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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수술받고 전국 사격대회 ‘금메달’ 따낸 주부선수 부순희

■ 기획·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 글·김순희(여성동아 리포터) ■ 사진·정경택 기자

2002. 10. 08

가녀린 체구의 부순희 선수는 암과 싸워 당당히 이겼다. 지난 3월 중순, 위암 판정을 받고 눈앞이 캄캄했던 부선수.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3분의 2가량의 위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마친 지 4개월 만에 육참총장 사격대회에 출전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큰 아픔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그를 만났다.

위암수술받고 전국 사격대회 ‘금메달’ 따낸 주부선수 부순희
몸이 몹시 피곤했다. 운동 탓으로 돌리기에는 몸이 너무 말을 듣지 않았다. 지난해 말부터 소화가 잘 안 되는가 싶더니 속이 거북한 날들이 계속됐다. 자리에 눕고만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사격의 여왕’ 부순희 선수(34, 우리은행)는 자신의 몸 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는 줄도 모르고 지름 10cm의 표적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위궤양을 앓은 경험이 있어서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아 위내시경 검사를 하곤 했거든요. 연말에 검사를 받았을 때 별이상이 없었는데 계속 배가 아프더라고요. 위암 판정을 받은 것은 지난 3월 중순쯤이었어요. 위암 초기라는 진단을 받고 나니 눈앞이 캄캄하더라고요. 그때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죠. 그래도 위암이어서 다행이다 싶었어요. 요즘에 위암은 초기에 발견만 하면 괜찮다고들 하잖아요. 사실은 저보다도 남편이 더 큰 충격을 받았어요.”
괜찮을 것이라고 속으로 수없이 되뇌이면서도 내심 마음 한구석이 묵직했던 건 가족력 때문이었다. 2000년 10월과 12월 시어머니와 친언니 부신희씨를 암으로 잃은 충격이 되살아났다.
“친정어머니도 6년 전 위암 수술을 받았어요. 지금까지 별탈 없이 잘 살고 계셔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지만,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암 판정을 받고 평상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무엇보다도, 13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 여섯살, 열세살 두 아들을 남겨두고 다시는 오지 못할 길을 떠난 언니의 모습이 떠올라 괴롭고 힘들었어요.”
그에게 있어 언니 부신희씨(전 국민은행 사격부 소속)는 언니이기 이전에 부선수를 사격의 길로 이끈 대선배였다. 그런 언니를 떠나보낸 충격에서 헤어날 때쯤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부선수보다 더 충격을 받은 건 친정어머니였다.
“큰딸을 가슴에 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른 자식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아들 동규가 학교에 가는 모습을 며칠 지켜보지도 못하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 참 마음이 아팠어요. 동규는 엄마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줄로만 알고 있었죠. 아이가 상처를 받을까 봐 암에 걸렸다는 건 말하지 않았어요.”
4월 초순, 위장의 3분의 2를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고 퇴원하던 날 부선수는 ‘이제는 괜찮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지극 정성으로 병간호를 해준 남편을 꼭 끌어안았다. 약속이나 한 듯 두사람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주여상 2학년 때 사격선수가 된 후 처음으로 부선수는 석달 동안 권총을 놓았다. 퇴원 후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는 하루 빨리 권총을 쥐고 싶어 남편에게 슬며시 “연습을 해야겠다”고 말을 건네봤지만 “안 된다”는 답만 돌아왔다.
“남편은 운동보다도 제 건강이 우선이라면서 쉬라고만 했어요. 그런데 몸이 회복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올해 큰 경기(부산 아시안게임)가 있는데 아파서 출전 기회도 놓치고 말았거든요. 그게 아쉽기도 해서 5월말에 사격연맹협회장기(비공식)대회가 열렸는데 남편에게 ‘나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출전했어요. 퇴원한 이후로 연습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출전해서 그런지 좋은 성적을 내진 못했는데 신문에 제가 출전했다는 기사가 실려 출전한 사실이 들통났어요(웃음). 남편이 화를 내진 않았지만 ‘정말로 출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대회에 출전했던 건 큰 아픔을 딛고 일어선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연습을 제대로 하진 못했지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아프다고 위축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작용했다.

