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최고 여배우 김고은의 사랑법
두 아웃사이더의 우정 이야기를 다룬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도 그의 연기가 백미다. 자신의 젊음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번민하는 ‘재희’는 분명 기시감이 느껴지지만 김고은이 걸쳐 입으며 다채로운 인물이 됐다. 영화 자체가 만들어지는 데도 김고은의 공이 컸다. 이언희 감독은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 중 첫 단편소설을 보고 영화화를 계획했지만 제작과 예산 문제, 동성애자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남자 배우 섭외로 난항을 겪었다. 김고은은 2년 6개월 동안 ‘대도시의 사랑법’ 제작이 확정되기를 기다렸고, 10월 극장에 걸릴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개봉을 앞둔 9월의 마지막 날, 김고은은 다소 들떠 보였다. 그는 “평가가 좋아서 감개무량했고 개봉이 되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며 “시사회 뒤풀이 때 모두가 기분이 좋았는데 그 자체가 보람찼다”고 말했다. 시사회 당시에도 “흥행이 간절하다”고 말한 덕택이었을까. 입소문을 탄 영화는 개봉 3주 차에도 뒷심을 발휘하고 있다.
”유연함이 생기기까지 고군분투“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흥수’와 ‘재희’를 연기한 배우 노상현과 김고은.
대본을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후루룩 읽혔고요. 제작이 안 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는데 다행이죠. 저는 그래도 마냥 기다린 게 아니라 다른 촬영을 중간중간 했기 때문에 감독님과 제작진이 고생을 많이 했죠.
어떤 점 때문에 대본에 매료됐나요.
재희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되바라진 부분도 있죠. 20대 초반 그런 신념을 갖고 있다가 커가며 사회와 완전히 타협하는 시기도 겪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방향을 찾아가죠. 그런 게 너무 우리네 삶 같달까. 어릴 때는 누구나 내가 맞는 것 같고 어른들이 한마디 하면 ‘역시 어른들은 나를 몰라’ 이렇게 생각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옛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김고은의 20대는 어땠나요.
저도 저만의 신념이 있었어요. 혼자 생각도 많이 해보고 남들에게 이야기도 해봤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왜 다른 걸 틀리다고 하지?’ 생각하며 속으로 억울해하기도 하고요. 누구에게나 20대는 그런 시기가 아닐까 싶어요. 가장 불완전하고 세상에 던져진 것 같은 시기요. 이 방향이 맞을까, 저 방향이 맞을까 고군분투하고 그러면서 유연함이 생기는 거죠. 그런 과정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해요.
재희처럼 놀기도 했나요.
저는 재희처럼 놀지는 못했어요. 소개팅·미팅도 안 해봤고요. 모범적이었죠(웃음). 할머니와 함께 살기도 했고 겁이 많아서 클럽도 잘 못 갔고요. 클럽에 다니는 사람들은 많이 봤어요. 20대 때 강남역 근처에 살았는데 아침 7시에 학교 가려고 집에서 나가면 클럽에서 막판까지 놀았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죠. 영화를 찍으며 그때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시절 인기가 많았다던데요.
인기와 클럽 가는 건 별개니까요(웃음).
영화 속 재희의 의상과 관련된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고 하던데요.
저는 인물을 상상할 때 이미지가 먼저 그려져요. 특히 재희는 스타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자칫 노출이 있는 의상을 좋아한다거나 패션에 관심이 많다는 식으로 단순화되기 쉬운 캐릭터니까요. 저는 자유분방한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언밸런스한 의상을 매치한다거나 인물의 태도로 그걸 보여주고 싶었죠. 셔츠를 입어도 여미지 않고, 반바지를 입어도 아무 데나 걸터앉을 수 있는 태도 같은 거죠. 그런 스타일을 찾아보고 레퍼런스가 될 만한 걸 제안했어요. 의상 감독님이 정말 다양한 의상을 갖고 오셨는데 그걸 놓고 함께 토의하기도 했고요.
영화 속 재희는 사랑으로 공허함을 채웁니다. 재희의 사랑법을 어떻게 봤나요.
그게 좀 아쉬워요(웃음). 남자 보는 눈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사실 재희는 겉으로 세보이지만 자존감이 낮은 친구고 그걸 연애로 포장하려고 하죠.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만 보고 여러 남자를 만나요. 그래서 성격도, 인성도, 외모도 다 스타일이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는 거고요.
