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자동차 회사를 다니다 정리해고된 분이 ‘비트윈잡스’ 모임에 나오셨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6개월 만에 처음 나온 모임이래요. 그 회사 로고만 봐도 열불이 나서 운전대를 잡을 수가 없었대요. 울먹이는 그분에게 제가 말했어요. OO 님은 밖에 안 나오면 그 회사 이름을 안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집에서도 구글을 봐야 하고요, 쉬면서도 유튜브 봐야 하고요, 컴퓨터 켤 때마다 크롬을 사용해야 해요. 그런 저보다 OO 님이 낫잖아요?”
비트윈잡스(between jobs)는 ‘일과 일 사이’를 뜻하는 말로, “I’m between jobs”는 현재 실직 상태임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정김경숙(로이스 김) 씨의 주도로 2024년 초 이 커뮤니티가 만들어졌다.
“어떤 이유로든 갑작스럽게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있어요. 권고사직이든 희망퇴직이든 정리해고든 스스로 회사를 걸어 나왔든, 대부분 이 공백의 시기를 철저히 혼자 보냅니다. SNS를 끊고 친구들과의 만남도 뜸해지고 나중엔 말수마저 줄어들게 되죠. 이분들은 갈 데가 없어요. 모임에 나가면 명함 교환부터 하는데, 이분들은 명함이 없잖아요. 외롭고 서럽죠. ‘잡(job)’이 없는 사람들도 마음 편하게 갈 수 있는 모임이 필요하다고 해서 만든 게 비트윈잡스예요.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연결되고 위로받고 ‘연대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자는 취지죠. 무엇보다 ‘로이스 님이 레이오프된 것을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얘기해줘서 너무 큰 힘이 됐다. 덕분에 용기를 얻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해줬을 때 정말 기뻤어요. 처음엔 ‘줌’으로 모이다가 오프라인 모임을 시작했는데, 예상외로 매회 150명 넘게 참가 신청을 하세요. 실리콘밸리에도 모임이 생겼고, 곧 캐나다에도 만들어져요. 1년 반 만에 3000여 명이 비트윈잡스를 통해 연결됐어요.”
이 모임을 만들게 된 계기는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이스 김은 16년간 다닌 구글에서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레이오프를 경험한 사람과 안 해본 사람. 2023년 1월 21일 금요일 새벽 회사로부터 해고 통지 이메일이 왔어요. 지금도 메일함에 남아 있는 해고 통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져요.”
나이 오십에 실리콘밸리도 가는데
미국에서는 경영상의 이유로 감원하는 것을 레이오프(layoff), 직원의 귀책 사유로 그만두는 것을 해고(fired)라고 구별하지만, ‘직업을 잃었다’는 결과는 마찬가지다. 로이스 김은 2007년 구글코리아에 커뮤니케이션 총괄 임원으로 합류해 12년 동안 일했고, 2019년 실리콘밸리로 무대를 옮겨 구글 본사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팀 디렉터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구글에 몸담았던 16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2016년 3월 서울에서 진행된 ‘알파고와 이세돌 9단 간의 바둑 대국’이었다. 그해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은 전 세계의 이목을 서울로 집중시켰고, 그는 구글코리아 커뮤니케이션팀을 이끌고 이 행사를 진두지휘했다.2007년 로이스 김이 구글코리아에 합류했을 때 그곳은 직원이 15명도 채 안 되는 작은 회사였지만 12년 뒤 600명이 넘는 큰 기업으로 성장했고, 그는 그 기업에서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아는 ‘엄마’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익숙한 환경에 안주하는 대신 도전을 택했다. 2019년 나이 오십에 미국 본사행. 각국에 있는 커뮤니케이션팀과 미국 본사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를 이어주는 역할이 필요하다는 그의 제안에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디렉터라는 자리가 생기더니 적임자로 로이스 김이 호명됐다.
로이스 김은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2022년 ‘계속 가봅시다 남는 게 체력인데’라는 책을 썼다. “나이 50에 실리콘밸리도 가는데, 지치지 말고 무엇이든 해보라”는 그의 조언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그해 11월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이하 ‘유퀴즈’)에 출연했다. 방영 한 달 전 녹화를 했는데 석 달 뒤 정리해고될 줄 알았다면 “뼛속까지 구글러”라느니 “좋아하는 일을 원하는 만큼 즐기면서 더 오래 하자”라고 신나게 떠들 수 있었을까. ‘마흔에 시작한 영어로 50세에 구글 커뮤니케이션팀 최초 비원어민 디렉터가 된 로이스 김의 치열한 영어 분투기’를 담은 두 번째 책(정리해고되고 1년 뒤 ‘영어, 이번에는 끝까지 가봅시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은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해 실리콘밸리에 분 감원 칼바람은 그에게도 예외 없이 불어닥쳤다.

