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의 물결이 거센 가운데 최근 의미 있는 한복 패션쇼가 열렸다. 2025년 10월 29일 경주에서 치러진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기념 ‘한복 패션쇼’가 그것. ‘한복, 내일을 날다’를 주제로 열린 패션쇼는 과거·현재·미래 3막으로 펼쳐졌다. 이 중 3막에서는 이진희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교수가 총감독을 맡아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한복 15벌을 공개했다. 연이어 진주실크박물관 개관 작가로 선정된 이진희 교수는 한국 고유의 오방색을 현대적 시각언어로 재해석한 전시 ‘오방–The Woven Cosmos’를 2026년 10월까지 선보인다.
어떻게 보면 한복의 과거보단 미래에 한 발 더 가까운 행보다. 하지만 한예종에서 무대미술을 전공한 이진희 교수는 의외로 모교에서 동양복식사를 가르친다. 기초가 튼튼해야 응용문제를 풀 수 있는 법. 옷을 소재로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며 의상 감독이자 한복 디자이너로도 활동 중이다. 이진희 교수는 영화 ‘안시성’으로 2020년 ‘대종상 영화제’ 의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폭넓은 활동만큼 이진희 교수의 작업실은 흥미로웠다. 드라마 ‘연인’에 나왔던 붉은 치마와 현대식 갓, 한 땀씩 조각을 이은 파인 아트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이진희 교수는 “APEC 정상회의 패션쇼부터 학생들 졸업 전시까지 정신없이 이어져 정리한다고 했는데도 어지럽다”고 했지만, “한국인이 가진 역동성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와 꼭 닮은 공간이었다.
얼마 전 열린 APEC 정상회의 기념 패션쇼 현장 반응은 어땠나요.
피날레 무대 인사를 나가야 해서 백스테이지에 있었는데, 한 모델이 “김혜경 여사가 감탄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시더라”며 신나서 뛰어 들어오는 거예요. 많은 쇼를 했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백스테이지에도 들릴 정도로 크게 박수를 계속 쳐주는 쇼는 처음이었어요. 굉장히 가슴이 뭉클했어요. 제 고민이 많이 담긴 작업이었거든요. 이번 경우 한국적인 미학의 축을 잡아서 동서양을 결합해 확장한 작업물인데도 사람들이 한복으로 받아들이고 좋아해주더라고요.
한복의 깃을 ‘동과 서,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축’으로 재해석했는데, 미학적 요소 중 깃에 초점을 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서양은 형태적인 부분, 볼륨이나 실루엣을 강조한다면 동양, 그리고 한국 같은 경우는 깃의 여밈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저는 깃이 몸에 가장 처음 닿는 부분이자 끝나는 부분이고, 세상과 마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서양은 개인 중심이고 한국은 세상 속 관계가 중요한 문화잖아요. 이 점이 동양과 서양의 차이점이라 생각해 깃을 중심으로 놓고 해체하고 다시 동서양을 융복합시키는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개념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봐 주더라고요. ‘나만의 개인적인 해석이 아니었구나’ 생각했죠.

이진희 교수는 APEC 정상회의 기념 한복 패션쇼에서 한복의 깃을 ‘안과 밖, 동과 서,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축’으로 재해석해 AI 기반의 첨단 소재를 결합한 새 한복을 제시했다.
제가 잡은 방향성을 바탕으로 프롬프트를 만들어 AI가 한번 아이디어를 내보게 하고, 그 아이디어에서 차용할 건 차용했어요. 또 ‘나노바나나’ ‘미드저니’ 같은 프로그램에 제가 한 러프 스케치를 주면 비슷하거나 아주 다른 디자인들이 나와요. 결과물을 보면서 취할 건 취하고 뺄 건 빼면서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디자인했죠. 결과치에 대한 데이터를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AI가 제안한 내용을 실제로 적용했을 때 되는지 안 되는지 평가할 수 있잖아요. 활용은 하되 최종 작업은 사람이 해야 하고, 결국 세계를 보고 해석해내는 힘은 창작자의 몫이에요.