위암수술받고 전국 사격대회 ‘금메달’ 따낸 주부선수 부순희

2000년, 폐암으로 돌아가신 시어머니와 함께 한 모습.

“위암 수술을 받았다고 해서 축 늘어져서 살고 싶지는 않았어요. 몸도 많이 가벼워졌고 차라리 하고 싶은 운동을 하는 게 정신건강에도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지난 8월31일 부선수는 수술 이후 첫 공식대회에 출전했다. 육군참모총장기 전국사격대회에서 여자권총 25m 일반부에 출전한 그는 본선에서 5백70점(6백점 만점)으로 개인전 결선에 오르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네명의 점수를 합산한 단체전에서는 우승했다.
부선수가 투병생활을 할 때 가족 못지않게 도와준 사람은 다름 아닌 김영미 감독(41). 한일은행 시절, 함께 사격선수로 활약하며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던 김감독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때로는 언니처럼 사격선수의 선배로서 부선수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김감독의 사랑을 잊지 못한다. 김감독의 친정어머니도 수시로 김치를 담가주고 아들 동규도 손주처럼 보살펴주는 등 부선수를 딸처럼 대한다고. 부선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김감독은 이번 대회의 출전여부도 부선수의 결정에 맡겼다.
“감독님은 결정권을 저에게 넘겼지만 남편이 이번 대회에 나가는 것도 말렸어요. 그래도 끝까지 나가겠다고 했더니 총알이 과녁을 빗나가도 인상 찡그리지 말고 성적이 안 좋아도 웃을 자신이 있으면 출전하라고 하더라고요.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것이었죠. 평소에도 남편은 제가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큰힘이 되었고 격려해줬거든요. 아플 때도 남편의 사랑이 가장 큰 약이었어요. 비록 단체전 우승이지만 남다른 의미가 있는 대회였어요.”
부순희씨는 87년 국가대표선수에 발탁된 이후 88서울올림픽 대표선수로 선발된 직후 모 군부대 사격단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향해 연습에 열중하던 중 자신의 훈련을 돕던 방위병과 사랑에 빠졌다. 데이트 신청을 먼저 했던 건 부선수였다. “시간 있으면 영화나 함께 보러 가실래요?”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부선수의 제의는 과녁을 빗나가고 말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5년 동안의 긴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태릉선수촌 사격장에서 연습을 할 때 남편은 선수들의 점수를 채점하고, 기계를 조작하는 등 허드렛일을 맡아서 해줬는데 느낌이 참 좋았어요. 뭐랄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포근했다고나 할까요. 남편은 호남형에 유머감각이 풍부해 늘 웃게 만들곤 했거든요. 92년 올림픽 대회에 출전하게 되면 그 이듬해 결혼하자고 했죠. 성적이 좋지 않아 (올림픽 대회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는데 92년 그냥 결혼하게 됐어요.”
이후 부선수는 99년 세계 최고수들이 참가하는 월드컵 파이널 25m에서 우승했다. 지난해 10월 전국체전에서는 같은 종목 비공인 세계신기록(결선합계 6백96.3점)도 세웠다. 그러나 올림픽 메달은 번번이 부선수를 비껴 지나갔다.
“오는 10월에 다시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해요. 지금은 아무 이상이 없어요. 약도 안 먹어도 되고 밥 먹는 데도 문제가 없어요. 그렇지만 라면이나 커피는 안 된대요. 김치는 먹을 수 있는데….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수술 후 6개월이 흐른 시점에서 다시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와야 안심할 수 있어요. 그러면 그때는 체력훈련도 본격적으로 하려고 해요. 내년에 성적이 나오는 것을 봐서 2004년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어요. 제 사격 인생에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걸고 올림픽 메달을 향해 달려가고 싶거든요. 사격은 저에게 단순한 운동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제 생활의 한 부분이자 동반자이기도 합니다.”
암이라는 ‘단단한’ 표적을 뚫은 부순희 선수. 그의 얼굴 위로 맑은 가을햇살이 ‘올림픽 메달의 꿈은 이루어진다’고 속삭이며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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