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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희망의 메시지

한국 찾은 요시모토 바나나 상처 입은 이들에게 손 내밀다

글 이설 기자 사진 홍중식 기자

2010. 01. 19

작가라면 문단의 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문학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은 당연하다. 하지만 요시모토 바나나는 점수보다 독자와의 공감에 가치를 둔다. “지치고 힘든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문학”이라고 말하는 그를 만났다.

한국 찾은 요시모토 바나나  상처 입은 이들에게 손 내밀다


요시모토 바나나(46)는 국내에 잘 알려진 일본 작가 중 하나다. 90년대 후반부터 ‘도마뱀’ ‘키친’ ‘하치의 마지막 연인’ 등 내놓는 작품마다 인기를 끌며 ‘여자 하루키’라는 별명을 얻었다. 바나나는 국적과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 이끌려 지은 예명. 그가 소설 ‘데이지의 인생’ 한국어 번역 출간을 맞아 우리나라를 찾았다. 지난해 신작 ‘선인장’ 출간을 기념해 방한한 뒤 1년 만이다.
소설은 25세 여주인공 데이지가 어린 시절 얻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렸다. 데이지는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의 끔찍한 교통사고를 목격한다. 이후 그 트라우마로 어떠한 위태로움에도 동요하지 않는 소녀로 성장한다. 그러던 중 제멋대로인 친구 달리아를 만나며 진한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달리아는 외국으로 떠나고 데이지는 날마다 원인 모를 악몽에 시달린다. 꿈속의 불길함은 달리아의 죽음으로 현실화되지만, 데이지는 “죽음은 누구나 겪는 일이며, 어머니와 친구에겐 그 시간이 조금 빨리 왔을 뿐”이라고 담담히 스스로를 위로한다. 작가는 “부모가 죽는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하는 것처럼 인생에서 무서운 경험을 한 사람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2000년에 출간된 작품이에요. ‘삶과 죽음보다 좋은 사람들과의 추억이 가치 있다. 그러니 주변의 죽음에 그리 슬퍼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겼죠. 당시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었어요. 10년이 지났지만 일본과 한국 모두 그때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데이지의 인생’이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관통하는 한국 독자에게 작은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잔혹동화 같은 소설 쓰기를 즐긴다. 환상적인 잔혹함을 치유와 성장의 메시지로 귀결시키는 게 작품의 특징이다. ‘데이지의 인생’에도 목이 꺾여 죽음을 맞는 사건이나 등골이 오싹한 꿈 등 섬뜩한 에피소드가 녹아 있다. 그는 “건강한 삶 이면에는 어두운 세계가 있다. 이번 소설에서는 답답하고 불길한 감정을 꿈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데이지의 생활은 겉보기에 건강하고 건전해요. 성실하게 역할을 다하며 신세 지는 이모 부부와도 관계가 좋죠. 하지만 내면에는 어린 시절 나쁜 기억으로 인한 상처가 깃들어 있어요. 현실 아래 침잠해 있는 그런 어두운 면을 꿈으로 담아냈죠. 제 소설이 그리는 잔혹함은 독자를 환상의 세계로 이끄는 장치입니다.”
소설을 쓰던 당시 작가는 35세 싱글이었다. 지금은 일곱 살 난 아들을 두고 있다. 역할과 환경에 따라 세상을 보는 작가의 시각도 달라졌다. 그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지금 이 소설을 썼다면 좀 더 부드럽게 표현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데이지의 인생’을 쓸 당시에는 굉장히 자유로웠어요. 소설에서 그린 것처럼 개인적으로 잔혹한 일도 많이 겪었죠. 지금은 생활과 사고가 많이 달라졌어요. 연로한 부모님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둘 줄어가고, 커가는 아이는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죠. 그 양쪽을 바라보며 일상의 소중함과 인생의 감회를 진하게 느껴요. 소설도 차분하고 따듯해지는 것 같고요.”

“기질 섬세한 독자들이 내 소설에서 ‘씻김’을 느꼈으면 해요”

한국 찾은 요시모토 바나나  상처 입은 이들에게 손 내밀다


그의 문학은 ‘구원의 문학’으로 불린다. 작품을 쓸 때마다 ‘상처 치유’를 염두에 둔다. 그는 소설의 치유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 그 역시 숱한 상처를 책을 통해 어루만지고 봉합했다. 사실 치유의 문학을 시작한 것도 스스로의 상처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음에 상처를 가진 사람이 내가 쓴 소설이라는 하나의 세계에서 ‘씻김’의 기분을 느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예술적 관점에서는 절망 속에 독자를 가두는 것이 더 높게 평가받을지 몰라요. 하지만 저는 그런 길을 포기했어요. 어려움을 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죠. 지쳐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보면서도 못 본 체 하는 내면의 상흔을 밖으로 꺼내고 싶습니다.”
그의 작품은 국적과 상관없이 젊은 여성에게 특히 인기가 있다. 섬세한 감수성을 감각적인 문체로 그려내서다. 작가 역시 이런 독자층의 특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특정한 약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듣는 것처럼 내 소설은 섬세하고 민감한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제 소설은 국적과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민감한 감수성을 가진 이들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과 잘 교제하지 못하거나 평범한 이들이 하는 일을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 소설을 읽었으면 해요. 작품에 사회적 소수자가 종종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책에는 일러스트레이터 나라 요시모토의 그림 15점이 수록됐다. 그는 고집스러운 표정의 여자아이 캐릭터로 유명하다. 귀여움과 오싹한 느낌이 공존하는 그의 그림은 데이지의 캐릭터에 영감을 줬다. 두 사람은 일본 월간지에 소설을 연재하던 당시 공동으로 글과 그림을 진행했다.
바나나는 한국 음식광이기도 하다. 예전에 살던 집주인이 한국인이어서 자연스럽게 한국 음식을 접했다. 딱히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있다기보다 가리는 게 없을 정도로 모든 음식을 소화한다. 사실 이번 한국 방문 목적도 원래는 가족과 한국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간장게장·삼계탕·숯불갈비 등 음식 목록까지 만들어왔다고.
“한국 음식을 너무 좋아해 도착 직후부터 계속 가고 있어요. 일본에서도 일주일에 두 번은 한국식당을 찾죠. 최근에 몰두하는 메뉴는 순두부찌개예요. 앞으로는 음식뿐 아니라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도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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