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K-팝은 ‘K’가 무색할 만큼 영어로 된 가사를 전략적으로 사용해왔다. 해외 팬 공략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에도 영어 가사가 유리한 면이 있다. 특히 ‘핫 100’ 차트의 경우 미국 라디오 방송 횟수가 중요하다. 스트리밍과 판매량 성적은 K-팝 팬덤의 화력으로 어느 정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비영어권 아티스트와 노래에 보수적인 라디오는 팬들의 노력만으로는 뚫기 힘든 영역이다. 국내 라디오 방송에서 팝송이 아닌 일본 곡, 중국 곡 등을 듣기 어려운 이유와 같다. BTS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BTS: 더 리턴’에도 멤버들이 한글 가사보다 영어 가사 비중이 높은 것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큐멘터리에서 김현정 빅히트 뮤직 VP는 “진정성도 중요하지만 앨범이 글로벌하려면 영어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어와 한글 비중이 역전된 경우는 비단 BTS뿐만이 아니다. 아예 영어로만 된 곡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블랙핑크가 올 2월 발매한 미니 3집 앨범은 타이틀곡 ‘GO’를 비롯해 수록곡 3곡이 영어로만 돼 있다. 블랙핑크 노래는 2019년을 기점으로 영어 가사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했다. 르세라핌이 최근 내놓은 정규 2집 앨범의 타이틀곡 ‘BOOMPALA’는 14주간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 1위를 차지한 ‘Macarena’를 샘플링한 곡인데, 전부 영어 가사로 이뤄져 있다.

톡톡 튀는 한글 가사를 많이 쓰는 악뮤와 코르티스, 보넥도(왼쪽부터). 특히 코르티스는 소프트웨어 기업 ‘한글과컴퓨터’와 함께 한컴타자 ‘산성비’ 게임을 통해 신보 수록곡 가사를 최초 공개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한글 가사로 재미와 감동 다잡은 보넥도·코르티스
오랜 K-팝 팬으로서 느끼는 영어 가사의 장단점은 명확하다. 각종 해외 차트 성적은 둘째치고, 한글과 영어를 잘 섞으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더걸스의 ‘Tell me’처럼 리듬감 살린 재미있는 곡이 탄생한다. 반면 영어 비중이 너무 높거나 아예 영어로만 이뤄진 곡이면 아무래도 가사가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고 따라 부르기도 쉽지 않다.그런데 최근 K-팝 신에 반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요즘 ‘읽는’ 맛, ‘듣는’ 맛 나는 한글 가사 곡들이 제법 눈에 띈다. 최근의 싱어송라이터 한로로 신드롬 중심에도 건국대 국문과 출신의 한로로가 직접 쓴 다정한 한글 가사가 있다. 한로로는 5월 발매한 엔믹스의 미니 5집 앨범 타이틀곡 ‘Heavy Serenade’ 가사도 썼는데, 멤버들은 “가사에서 꽃향기가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부르는 사람이 감정 이입이 되면 당연히 듣는 사람에게도 더 잘 전달되기 마련이다. 최근 데뷔 10주년을 맞아 미니 앨범 ‘I.O.I : LOOP’로 돌아온 아이오아이는 원래 타이틀곡이 아니었던 ‘갑자기’를 고민 끝에 최종 선택했다. ‘갑자기’는 멤버 전소미가 작사에 참여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감정을 잘 살렸다. 특히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라는 직관적인 후렴구는 프로야구 두산베어스의 양의지 선수 응원가로 개사되며 ‘자려고 누웠는데 양의지’라는 야구 밈을 낳고 야구팬들까지 사로잡았다.

한국적 문화 코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재는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개막식에서 한글 가사가 든 주제가 ‘DNA’를 불렀다.
요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코르티스의 경우는 한글 가사들로 곡을 채우지만 그 맛이 약간 다르다. 5월 발매한 새 앨범 ‘GREENGREEN’의 타이틀곡 ‘REDRED’에는 ‘팔랑귀 팔랑귀 (that’s red-red)/눈치나 살피기 (that’s red-red)/도가니 사리기 (that’s red-red)/넘어가 울타리 green green/궁뎅이 가리기 (that’s red-red)/주변을 살피기 (that’s red-red)/쿨한 척 척하기 (that’s red-red)’라는 날것의 후렴구가 나온다. 경계해야 할 부분은 레드, 추구해야 할 부분은 그린으로 표현했다. 데뷔 때부터 자신들을 ‘영 크리에이터 크루’로 칭하며 결국 ‘영크크(젊고 힙한 집단)’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킨 코르티스다운 한글 가사다. 해외의 영크크들 역시 ‘팔랑귀’와 ‘도가니’ ‘궁뎅이’ 같은 낯선 단어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REDRED’는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빌보드 200’ 3위에 올랐고, 코르티스의 스포티파이 월간 청취자 수는 1200만 명을 돌파했다.
한글 가사 써야 그래미상 받는다?
결국 한글 가사가 글로벌 팬덤을 넓히는 데 장벽이 된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이 불 당시 사운드트랙 주제곡 ‘Golden’의 한글 가사 ‘어두워진, 앞길 속에’ ‘영원히 깨질 수 없는’을 제대로 부르기 위해 해외 팬들은 다양한 노력을 펼쳤다. 세계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Reddit)에 한국어 초보자를 위한 로마자 표기 가이드가 제작되어 올라오는가 하면, 아예 한국어 공부를 제대로 시작한 사람도 늘었다. 언어 학습 애플리케이션 듀오링고(Duolingo)의 경우 지난해 1년 동안 미국에서 한국어 학습자가 22% 증가했다고 한다. 한국어가 힙한 이미지를 얻으며 최근에는 팔로어 515만 명을 보유한 미국 유튜버 트리샤 페이타스가 100% 한글 가사로 이뤄진 K-팝 노래를 발표하는 일도 있었다.무엇보다 그래미 어워즈가 내년도 시상식부터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을 도입한다. K-팝, J-팝, C-팝을 포함하되 이에 국한하지 않고 아시아 시장에서 유래하거나 널리 알려진 음악 가운데 하나 이상의 아시아 언어를 의미 있게 사용한 작품의 예술적 우수성을 심사해 가창 및 연주 아티스트에게 수여할 예정. 이번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 신설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K-팝을 포함한 아시안 팝을 본상 경쟁에서 아예 격리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으나, 주류 반열에 오른 K-팝에 대한 인정임은 확실하다. 특히 ‘의미 있는’ 수준으로 아시아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영어 중심 앨범만이 세계 진출의 길이라 생각했던 기획사들이 다양한 전략을 세울 가능성이 생긴다. 일단 내년 시상식을 위한 출품 기한은 지난해 8월 31일부터 올해 8월 28일까지다. 예심을 거쳐 후보 발표는 오는 11월 26일에 이뤄진다. 가사 듣는 맛이 있던 노래들은 과연 그래미 어워즈에서도 그 맛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보넥도 #코르티스 #그래미 #여성동아
사진출처 코르티스 이재 악뮤 보넥도 인스타그램 한글과컴퓨터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