2024년 7월 ‘유퀴즈’에 두 번째 출연했을 때.
왜 하필 나야? 왜 우리 팀이 없어져야 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휴대폰으로 이메일부터 확인하죠. 그날은 이상하게 회사 계정 메일이 열리지 않아서 개인 메일을 열었더니 ‘고용에 관한 고지’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어요. ‘구글에는 당신을 위한 일자리가 없습니다(We no longer have a job for you at Google)’ 어쩌고 하는데 끝까지 읽지도 않고 닫아버렸죠. 스팸메일이거나 장난 메일인 줄 알았거든요. 심지어 ‘이메일 수신자 목록이 잘못된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미안하다고 정정 메일이 올 거야’라고 생각했죠.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어요. 총괄 부사장이 직접 전화를 했더군요. ‘로이스, 괜찮아요? 걱정돼 전화했어요’라고 하기에 ‘회사에 무슨 일이 있나요?’라고 오히려 물었죠. 깜짝 놀란 부사장이 간밤에 1만2000명 감원이 결정됐고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한 우리 팀 전원이 이에 해당한다고 알려줬어요. 그때는 괜찮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한동안 멍했어요. ‘아, 스팸메일이 아니었구나.’”로이스 김은 매일 아침 100통이 넘는 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채팅창 대여섯 개를 동시에 열어놓고 일하는 것은 기본이고, 15분 단위로 쪼갠 회의 일정 때문에 그의 구글 캘린더는 늘 꽉 차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모든 게 정지된 듯했다. 친구와의 약속도, 치과 진료 일정도 모두 회사 캘린더에 넣어두었는데 계정이 막혀서 열어볼 수조차 없었다. 어이없고 황당했고 무서웠다.
“‘네 자리는 없어졌어. 오늘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돼’라는 통보를 받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우습게도 저는 ‘회사에 내 슬리퍼도 있고 칫솔도 있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세상이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고, 이제는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화가 치밀어올랐어요. 4년 전 미국 본사로 와서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팀을 만든 것도 나고, 인사고과도 최상위인데 왜 하필 나야? 왜 우리 팀이 없어져야 해?’
구글이 너를 놓아준 건 신의 한 수야
정리해고되고 첫 주말, 하필 친구들과 여행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막상 “얘들아, 나 구글에서 해고당했어. 바로 어제!”라고 털어놓고 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후련했다. 여행을 다녀오고 평소대로 새벽 조깅을 하다 번쩍하는 깨달음이 왔다.“2022년 여름 첫 책 ‘계속 가봅시다 남는 게 체력인데’를 펴낸 뒤 독자들로부터 ‘언제까지 구글에 계실 건가요?’ ‘언제까지 일할 생각이세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때 저는 ‘구글은 정말 좋은 회사지만 2년 정도 더 다니다 좀 작은 회사에서 큰 역할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죠. 생각해보니 그 2년이 조금 빨리 온 것뿐이더라고요. 한 친구가 ‘로이스, 차라리 잘됐어. 넌 아마 신의 직장인 구글을 쉽게 떠나지 못했을 거야. 구글이 널 놓아준 건 신의 한 수야. 어차피 2~3년 뒤에 구글을 떠나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 했잖아’라고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정리해고가 하늘이 준 기회일 수 있겠구나’ 싶었죠.”
그즈음 그는 자신의 정리해고 소식을 알리기 위해 주위 사람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 ‘layoffs’라고 쓴 것이 ‘playoffs’로 자동 고침 되어 전달된 것을 알았다.
“스포츠 리그에서 정규 시즌이 끝난 뒤 상위 팀들끼리 챔피언십을 놓고 다투는 게 플레이오프잖아요. ‘그래, 지금까지는 내 인생의 예선전이었어. 드디어 나는 본선에 진출했고, 최종 우승만 남았네’라고 생각했죠.”
대학에 들어가거나 회사를 옮길 때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을 갭이어(gap year)라고 하듯이, 로이스 김은 이참에 1년 동안 회사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종이 한 장 위에 거침없이 적어나갔다.

“사람들은 제게 용기 있다, 회복탄력성이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절박했어요. 레이오프 이후 부정, 분노의 단계를 지나니까 우울이 찾아왔거든요. 한 번도 우울했던 적이 없는데 우울해지니까 무섭더라고요. 바쁘게 몸을 쓰면 생각할 틈이 없어지잖아요. 제게 ‘바쁨’이라는 처방을 한 것이죠.”
