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만약에 우리’는 뜨겁게 사랑했던 은호와 정원이 10여 년 만에 우연히 재회해 지나간 사랑의 흔적을 되짚는 이야기다. 가난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헤어졌던 두 사람이, 각자의 시간을 건너 다시 마주한다. ‘게임 개발로 100억 벌기’라는 다소 허황된 꿈을 갖고 서울에 올라온 컴퓨터공학도 은호는, 가진 것이라곤 단칸방과 열정뿐이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좇는다. 고향으로 향하던 버스에서 만난 정원과 친구로, 연인으로 시간을 쌓아가며 지치고 기댈 곳 없는 그녀에게 ‘집’이 돼준다. 그러나 취업 실패와 생활고라는 현실 앞에서 두 사람은 서서히 어긋나고, 꿈 많았던 청춘은 점점 초라해진다. 정원 역은 차세대 로코 퀸으로 주목받는 문가영이 맡았다. 지난 연말 개봉한 이 작품은 13일 만에 손익분기점(110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세를 이어가고 있다.
영화는 관객에게 도달한 순간 완성된다
구교환은 꿈을 좇아 한 우물만 파왔다는 점에서 은호와 접점이 많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서울예대 영화과에 입학한 구교환은 배우이자 감독, 각본가이자 PD라는 여러 역할을 오가며 영화의 세계에 자신을 던져왔다. 2008년 단편영화 ‘아이들’로 데뷔한 뒤 독립영화 현장에서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았고, 2017년 영화 ‘꿈의 제인’에서는 트랜스젠더 제인을 연기해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과 주요 신인상을 휩쓸었다. 이 시기에 그는 ‘독립영화계의 아이돌’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2019년에는 연인인 이옥섭 감독의 영화 ‘메기’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이후 ‘반도’ ‘모가디슈’ ‘D.P.’ ‘기생수: 더 그레이’에 이르기까지 대중성과 연기력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그는 ‘거북이들’ ‘술래잡기’ ‘걸스온탑’ 등을 연출한 감독이기도 하다. 구교환이 연출과 주연을 맡은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에는 한때 영화를 사랑했지만 길을 잃은 무명 배우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 현재는 이옥섭 감독과 함께 영화 ‘너의 나라’를 제작 중이다.인터뷰를 위해 만난 구교환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답게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유쾌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답을 내놓았다. “영화는 관객에게 도달한 순간 완성된다”는 그의 말에서는, 연기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오랜 시간 현장을 버텨온 사람의 진심이 느껴졌다.
영화를 본 소감은 어떤가요.
영화는 촬영을 마쳤을 때가 아니라 관객에게 도달한 순간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영화는 지금도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습니다. 제가 영화 작업을 하는 이유는 결과물을 관객에게 건네고 그 반응을 듣기 위해서죠. “은호랑 연애하는 기분이었다”는 리뷰가 있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멜로 영화에서 느꼈던 감정이라 너무 감사했습니다.
문가영 배우와 나이 차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비주얼 케미가 좋던데요.
김도영 감독님과 문가영 배우 덕분입니다. 감독님은 디테일한 디렉션을 주셨고, 같은 장면이라도 테이크마다 감정의 레벨을 섬세하게 조율해주셨어요. 강가에서 둘이 쭈그려 앉아 우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에 들어가기 직전 가영 씨의 얼굴을 보니 너무 서럽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때 ‘이 배우는 상대 배우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구나’라는 걸 느꼈습니다.
김도영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요.
감독님은 배우로서도 존경하는 분이에요. 2009년 ‘어떤 개인 날’로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을 받을 정도의 연기력을 갖춘 분이잖아요. 연출하신 작품도 좋아하고, 특히 ‘82년생 김지영’을 인상 깊게 봤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감독님이 제가 도달하고 싶은 연출자의 모습이기 때문이에요. ‘너의 나라’에도 김도영 감독님이 맡아주셨으면 하는 역할이 있어요. 어떤 배역인지는 비밀입니다(웃음).
감독으로 만난 분을 본인의 영화에서 배우로 다시 만나는 건 부담스럽지 않나요.
전혀요. 감독과 배우 이전에 동료잖아요. 아름다운 ‘품앗이’라고 생각해요(웃음).
감독의 디렉션 중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다면요.