김고은의 사랑법이 있나요.
저는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에요. 오래 봐야 하고요. 그리고 재희랑 다른 점은, 저는 상대방과 함께 있을 때 저다울 수 있는 사람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장난도 잘 칠 수 있어야 하고 편할 때 나오는 본연의 모습을 낼 수 있어야 관계에서 진전이 있는 것 같아요.
“생각 비우려 촬영 전 단순 게임을 하기도”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재희’ 캐릭터를 연기한 김고은.
“흥수에게 하는 말이지만 재희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했어요. 스스로 수도 없이 했던 말이니까 흥수에게 해줄 수 있었던 거죠. 재희가 처음 흥수와 친해진 것도 날이 선 모습을 보고 자신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죠.”
스무 살, 이렇게 친구가 된 둘은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부딪히고, 부서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김고은과 호흡을 맞춘 흥수 역할은 시리즈 ‘파친코’에 출연한 배우 노상현이 맡았다.
‘재희’의 믹스 매치 패션에 김고은의 아이디어가 들어가 있다.
제대로 웨딩드레스를 입은 게 촬영하며 처음이었는데, 저는 결혼을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이게 또 시상식 드레스와는 다르더라고요. 그럼에도 즐겁게 촬영했습니다. 재희와 흥수의 히스토리가 이 장면에 함축돼 있고 흥수가 뚝딱뚝딱 춤추는 게 너무 재밌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 장면에 흥수의 내레이션이 들어오잖아요. 재희에게 “내 20대의 외장하드”라고 하는 말, 그 내레이션 때문에 무척 울었어요.
노상현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상현 씨가 낯을 꽤 가리는 편인 것 같던데.
생각보다 빨리 친해졌어요. 촬영 전에 술자리도 많이 가졌고 답사 겸 클럽도 같이 갔고요. 상현 씨가 저를 좀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우리는 서로 춤추는 걸 본 사인데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말해줬어요(웃음).
현장이 즐거웠을 것 같습니다.
재밌었어요. 제가 출연한 영화 중엔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찍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찍어야 할 신은 많았어요. 지금은 편집이 돼서 2시간 분량의 영화가 됐지만 더 많은 신을 찍었거든요.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대본에 나와 있는 걸 다 해보자고 의기투합했어요. 예전에 독립영화 찍을 때처럼 서로 동지애를 느끼며 찍었던 것 같아요.
재희와 흥수가 크게 충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워낙에 상현 씨가 치열하게 많이 고민하는 스타일이에요. 그 신을 찍기 전에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고, 상현 씨가 그 장면이 너무 감정 신처럼만 보여서는 안 된다고 제안했어요. 너무 진지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거죠. 저도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 재희와 흥수는 진지하지만 관객은 웃을 수 있도록 상상하며 찍었던 것 같아요.
연기 선배인 고은 씨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나요.
자기는 촬영 전에 생각이 너무 많아진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생각이 없어 보이나 봐요(웃음). 그래서 “원래 하기 전에는 생각을 비우는 거다” “생각은 집에서 해오는 거다”라고 해줬죠. 저는 실제로 생각을 없애려고 해요. 그래서 촬영장에서 단순한 게임을 하기도 하고요.
별로 긴장을 안 하는 편인가요.
저도 초반엔 긴장을 많이 하죠. 첫 촬영 전날엔 자는 걸 포기해요. 시험대에 오르는 기분이거든요. 그런 불안이 초반에는 유지되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관객들이 재희를 어떻게 봐주길 바라나요.
재희를 언뜻 보면 친해졌을 때 피곤할 것 같은 사람이죠. 하지만 영화에 재희의 이면이 나오듯이 여리고 순수한 친구예요. 다만 시행착오를 겪을 뿐이죠. 그런 재희를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재희가 어떤 면에선 부럽기도 해요. 흥수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온전한 전부를 터놓을 수 있는 관계가 있을까 생각해봐요.
김고은은 2012년 데뷔 이후 착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위는 영화 ‘파묘’에서 연기한 ‘화림’, 아래는 ‘유미의 세포들’에서 연기한 ‘유미’.
사진제공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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