로이스 김은 처음 트레이더 조의 문을 열고 들어가던 날 잠시 망설였다. ‘유퀴즈’ 출연 이후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송 출연 3개월 만에 정리해고라니, 시쳇말로 ‘쪽팔렸다’. 그런 후회도 잠시, 체면을 내려놓고 일로 돌아갔더니 사람들은 오히려 실리콘밸리에서 임원 하던 사람이 마트 아르바이트를 하고 바리스타를 하는 게 대단하다면서 함께 사진을 찍으며 응원해주었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트레이더 조로 출근해 물건을 진열하고 캐셔도 하고, 휴식 시간을 이용해 공유 운전을 하고,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스타벅스로 가고, 틈틈이 고양이 돌봐주기 출장 서비스를 하며 소위 ‘N잡러’로 1년 반을 살았다.
그때 가장 힘이 되어준 사람은 미국 동부에서 유학 중인 아들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는 엄마가 자랑스럽다며 알바 선배로서 팁 받는 법을 공유하기도 했다. 반대로 한국에 있는 친정 엄마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4남매를 키운 엄마였다. 막내가 엄마의 성씨 ‘정’을 이름 앞에 붙여 ‘정김경숙’이라고 박힌 첫 명함을 건넸을 때 엄마는 감격해서 울었다. 정리해고를 당한 날부터 매일 쓴 일기를 토대로 2024년 4월 ‘구글 임원에서 실리콘밸리 알바생이 되었습니다’를 출간하자 그 책을 보고 엄마는 “알바한다고 이렇게까지 수고하는 줄 몰랐다”며 또 울었다. 평생 일밖에 모르는 며느리를 대신해 손자를 키우고 살림을 해주던 시어머니도 울었다. 남편은 그때나 지금이나 묵묵히 아내의 판단을 믿고 지지해주었다.

인생의 정점에서 한 번, 인생의 바닥에서 또 한 번
로이스 김은 2024년 7월, ‘유퀴즈’에 두 번째 출연했다.“구글 임원 하며 인생의 정점을 찍은 사람이 알바생으로 다시 ‘유퀴즈’에 나가려니 멋쩍더라고요. 첫 번째 출연 때는 ‘직장 생활은 바로 이렇게 하는 거다’라고 할 만큼 자신감이 지금의 100배쯤 됐던 것 같아요. 아무리 잘나갈 때라도 그렇게 자만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웃음). 반대로 바닥을 쳤다고 해서 부끄러울 일도 아니고 좌절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생 새옹지마죠. ‘유퀴즈’에서도 저 같은 경우는 참 드물다고 해요.”
그는 1년 반의 갭이어 효과를 5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레이오프 충격을 잘 넘어가게 해주었다. 둘째, 다양한 신입의 지식과 경험을 넓혔다. 셋째, 내 몸 하나로도 먹고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넷째, 은퇴 예행연습(명함 없이 살아가기, 경제적 규모)을 했다. 다섯째,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로이스 김은 2025년 한 해에만 무려 세 권의 책을 펴냈다. ‘다정함도 체력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다르게 팝니다(고객을 사로잡은 트레이더 조의 리테일 심리학)’ ‘퇴사하면 큰일 날 줄 알았지’. 그중에서 ‘퇴사하면 큰일 날 줄 알았지’는 비트윈잡스를 통해 만난 37명과 함께 썼다.
“저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짧은 사람’이에요. 거리가 짧다는 것은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긴다는 말이죠. 그만큼 실수도 엄청 많이 해요. 그런데 저는 그게 더 나은 것 같아요.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죠.”
2026년 그는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에 들어가 2년간 자원봉사를 할 예정이다.
“1960년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평생 중에 2년은 남을 위해 살아보자는 취지로 만든 것이 평화봉사단이에요. 봉사 지역은 아프리카, 동유럽, 남미, 아시아 국가 가운데 고를 수 있는데, 아프리카는 여행이나 봉사 활동으로 여러 차례 방문해봤기 때문에 저는 생소한 몬테네그로를 신청했어요. 그곳에서 2년간 청소년 멘토링과 영어교육 자원봉사를 하게 됩니다. 2026년 1월 15일 워싱턴DC에 집합했다가 몬테네그로 옆 나라 알바니아로 가서 언어연수를 받고, 그다음 목적지로 파견됩니다. 9개월간은 그 나라를 떠날 수 없다고 해요. 여러분, 로이스를 만나려면 고추장 싸 들고 몬테네그로로 오세요.”
4년 전 로이스 김은 자신의 첫 책에 이렇게 썼다.
“죽지 않는 한 우리 인생에는 다음 판이 있다. 지금 망할 것 같아도 다시 도전하고,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는 것.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우리가 인생에 맞서 갖춰야 하는 삶의 태도는 결국 같은 것이리라. 망할 것 같아도 오늘 다시 도전!”
그때나 지금이나 로이스 김은 말한 대로 살고 있다.
#정김경숙 #구글 #트레이더조 #여성동아
사진 박해윤 기자 사진출처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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