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해 총장은 전교생 5천여명의 이름을 줄줄이 외운다.
경북 북부권에서 유일한 4년제 사립대학인 동양대학교 최성해 총장(49). 그는 참 남다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소탈함과 자신의 철학대로 사는 사람만의 여유로움, 거기다 붓으로 그리고, 쇠를 잘라 기술을 배우는 일보다 무슨 생각을 담을까 사고하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습득한 정보에 따르면 그는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학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총장, 학생식당에서 식사하는 총장, 일일이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결재 받는 총장, 그리고 컴퓨터 특성화 대학에서 전통 예절교육 강좌를 졸업 필수과목으로 채택한 별난 교육방침’ 등등. 총장이라는 권위의 벽을 무너뜨리며 스스로를 낮추는 그를 처음 대하면서 교직원이나 학생들까지도 당황해했다는 이야기는 단지 인기에 편승해 여기저기서 부풀려진 것으로만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신선하고 파격적인 것이었다.
소수서원의 선비정신 이어받고 싶어 풍기에 학교 설립
중앙고속도로 풍기 톨게이트로 나가 드넓게 펼쳐진 도로를 따라 10여분 정도 달리다 보면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동양대학교를 만나게 된다. 위세 당당한 소백산과 죽령의 힘찬 정기를 감싸안으며 시원스레 펼쳐진 캠퍼스는 군더더기 하나없이 말끔히 정돈된 모습이다. 초겨울 바람이 머쓱할 만큼 캠퍼스 곳곳에는 신맛 돌게 푸르른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대학건물 하나하나에도 ‘사임당관(여학생기숙사)’ ‘장영실관’ ‘장인관’ 등 제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해 고유 이름들을 붙여놓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특히 캠퍼스에 들어서면서부터 만나게 되는 ‘선비양성교육기관’이라는 푯말은 ‘컴퓨터 특성화대학에서 웬 선비양성?’이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지만, 조근조근 맛깔스레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수많은 편견과 의구심 덩어리들이 이내 봄햇살에 눈 녹듯 스러지고 만다.
지난 94년 개교,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간직한 동양대학교. 하지만 최성해 총장이 그동안 일군 성과는 수도권 대학, 아니 세계 여러 나라의 유수대학 부럽지 않다. IMF 체제 이후 98년부터 매년 85~91%의 순수 취업률을 보이는가 하면 최근 3년 연속 교육개혁 우수대학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 94년 개교 당시부터 강의실과 기숙사에 초고속인터넷망을 설치, 학생 1인당 PC 1대를 보급해 국내 최초 컴퓨터 특성화 대학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전체 학생 중 수도권 출신이 40%를 차지하고 있고, 제주도 등 타지역에서도 유학생이 몰려들고 있을 정도다.
동양대학교의 교육이념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선비정신’이다.
“동양대학교를 이곳 풍기에다 설립한 것은 아버님의 뜻이었습니다. 처음 4년제 대학 설립계획을 밝히셨을 때 다들 반신반의하며 대구 등의 대도시에 설립할 것을 권유했죠. 그러나 평생 교육에 몸담은 분이기에 결코 소신을 굽히지 않으셨는데, 당시 아버님께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학인 풍기 소수서원의 선비정신 학풍을 계승하고자 하는 것이었죠.”
선비는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문화 바탕 위에서 꼿꼿이 학문을 닦는 신지식인으로, 이들의 정신을 물려받겠다는 의도가 동양대학교의 창학이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올바른 인성교육만이 날로 삭막해지는 사회를 정화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하는 최성해 총장. 그래서 그는 교수들에게도 매주 전공 8시간 외에 학생들과 사제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인성교육의 장을 만들도록 하고 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폭언이나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면 어김없이 벌점을 받게 되고, ‘사회봉사와 예절’을 필수과목으로 채택해 70점을 넘지 못하면 졸업도 불가능하다. 재학생의 30% 정도가 생활하고 있는 기숙사 이름도 그래서 ‘인성교육원’이다.