몇 년 사이 해외에서도 전시와 협업 요청이 많았잖아요. 세계적으로 한복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의미 아닐까요.
옛날에는 한복을 문화적 호기심이나 이국적인 전통의상 정도로 소비했는데, 최근에는 큐레이터들이 실루엣보다는 구조를 보고 철학과 세계관에 관해 질문해요. 얼마 전 뉴욕의 한 평론가는 제 작업실까지 직접 와서 작품을 보고 평론을 하더라고요. 이런 부분들을 보면 한국 문화의 위상이 달라졌구나, 하고 느껴요. 아무래도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케데헌’에서 한국의 무교(무속)와 역동성을 보여줬잖아요. 그동안 조선시대에 유교나 성리학이 강하게 뿌리내리고, 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비애미(悲哀美)’만 강조되다가 이제 역동성을 알아줘 정말 기뻐요. 너무 좋아서 ‘케데헌’을 서너 번 봤어요(웃음).

이진희 교수는 드라마나 영화 의상 작업은 “텍스트를 통해 작품의 세계관을 읽어내고 각 인물의 서사를 이해해 그걸 얼마나 잘 구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영화 ‘안시성’ 작업을 하며 북한 사료집에서 “고구려 여성들은 산을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녔다”는 문장을 봤어요. 그 엄청난 기백에 꽂혀서 ‘안시성’ 의상을 야성적이고 역동적으로 풀었어요. 제가 2018년에 론칭했던 브랜드 ‘하무’는 물의 춤이란 의미인데, 고구려 복식을 재해석해서 물의 에너지를 풀어낸 브랜드였거든요.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익숙한 조선시대 옷만 우리 것이라 생각하고 고구려의 역동성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이후 제가 교수가 되면서 브랜드 대표직에서 내려왔고, 그때 충분히 목소리를 내지 못한 데에 아쉬움이 늘 있었어요.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의 의상은 또 하나의 볼거리였다.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는 창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요.작업마다 변곡점이 있어서 고르기가 쉽지 않아요. ‘성균관 스캔들’은 한복 의상이 고증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기에 제가 스팽글 원단에 디지털 프린팅을 쓰면서 한복을 현대화한 거의 첫 시도였어요. ‘구르미 그린 달빛’은 당시 팬톤 ‘올해의 컬러’였던 핑크를 한복에 반영했고요. 왕세자 역할인 박보검에게 핑크색을 입히겠다고 하자 제작진이 우려했죠. 보검이도 자신은 핑크가 안 어울린다며 걱정했는데, 제 작업실에 와서 이것저것 대보더니 예쁘다고 안심했어요. ‘안시성’ 같은 경우는 처음으로 고증을 던져버리고 작품에 맞춰 해석해 만들었죠.
그래서 그해에는 고증 논란이 있어 대종상을 못 받고 이례적으로 다음 해에 받았잖아요.
그때 시상자가 “고증을 넘어서 한국 사극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했어요. 고증은 박물관에서 할 일이고 허구의 극에서는 극적 리얼리티를 만드는 게 제 역할이라 생각해요. 반면 ‘연인’은 병자호란이란 아픈 역사를 기반으로 하니까 차분하게 전통의 아름다움으로 갔어요. 그런데 ‘구르미 그린 달빛’ 이후 한복 시장의 원단들이 다 파스텔 톤으로 바뀌고, 소재도 얇고 반짝거리는 느낌으로 가벼워진 거예요. 원하는 원단을 구할 수 없어 직접 염색하고, 제가 가지고 있던 40~50년 된 원단도 갖다 썼어요. 시기마다 제가 꽂히고 고민했던 부분을 풀어내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갔기 때문에 모든 작품이 의미 있어요.
작업할 때 고증과 창작 중에 어떤 과정이 더 어려운가요.
