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 딸 브루크가 하버드를 졸업하는 날 명예학사학위를 받았다.
90년 9월4일은 그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을 만큼 최악의 날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러니까 아이들의 아침 등교를 챙길 때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한 행복감으로 흥분돼 있었다. 그날은 아이들의 개학날이었고, 특히 둘째딸 브루크가 중학생이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나도 엄마와 아내라는 자리 외에, 그동안 꿈꿔왔던 교사로서 첫발을 떼는 날이었다. 하지만 하교길 브루크의 교통사고 소식은 모든 것을 일순간에 바꾸어놓았다.
“두개골이 파손된 것 같습니다. 왼쪽 다리가 부러졌고, 오른쪽 무릎 관절이 탈구된 상태입니다. 팔도 부러졌고요. 그리고 한쪽 어깨가 탈골됐어요. 또 사고 당시에 혀의 앞부분을 깨물었습니다. 이런 사실들로 미뤄볼 때 약간의 뇌 손상과 척수 손상이 우려됩니다.”
의사의 진단은 딸아이의 죽음을 통보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브루크는 깨어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브루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36시간 동안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딸아이를 보면서 무너지는 가슴을 추스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니, 그 사실 앞에서 난 더 좌절했고 절망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브루크가 눈을 떴다. 우리는 그 아이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브루크는 교통사고로 인해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됐다. 평생 휠체어와 인공 호흡기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남은 일생을 내 둘째딸에게 고스란히 바치기로 결심했다. 브루크의 손과 발이 되어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로.
1년 동안 브루크는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다니며 수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그동안 브루크는 파시뮤어 밸브라는 일종의 인공 호흡 장치를 달게 돼, 정확하진 않지만 말도 할 수 있게 됐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브루크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 사고 1년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브루크를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브루크가 일반 중고등학교에서 일반 학생들과 어울리기를 희망했던 우리는 법정투쟁을 거쳐 브루크를 일반 중학교로 진학시켰다.
사실 브루크에게 학과 공부는 벅찬 과정이었다. 어려서부터 똑똑하다는 칭찬을 듣던 딸이지만 장애인이 된 후에는 공부하는 데 남보다 몇 곱절의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수학 문제를 하나 풀려고 해도, 자신의 머리로 암산을 한 후 나에게 받아적게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글짓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으로 먼저 생각한 후 나를 통해서 받아적기를 하도록 해야 했다. 주위 도움이 없으면 혼자서 책장을 넘길 수도 없고, 책장 넘기기가 쉽지 않은 만큼 앞장의 내용을 모조리 외운 후에야 뒷장을 넘겼다. 다행히 몇년이 지난 후에는 음성인식 자동응답장치가 내장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받아쓰기에 대한 부담은 조금 덜 수 있게 되었다.
브루크가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우리는 대대적인 집수리를 했다. 2층이던 집 구조를 바꿔 1층에 브루크가 이동하기 편리하도록 커다란 방과 목욕 시설, 출입문을 따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 어려움도 컸다. 그동안 빚 없이 사는 것으로도 만족했던 우리 가족은 브루크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하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빚을 져야만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를 잃고, 정서적으로 메말라가면서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것은 브루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언젠가 브루크의 일기장에서 이 글을 본 적이 있다.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결코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든 것이 다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우리의 태도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 자신이 긍정적인 인간이 될 것인지 부정적인 인간이 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희망적으로 볼 수도 있고 절망적으로 볼 수도 있다.”
숨쉬는 것조차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13세 어린아이가 그 어렵고 힘든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그런 아이 앞에서 우리가 먼저 절망하다니 말이 되는가. 우리 부부는 브루크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찾을 수 있었다. 서로 돕고 의지하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값진 삶이라는 사실을.
브루크가 하버드대에 진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보였다. 우선 집에서 너무 멀었다. 브루크를 위한 의약품이며 의료 장비, 책, 옷가지 등을 나르는 것은 이사 못지않게 큰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브루크가 집과 가까운 거리의 대학에 진학하길 원했다. 하지만 브루크는 하버드대에 원서를 넣었다. 아니, 하버드대에서 먼저 브루크에게 원서를 보내왔다. 미국 전체 고등학생 중 상위 20위에 속한 브루크는 하버드대에 입학할 자격이 충분했던 것이다.
브루크는 하버드에 무리없이 합격했다. 하버드대에서는 브루크를 위해 특별 기숙사를 제공했다. 휠체어가 다니기 쉽도록 출입구를 다시 만들고, 브루크와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할 나를 위해 작은 방과 목욕탕이 딸린 기숙사까지 배정해주었다. 브루크는 고등학교 시절과는 달리 대학에서 적극적으로 교우 관계를 넓혀갔다. 그리고 딸아이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휠체어에 누워 있기 때문에 달리 할 일이 없어서”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나는 딸이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스무살을 넘긴 딸이 외로움을 잊기 위해 더욱 공부에 매달린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전신마비 딸과 24시간을 함께 하며 뒷바라지한 눈물겨운 모성애
딸과 나는 24시간을 함께 지낸다. 혹시 잘못되어 문이 잠길까 봐 나는 목욕탕 문을 열어둔 채 샤워하고, 침대에 누우면 귀 바로 옆에 룸모니터를 두고 딸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을 잔다. 누군가는 내 행동을 가리켜 ‘희생’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만약 내 스스로 희생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면, 난 벌써 화병이 나서 쓰러졌거나 중도에서 포기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그저 브루크를 통해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4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브루크는 하버드대 최우수 성적자로 졸업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졸업생 대표로 졸업 연설문을 낭독했고 그 사실은 <뉴스 타임스> 1면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누군가 나에게 브루크가 이룬 성과를 무엇에 비유하겠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의 두발이 묶이고 두손을 등 뒤로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1분마다 13회씩 호흡을 시켜주는 기계를 달고 있고, 샤워를 하고 싶을 때나 이를 닦고 싶을 때 욕실을 사용할 수 없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제손으로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가려운 곳을 긁을 수도 없으며, 울어야 할 때 눈물을 닦을 수도 없다. 결코 어떤 종류의 프라이버시도 없고, 간절히 원하지만 누군가를 껴안을 수도 없다. 게다가 혼자서 책장을 넘길 수도 없는데 강의, 세미나, 졸업 논문을 제때 제출해야 하고, 그것을 교수 앞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말처럼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브루크는 졸업 논문 주제로 ‘희망’을 택했다. 딸의 논문 주제처럼 그녀를 지탱하고 힘을 주는 것은 바로 ‘희망’이다. 그리고 이 희망은 나의 인생을 구제하기도 했다.”
나는 딸과 한몸이나 마찬가지다. 딸을 통해 희망을 보았고, 배웠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누군가에게 기적을 선물하기 위함임을 알았다. 비록 내 딸의 불행한 사고로 이 사실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적’과 ‘희망’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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