“처음 이 제도를 도입했을 땐 거의 모든 학생들이 감점 투성이었죠. 여기저기서 볼멘소리도 터져 나오고…. 그런데 4년 동안의 인성교육이 몸에 배서 그런지 우리 대학 학생들을 사원으로 채용한 많은 기업들의 한결같은 칭찬이 바로 인사성이 밝다는 것과 컴퓨터를 능수능란하게 잘 다룬다는 것입니다. 실력만큼이나 바른 마음가짐이 취업률과도 직결됨을 몸으로 체득하기에 요즘엔 학생들 스스로 후배들을 지도하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인성교육이다, 선비교육이다 해서 원리원칙과 정도만을 고집할 것 같은 그이지만 캠퍼스에서는 더없이 친근하고 자상한 아버지로 통한다. 일단 신입생이 들어오면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신입생 명단을 챙기는 일. 일일이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운다. 5천여명에 이르는 전교생의 이름과 학과를 개교 때부터 지금까지 다 외우고 있을 정도니 졸업생들로부터 걸려오는 안부전화 받기에도 매일 시간이 모자라 언제나 아쉽기만 하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저마다 가슴에 품고 사는 스승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최성해 총장 역시 그의 인생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스승으로 주저없이 그의 아버지와 11년간의 미국생활을 꼽는다. 동양대학교 설립자이자 이사장인 최현우옹(76). 사범학교를 졸업한 최현우옹은 영주와 인근에 있는 봉화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첫발을 내디디며 교육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유복자로 태어나 누구보다 힘든 세월을 이겨내온 아버지이기에 삶에 대한 애착만큼이나 공부에 대한 미련도 컸다. 박봉이라 대학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 평생 소원이 대학 문턱을 한번 밟아보는 것이니만큼 일단 대학이라는 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라도 한번 할 겸 몇날 며칠을 걷고 또 걸어 대구에 있는 국립대학 법학과의 시험을 치렀다.
동양대학교는 98년 이후 85~91%의 순수 취업률을 자랑한다.
함께 법학을 공부하던 친구들이 모두 법조계 진출을 꿈꿀 때 아버지 최현우옹은 학교경영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남몰래 학교설립의 꿈을 키웠다. 예나 지금이나 기술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국가까지도 살찌울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 결국 아버지는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경북공고’라는 기술학교를 만들었는가 하면, 오랜 교육 노하우를 통해 영주에도 경북전문대를 설립했다. 경북전문대는 올해로 어느덧 3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영주지역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버지가 걸어온 모든 길들이 자신에게 인생의 큰 나침반이 되어준다고 말하는 최총장. 그는 어머니의 고향이 이곳 영주인 덕택에 방학 때가 되면 어김없이 시골로 내려와 자연에서 뒹굴며 또다른 세상을 배우곤 했다. 자연과 호흡하며, 때로 자연을 다스릴 줄도 아는 사람이 훗날 큰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아버지의 교육철학 때문인지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함을 내재한 그의 모습 역시 넉넉한 대자연의 품성과 꼭 닮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대학 총장으로서 그의 이력 또한 만만치 않다. 아버지와 더불어 그에게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준 미국에서의 11년 생활. 경영학 공부를 위해 대학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건너가 강산이 한번 변하고도 남음직한 세월동안 그는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그가 말하는 독특한 이력 즉, 경영학 공부에서 심리경영, 철학, 신학, 교육학을 두루 섭렵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학문을 향한 끝없는 욕구와 고민의 흔적들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처음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일입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 4명이 한 조가 되어 필라델피아에 있는 어느 백화점으로 소비형태 조사를 위한 리서치를 나가게 되었는데, 저를 제외하곤 모두 백인 친구들이었죠. 그런데 백화점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인 친구들의 리서치에 응할 뿐 저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더군요.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죠.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홀대받는 현실이 서럽다 못해 오기까지 생기게 되더라고요.”