동선에 대한 세심한 디렉팅이 인상 깊었습니다. 시나리오에 ‘앉아서 이야기한다’고 쓰여 있어도, 항상 리허설을 먼저 하고 애드리브를 궁금해하셨어요. 리허설에서 배우의 움직임이 살아 있으면 고정된 앵글도 따라 움직이게 만들죠. 그걸 보면서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건 앵글보다 인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구교환은 멜로 영화에서 문가영과 호흡을 맞춘 건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서로 rpm 잘 맞았던 문가영 배우
문가영 배우와의 케미를 조금 더 설명해주신다면요.저희는 rpm이 잘 맞았어요. 장면을 대하는 온도와 속도가 비슷했고, 서로를 진심으로 바라보려는 태도도 닮아 있었습니다. 문가영 배우는 발성과 딕션이 뛰어나지만, 제가 느낀 더 큰 장점은 ‘감정적 애드리브’예요. 테이크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감정을 던져주기 때문에 항상 처음 연기하는 기분이 듭니다. 정서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연기를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틀을 과감히 무너뜨리고 전혀 다른 감정을 보여주더라고요. 멜로 영화에서 문가영 배우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은호와 정원은 과거와 현재 사이 10년 넘는 공백이 있는데, 그동안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극 중에 생략돼 있어요.
의도적으로 비워둔 건데, 그 공백이 우리 영화의 ‘킥’이라고 생각해요. 은호와 정원은 우리 모두의 첫사랑을 담고 있는 캐릭터라, 그사이를 설명해버리면 감정을 강요하게 될 수 있어요. 이 영화의 마법은 관객들이 각자의 경험을 통해 그 공백을 채운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에 헤어진 후 영화가 흑백 화면으로 전환되는데, 그건 두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인가요.
행복이라는 개념은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입니다. 개인적으로 행복은 계속 이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은호와 정원은 행복할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재회 장면은 영화적인 판타지이며, 이런 판타지를 경험하기 위해 영화를 본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영화를 ‘잘 이별하는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요. 이별의 과정을 통해 각자가 성장하고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는 모습이 그려지죠. 관객들이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공감할 요소가 있다고 믿습니다.
지하철에서 정원과 헤어지는 장면은 어떤 감정으로 연기했나요.
지하철 계단을 뛰어 내려갈 때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마음이었어요. 거의 형사물 찍듯이 전력 질주했죠. 그런데 막상 지하철 문을 사이에 두고 정원을 마주하는 순간, 더 이상 계산하지 않고 시나리오가 요구하는 감정을 그대로 수행하려고 했습니다. 그 장면이 주는 안타까움이 있잖아요. 감독님이 그 거리감과 타이밍을 정말 잘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해요.
실제 구교환이라면 그 순간 연인을 잡았을까요, 그냥 보냈을까요.
그건 2003년의 구교환, 2004년의 구교환, 2005년의 구교환 등 버전마다 다를 것 같아요. 축구 선수도 시즌마다 폼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이 질문에 대답은 노코멘트입니다(웃음).
꿈 많고 풋풋하던 은호가 일이 잘 안 풀리면서 지질하게 변하는데, 구교환 배우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나요.
게임 디렉터인 은호가 늘 ‘이 이야기가 팔릴까’를 고민하듯, 저 역시 시나리오와 연출 작업을 하며 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매번 실패하면서 살죠. 다만 그 실패를 ‘확정되지 않은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시나리오에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제작되지 못한 시나리오나 접어둔 장면들이 냉장고에 타바스코 소스처럼 계속 남아 있다가, 언젠가 다른 요리를 할 때 사용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당장은 안 풀려 보여도, 끝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은호를 연기하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많이 느꼈어요. 중요한 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화 ‘만약에 우리’에서 풋풋한 첫사랑 남자 주인공을 연기한 구교환.
“연기에 재능 있어 보인다면 그건 노력”
작품 속에서는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데, 비결이 있나요.정말 좋은 질문이네요. 하하하.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면 아마도 역할에 몰입하고, 그 캐릭터처럼 보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일 겁니다.
구교환 씨 연기를 보면 ‘날것’의 긴장감이 느껴지는데, 그런 부분은 재능인가요.
재능보단 노력입니다. 연기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항상 연기 생각을 하고, 내가 찍어야 할 장면에 대해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해봐요. 그러다 보면 몸에 남는 게 있어요. 축구선수가 운동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드리블이 저절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연기를 하며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최근에는 작품 리딩할 때 행복했습니다.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데도 몰입해서 대사를 하는 순간, 혼자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아, 나는 표현하고 싶어하는 사람이구나’라는 걸 느꼈습니다. 이 일을 계속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내가 아는 사람, 주변 사람 같은 배우요. 늘 관객의 옆자리를 지키는 배우로 남고 싶습니다.
#만약에우리 #구교환 #문가영 #여성동아
사진제공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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