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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가상인간은 어디로 갔을까

이경배 교수

2025. 01. 13

팬데믹 시기 메타버스 붐을 타고 ‘가상인간’은 광고계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브랜드 이미지와 꼭 맞게 외형과 세계관을 제작할 수 있고 사생활 이슈도 없어서 연예인들을 대체할 것이란 기대감까지 피어올랐다. 하지만 기업들이 앞다퉈 내놓았던 가상인간은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가상인간 열풍이 순식간에 움츠러든 까닭은 무엇일까.

국내 최초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는 인스타그램 구독자 약 19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최초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는 인스타그램 구독자 약 19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비대면이 일상화되면서 가상의 3차원 공간을 컴퓨터나 스마트폰 안에 만든 메타버스(가상세계) 시대가 급부상했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과 같은 기술로 현실 세계가 급격히 발전한 영향이다. 여기에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기술 등은 메타버스가 구현되는 기반을 견고히 만들었다.

가상세계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가상인간’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가상인간은 실존 인물이 아닌 컴퓨터그래픽스(CG)와 AI를 결합해 만들어진 존재를 말한다. 사이버 가수 아담 등 가상인간과 유사한 개념의 디지털 아바타는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최근 등장한 가상인간은 한발 더 나아갔다. 이들은 AI와 빅데이터, IoT 기술을 바탕으로 모션 캡처, 애니메이션 생성, 모델링, 그래픽 기술 등을 적용해 사람 얼굴의 작은 표정이나 주름까지도 상황에 맞게 실시간으로 표현한다. 또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신체의 자연스러운 동작이나 옷감까지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생성형 AI를 적용해 사람과 대화는 물론 농담까지도 가능하다. 장기적으로 사람의 지식이나 추론 수준을 능가하는 인공일반지능(AGI)이 구현된다면 단순히 사람의 역할을 대행하는 수준을 넘어 하나의 명확한 캐릭터를 갖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감이 모였다.

연예인 vs 가상인간

크래프톤 ‘위니’ (왼쪽), 롯데홈쇼핑 ‘루시’ 등은 최근 활동을 중단했다.

크래프톤 ‘위니’ (왼쪽), 롯데홈쇼핑 ‘루시’ 등은 최근 활동을 중단했다.

가상인간은 인간처럼 보이고 행동하는 디지털 캐릭터를 넘어 사람과 상호 작용하고 대화하며 감정을 표현하는 디지털 페르소나로 진화했다. 2016년 미국에서 태어난 가상 인플루언서 릴 미켈라(Lil Miquela)가 대표적이다. 인스타그램 팔로어 약 251만 명을 확보한 그는 OOTD(Outfit Of The Day·오늘의 패션)나 여행 기록 등 여느 20대 여성이 올릴 법한 콘텐츠를 공유한다. 나아가 투표를 독려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을 공개하면서 사회적 메시지도 던진다. 2020년 탄생한 한국의 첫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ROZY) 역시 인스타그램을 통해 패션위크에 참석하고 뮤직 페스티벌을 즐기는 등 다채로운 일상을 전한다.

가상인간의 가장 큰 강점은 무한한 확장성이다. 시공간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 각국 문화와 언어에 맞춰 맞춤형 콘텐츠도 제공할 수 있다. 사생활 리스크도 없다. 전통적으로 콘텐츠·엔터테인먼트·게임·광고업계는 특정 인기 연예인에게 의존해왔다. 이에 연예인의 스케줄, 이미지, 개인적 문제 등은 언제나 변수로 작용하며 프로젝트 성공 여부를 좌우했다. 특히 광고업계를 중심으로 가상인간이 주목받은 까닭이다. 앞서 소개한 로지는 신한라이프의 첫 번째 광고 모델로서 2021년부터 2년간 활약했다. 롯데홈쇼핑은 2021년 자체 개발한 가상인간 루시(Lucy)를 쇼호스트로 전면에 내세운 바 있다. 루시는 단지 제품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 소비자와 실시간으로 활발히 상호 작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최근 할리스도 SM엔터테인먼트가 처음으로 선보인 버추얼 아티스트 나이비스(Naevis)를 홀리데이 시즌 뮤즈로 발탁했다.

단순히 광고 모델로 기용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산업 분야로의 활용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CES 2020에서 인공인간 프로젝트 ‘네온’을 발표한 바 있다. 인간처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고 행동하도록 설계된 가상인간이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를 특정 업무에 도움이 되도록 개인화해서 교사, 배우, 은행원 또는 TV 앵커 역할도 맡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가상인간을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활용 가능하도록 혁신적인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MBN은 2020년 국내 방송사 최초로 AI 김주하 앵커를 등장시킨 이래 현재까지 1분 남짓의 주요 뉴스 예고 코너에 기용하고 있다. 실제 앵커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뉴스를 전달한다. 국민·신한·우리·농협 등 주요 시중은행은 2021년 신한은행을 시작으로 잇따라 AI 은행원을 도입했다. 대구은행도 2023년 12월 AI 휴먼 제작 기술과 챗GPT를 결합해 만든 AI 모델 은행원 ‘한아름’을 공개했다. 배우 나문희는 국내 배우 최초로 ‘디지털 더블(실제 사람을 모방해 만든 가상인간)’을 만들어 데뷔시켰다. 지난해 9월 말부터 한 달간 진행된 나문희 배우 주연 생성형 AI 단편영화 공모전에는 나문희의 디지털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단편영화 총 47편이 출품됐다. 홀로그램이나 AR 기술을 활용하면 오프라인에서도 가상인간이 실질적인 존재감을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비싼 제작비, 감정적 이질감이 장애물