고증은 공부하면 축적될 수 있어요. 하지만 창작은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식만 공부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힘도 갖춰야 해요. 구현해냈을 때 책임도 져야 하고요. 그래서 창작이 훨씬 힘들어요. 물론 제가 고증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고증은 철저히 하되 극적 리얼리티를 만드는 부분에 더 비중을 가지고 작업합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는 게 창작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서요. 한복이 이어지는 이유는, 지금의 감성과 감각에 맞는 현대의 한복이 나오기 때문에 잊히지 않는 것이에요.
요즘 경복궁에 한복을 입고 둘러보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면서, 대여 한복에 대해 ‘변형이 과하다’는 쪽과 ‘한복이 더 알려지는 게 낫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어요.
사람들이 디즈니랜드에 가면 화려한 공주 드레스를 코스프레로 즐기잖아요. 어떻게 보면 경복궁에 온 외국인 역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등 공주가 된 기분을 느끼는 거죠. 전 그렇게라도 한복이 계속 알려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실제 실크로 만든 한복은 많은 사람이 쉽게 입기 힘들어요.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고, 실크는 햇빛을 받으면 바래거든요.
유행 중인 AI 한복 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제가 AI 작업을 하면서 그런 영상들을 찾아봤어요. 실제 구현되기 어려운 부분과 구현됐을 때 한복의 고유미를 해치는 부분들이 사실 보이긴 하죠. 그런데 의외로 외국인들이 한복 디자인 작업을 많이 해서 올리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기뻤어요. 물론 변형에 대한 비판은 이해합니다만, 중요한 점은 변형 그 자체가 아니라 한복을 대하는 태도예요. 외국인 교환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를 보면 대부분 K-팝을 통해 한국을 알게 됐고, 공부해보니 한국의 미학이 아름다웠다고 해요. 처음에는 가볍게 소비하더라도 결국 이해하려는 태도로 연결돼요. 따라서 가볍게 터치할 수 있는 문화는 문화대로 있고, 전통을 지켜야 하는 곳에서는 고증 그대로 연구하거나 그 연구를 통해 더 확장해나가는 그런 다양한 축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한복은 옷 이상의 종합예술”
교수님께 한복은 어떤 의미인가요.제가 학교 다닐 때는 무대미술과 교수님들이 거의 외국에서 공부하신 터라 서양 복식 위주였어요. 저도 크리놀린, 파니에 같은 크고 화려한 서양 복식에 매료돼서 우리 전통은 초라하구나, 생각했고요. 우연히 한국 창작 작품에 참여하면서 우리 문화와 미학, 복식사 공부를 하게 됐고 한국의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생겼죠. 한복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의 인문학적인 부분은 크고 넓어요. 저한테 한복은 스스로를 확인하는 언어이자 구조와 여백, 색과 상징, 정신까지 담아내는 종합예술이에요. 젊은 친구들도 한복을 들여다본다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한복이 더 사랑받도록 앞으로도 일 많이 하셔야겠어요.
일단 제가 의상을 담당하는 뮤지컬 ‘몽유도원’이 1월 2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오픈하고 2028년 뉴욕 링컨센터에서 공연할 예정이에요. 해외에서는 박물관을 비롯해 몇 군데 협업을 조율하고 있어요. 또 픽사와 미팅을 앞두고 있는데요. 실제 제작한 옷을 3D 스캔을 통해 입히는 실사 느낌의 작품에 대해 의논할 생각이에요. APEC 정상회의 기념 작업물도 3D로 스캔해 디지털 화보와 패션쇼를 진행할 계획이고요. 지금은 이런 데이터 시스템이 없으니까 제가 시도해보려 해요. 저는 시대에 맞는 감각들로 계속 변모하고 융합해 확장해나가는 새로운 도전이 재미있어요. 놀듯이 작업하는 거죠.
#한복 #APEC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사진제공 이진희 사진출처 KBS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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