몇날 며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실력만으로 인종차별을 극복할 수도 없는 일. 당시 그가 내린 결론은 이론적인 학문 영역으로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직접 그들과 부딪히며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실천만이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는 법. 그날로 즉시 학교에다 휴학계를 내고 장사를 시작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그것도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온 동양인이 학교까지 휴학하고 장사를 시작한다는 것이 그곳 사람들에게 낯선 일임에 틀림없었다.
우선 별다른 기술 없이 가장 손쉽게 장사할 수 있는 품목으로 잡화상을 선택했다. 도매상을 선정하는 데서도 시장조사를 통해 맨해튼까지 건너가 그곳 상점 주인들에게 가장 인심 좋고 깨끗한 거래를 자랑하는 도매상 주인을 찾아내 첫거래를 부탁했다. 제 아무리 낯선 이국땅이라 할지라도 상도의 예를 지켜가며 양심적으로 장사를 하는 이를 마다할 사람은 없는 법. 2년여를 장사에만 매달렸다. 노력 덕분에 제법 많은 돈을 모으기까지 했다.
“돈도 돈이려니와 장사를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뭐니뭐니해도 인간적인 우애관계였죠. 흑인이든, 백인이든, 동양인이든 그 누구와도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그들로 하여금 인종차별과 편견을 훌훌 털어버리도록 만든 것이 가장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최총장은 지역 오케스트라단 단장을 맡아 지역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마저 부족한 아이들을 무작정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부모님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사실 언어라는 것은 그 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조기교육이다 뭐다 해서 일찍부터 외국으로 보내진 아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낯설고 험한 외국 문화에 길들여져 자기 정체성마저 잃기 십상이죠.”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최총장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바로 아이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일깨워주는 일이었다. 현관 입구에다 태극기를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들어오고 나갈 때는 꼭 두번씩 경례를 하는 한편, 아이들이 집에서 영어를 쓸 때면 이유를 불문하고 벌을 세우기까지 했다. 또 속옷과 양말은 꼭 한국에서 보내온 것으로 입히고 아이들에게 꾸지람을 할 때만큼은 목공소에다 미리 주문해 만들어놓은 회초리를 들곤 했다. 미국 유학중이지만 팝이나 대중가요보다 우리나라의 트로트가 훨씬 한국적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은 큰아들은 공부가 끝나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와 군복무를 할 계획이다.
가정에서의 자녀 교육방법이 학교에서도 첨단기술교육과 인성교육의 조화라는 방식으로 그대로 투영되는 최총장의 교육철학. 그는 교육뿐만 아니라 지역문화에 대해서도 애착이 크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영주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영주소백팝스오케스트라단’. 최총장이 단장을 맡고 있는 이 오케스트라의 단원은 모두 24명. 쉽게 생각하기에 지역 대학의 총장이 단장직을 맡고 있고, 팝스오케스트라라는 거창한 이름만으로 혹여 ‘넥타이부대가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실은 음악을 사랑하는 지역민들이 모여 구성한 영주 유일의 오케스트라단이다.
단원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최성해 총장을 비롯해 음악학원 원장, 떡방앗간 주인, 교사, 당구클럽 주인 등인데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고향 영주와 음악에 대한 사랑이다. 명색이 오케스트라단이지만 월급도 없다. 공연 때마다 영주시민들이 보내주는 열렬한 함성만이 힘을 실어줄 뿐이다. 지역민과 함께 호흡해야 대학도 발전한다고 말하는 최성해 총장. 그래서 오케스트라단에 대한 그의 애정은 더욱 각별하다.
‘온고이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가 ‘오래된 일을 품에 품고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한 말에서 온 것으로, 옛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앞서나갈 수 있다는 의미다. 바로 이 ‘온고이지신’의 의미를 가장 적절히 아로새기는 이가 동양대학교의 최성해 총장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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