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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한 줄 평은 부족하다

문영훈 기자

2023. 10. 11

악인의 서사
듀나·박혜진 외 7명 지음 / 돌고래 / 1만8000원

악행을 저지른 이들이 유독 언론의 카메라를 많이 받은 여름이 지나갔다.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SNS상 경구는 그럴듯해 보인다.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을 저지른 최원종이 특목고 진학에 실패했다거나, 신림동에서 칼을 휘두른 조선이 어릴 적 부모를 잃었다는 사실 같은 건 알 필요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피해자나 그 유가족에게 마이크가 향해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하지만 저 문장에 ‘서사’라는 단어가 포함되면서 창작 윤리에 대한 논쟁으로 옮겨붙기도 한다. 가상의 악인에 대한 구구절절한 서사도 불필요하다는 것.

과연 그럴까. 인류는 유구히 권선징악 플롯을 사랑해왔지만 우리가 이끌렸던 캐릭터는 악인일때도 많다.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 ‘다크나이트’의 조커 등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 피해자이자 주인공인 동은만큼 주목받았던 이가 시종일관 욕지거리를 하던 가해자 연진이다. 과연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않고 흥미로운 작품을 만드는 일이 가능한가. 흥미 차원을 넘어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요구가 별다른 반론이나 의심 없이 일종의 정언명령으로 승인되는 과정에서 간과된 물음은 없을까?”(책 서문 중)

책 ‘악인의 서사’는 이 질문을 아홉 평론가에게 던진다. 논픽션, 문학, 영화 등 주활동 분야도 다양하다.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상에서 댓글이나 리트윗 등으로 반론, 재반론이 이어지던 논쟁의 무대를 책으로 옮겨온 것이다. 최대 원고지 70매(1만4000자) 분량으로 쓰인 글의 내용은 깊고 진하다.

번역가 최리외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저 의문들, 결국 ‘도대체 그 경험/기억/사건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를 다루는 장르이자 필연적으로 그 복잡성을 수용하는 행위라는 점을 다시금 논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냐, 아니냐만으로 문학을 판단하는 것은 고유의 복잡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논지다. 문학평론가 전승민은 ‘악인의 서사’에 대한 질문을 다시 비튼다. 그렇다면 선에 대해 쓰는 건 악하지 않은가. 세 소설을 예로 들며 “선의 손을 들어주고자 하는 일은 구체적인 악의 얼굴을 고의적으로 표백하는 일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피해자성으로 함몰시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썼다. 의도적으로 서사에서 악을 지우다 보면 자신이 선하다는 나르시시즘의 서사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인의 서사에 대한 다양한 의견 외에도 주목할 부분은 악에 대한 정의다. 악이라는 말은 너무나 쉽게 쓰이지만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은 일상에서 쉬이 이뤄지지 않는다. 영화평론가 강덕구는 “악이란 신화 안에서 언제나 선을 규정하는 상수”라며 “우리는 사악한 가치를 규명함으로써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다”고 썼다. 비평가 윤아랑은 칸트, 키르케고르 등 철학자의 정의를 끌어오며 질문을 던진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쉽게 떠먹을 수 있는 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통틀어 인용된 작품 수만 해도 가볍게 100개를 넘어간다. 하지만 중요하게 인용되는 작품에 대한 평론가들의 친절한 설명, 주석과 용어 해석까지 덧붙여지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별점이나 한 줄 평이 아닌 비평을 찾아 읽는 이들의 마음속엔 그 작품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는 태도가 있다. 기사에 인용된, 혹은 SNS상에서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한 줄 평에 미심쩍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 책을 펼쳐보자.


#악인의서사 #악인 #여성동아

사진제공 돌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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