삼성전자가 CES 2020에서 공개한 인공인간 프로젝트 ‘네온’(왼쪽)

삼성전자가 CES 2020에서 공개한 인공인간 프로젝트 ‘네온’(왼쪽)

가상인간이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면서 관련 시장 규모도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시장조사 전문 기관인 AMR은 ‘가상인간 시장 분석과 전망, 2021~2031년’ 보고서를 통해 2021년 전 세계 가상인간 시장 규모를 113억 달러로 평가했다. 2022년부터 2031년까지 연평균 성장률(CAGR)은 44.7%, 2031년에는 4403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많은 기업이 앞다퉈 내놓았던 가상인간 중 상당수는 최근 자취를 감추고 있는 모양새다. 롯데홈쇼핑의 가상인간 쇼호스트 루시는 2024년 5월 이후 SNS 활동을 중단한 상황이다. 18만 명에 달했던 팔로어는 2024년 12월 기준 13만 명으로 떨어졌고, 유튜브와 스레드 계정은 비활성화됐다. 2022년 공개 이후 20일 만에 인스타그램 팔로어 1만 명을 모은 크래프톤의 가상인간 위니(WINNI)는 2023년 8월 이후 게시물을 게재하고 있지 않다. 인스타그램 및 틱톡을 통해 댄스 커버 영상 등을 활발히 올렸었지만, 활동이 갑자기 뚝 끊긴 것. 스마일게이트가 야심 차게 기획한 ‘한유아’는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가상인간 중 한 명이었지만 최근 그 관심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넷마블의 리나(Rina)도 마찬가지다. 2022년까지만 해도 패션 매거진의 표지 모델로 활약하거나 연예기획사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던 것과는 사뭇 대비된다.

가상인간이 점점 사라지는 까닭으로는 먼저 수익성 문제가 꼽힌다. 사람의 실물과 흡사한 캐릭터 하나를 만들려면 최신 기술과 전문 인력이 투입돼야 하는데, 이때 수십억 원 이상의 투자가 필요하다. 앵커 한 명, 아이돌 몇 명 정도는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패션쇼를 하기 위해 수십 명의 모델과 수백 벌의 옷을 가상세계에 맞게 만든다면 투자 대비 수익(ROI)이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상 스토어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쇼호스트의 경우도 캐릭터 한둘은 만들 수 있지만 스튜디오가 바뀌고 많은 상품을 취급하는 경우 ROI가 나오지 않는다.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의 영향도 있다. 이는 로봇, 가상 캐릭터, AI 등이 인간과 유사한 형태나 행동을 할 때 사람이 느끼는 불쾌감이나 징그러움, 이질감 등을 뜻한다. 이는 인간과 비슷한 정도가 증가함에 따라 친밀감이 높아지지만, 인간에 매우 가까워지면서 인간과 동일하지 않은 미묘한 차이로 갑자기 친밀감이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이다. 쇼핑 중에 마네킹을 마주쳤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소라(Sora)와 같은 고급 영상 제작 AI 툴은 가상인간 외형을 실제 인간처럼 정교하게 구현하고, 현실감 있는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춤추고 노래하는 가상 아이돌을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수준에 와 있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 표현을 담아내는 표정이라거나 피붓결, 시선 등에서 아직 어색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가상인간에 사용되는 딥페이크 기술이 악용되면서 가상인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크게 악화됐다. 가상인간의 경우 특정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가상인간을 만듦으로써 대체 효과를 얻고자 하는 것인데, 이 경우 딥페이크에 악용되거나 딥페이크를 우려하는 분위기가 크다.

산업용·교육용으론 여전히 유용

DGB대구은행이 공개한 가상인간 은행원 ‘한아름’.

DGB대구은행이 공개한 가상인간 은행원 ‘한아름’.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상인간은 극복하기 쉽지 않은 단점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메타버스는 물론 게임 세계에 푹 빠져 있다. 게임이야말로 가상의 세계를 잘 나타내는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다. 전 세계 게임 인구가 수억 명 이상으로 추산되니 이미 가상의 세계, 가상 캐릭터, 가상화폐 등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가상세계, 나아가 가상인간과 가상화폐는 이제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디지털 시대의 중요한 구성인자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애플의 비전프로나 메타의 퀘스트3는 헤드셋을 통해 VR을 놀랍도록 정교하게 구현했다. 뿐만 아니라 현실과 가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공간 컴퓨팅을 표방하는 혼합현실(MR) 기능까지 탑재해 산업용이나 교육용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크다. 가상세계가 일상에 자연스레 자리 잡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하지만 가상인간이 잘 활용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우선 콘텐츠와 AI 기술 융합이 필수적이다. 가상인간의 외형과 스토리는 물론이고 행동과 감정 표현, 상호작용 능력까지 갖춰야 한다. 특히 단순한 질문에 답변하는 것을 넘어 대화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반응을 보이며 지능적 사고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데, 이때 챗GPT 같은 고도화된 언어 모델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것들이 구현될 수 있다면 가상인간은 새로운 디지털 페르소나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글로벌 시장에서도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가상세계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됐다. 그 가능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깊다.


이경배 연세대학교 미래융합연구원 겸임교수
삼성, CJ, SPC에서 임원과 대표이사를 역임하고, 경영학 박사와 기술사 자격을 보유한 전문 경영인이다. 연세대와 성균관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AI 시대의 디지털 혁신’을 주제로 기업 특강을 진행하는 한편 일간지 칼럼니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 ‘비즈니스 디지털 레볼루션’ 외 다수의 공저와 번역서가 있다.



#가상인간 #가상인플루언서 #여성동아

‌기획 조지윤 기자 
사진출처 삼성전자 스마일게이트 크래프톤 인스타그램@rozy.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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