달리 출판사는 그간 간헐적으로나마 책을 내고 있었다고. 철학과 미학, 예술 장르의 책을 주로 출간하는데, 요즘은 어느 정도 안정세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이혼경력이 그의 법무부장관 취임을 반대하는 데 정략적으로 이용됐다면 국민들의 지지는 강장관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장관 취임을 전후로 생긴 그의 팬 사이트만도 10여개. 인기를 반영하듯 언론에서도 그의 파격적인 행보와 패션 감각에 대해 연일 보도하고 있다.
강장관은 사회적 발언을 할 때는 대단히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이나, 내면세계는 여리고 예술적 감성과 낭만적 기질이 풍부하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다. 피아노를 잘 치고, 가곡을 즐겨 부르는 노래 솜씨는 좌중을 압도한다고. 틈틈이 써놓은 시는 출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질과 양을 담보하며 그림 솜씨도 뛰어나다. 특히 우리 전통춤을 좋아해, 진주 교방춤의 대가 김수악 선생으로부터는 살풀이를 전수받았는데, “판사고 변호사고 다 때려치우고, 나하고 같이 춤이나 추자”고 권유받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장관은 취임 초반의 혼란을 잠재우고 사법개혁의 줄기를 잡아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명분에서 검찰의 불만을 압도하고 있는 것. 장관 임명 직후 한 일간지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81%가 잘된 인사라고 답한 것은 그에게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그가 검찰 개혁을 통해 사랑받는 사법부를 만들지, 즐비하게 늘어선 역대 남성 장관들의 사진 옆에 최초의 여성 장관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그칠지 국민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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