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 24일 미국 개봉 이후 한동안 배우들 연기력과 화려한 의상에 집중되는 듯하던 대중의 관심은 12월 1일 구찌 일가가 영화사를 상대로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경고했다는 보도가 나오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구찌 일가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 파트리치아 레자니(레이디 가가)가 전남편이자 구찌 경영자였던 마우리치오 구치를 살해한 사건을 다룬 부분이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또 “(영화 제작과 관련해) 상속자들과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고 항의하며, 영화 속에서 구찌 일가를 “주변 세계에 무지하고 둔감한 깡패들”이라고 묘사한 점에도 불만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갑론을박의 중심에 섰다는 점에서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를 통해 구찌의 100년 역사를 되짚어본다.
피렌체 가죽공방에서 시작된 이야기

당시 런던 사보이호텔은 세계 최초로 전등과 전화기, 엘리베이터 등을 도입한 최첨단 공간이었다.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핫 플레이스 구실을 했다. 이곳에서 5년여간 상류층의 취향을 익힌 구초는 가죽 용품에 주목한다. 이탈리아 장인들의 숙련된 가죽 세공 기술에 자신이 사보이호텔에서 파악한 상류층 취향을 결합하면 승산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
1902년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가죽공방에서 직접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1921년에 마침내 자기 이름을 딴 공방을 열기에 이른다. 구찌의 100년 역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순간이다. 이후 말 안장을 비롯해 장갑과 부츠 등 이탈리아의 상류층이 즐기던 승마 용품을 중심으로 라인을 전개하던 구찌는 말과 마차 수요가 줄고 기차와 자동차가 등장하는 시대 흐름에 발맞춰 1930년대 말부터 핸드백과 장갑, 신발, 벨트 등 패션 영역으로 사세를 확장한다. 이때 승마 용품으로 명성을 얻은 구찌의 상징성을 지킬 수 있도록 호스빗(Horsebit, 말 재갈) 장식과 등자 등의 요소를 디자인에 활용하면서 향후 100년간 이어질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확립하는 데도 성공한다. 1938년에는 이탈리아 패션의 중심지로 불리던 로마 콘도티 거리에 매장을 오픈하며 이탈리아 내 입지를 확고히 했다. 구초의 다양한 도전은 성공을 거뒀고, 그는 구찌를 단단한 초석에 올렸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2세대 구찌의 선택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에서도 구찌의 확장을 주도하는 중요 인물로 그려진 알도(알 파치노)는 구하기 쉬운 대마와 삼마, 황마를 엮어 짠 패브릭을 가방 소재로 삼았다. 이 패턴이 바로 구찌의 첫 번째 시그너처 프린트로 기록된 디아만테(Diamante) 캔버스다.
1940년대 후반까지 회복되지 않은 물자난을 극복하고자 고민하던 알도는 가죽을 대체할 소재로 일본산 대나무에도 주목했다. 그 결과 탄생한 아이템이 지금까지도 구찌의 시그너처 아이템이자 베스트셀러로 손꼽히는 뱀부 백이다. 알도의 명민한 선택에 힘입어 구찌는 1953년, 미국 뉴욕 58번가 사보이플라자호텔에 매장을 열면서 이탈리아 브랜드 최초로 뉴욕에 진출하는 역사를 쓴다.
아버지 구초가 1953년 사망한 후, 첫째 알도는 셋째 로돌포(제레미 아이언스)와 회사 지분을 50%씩 나눠 가지며 동업을 시작한다. 1960년대는 알도와 로돌포의 사업적, 디자인적 감각이 빛을 발하던 시기로 손꼽힌다. 알도는 미국 팜비치와 베벌리힐스, 일본 도쿄와 홍콩 등에 매장을 오픈하며 구찌를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시키는 데 앞장섰다. 동시에 아버지 이름 ‘구초 구치’ 머리글자를 딴 더블 G 로고를 만들어 다양한 제품군에 적용하며 디자인을 강화한다. 1961년 선보인 구찌의 호보 백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즐겨 들어 ‘재키 백’이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창업자의 셋째 아들 로돌포 역시 1966년 디자인한 ‘플로라’ 스카프가 큰 사랑을 받으면서 시그너처 프린트를 역사에 남기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성공적인 행보 덕분에 구찌는 그레이스 켈리, 재클린 케네디 외에도 프랭크 시나트라, 클라크 케이블, 리타 헤이워스, 마이클 케인 같은 당대 톱스타들이 열렬히 사랑하는 브랜드로도 자리매김했다.
가족 경영의 명과 암, 브랜드에 부여된 독자적인 생명

키어링그룹 홈페이지에서 사용하는 구찌 브랜드 캠페인 이미지

구찌의 뱀부백.
구찌 가문이 곧 브랜드 자체라고 믿었던 ‘패밀리’의 생각과 달리, 구찌 브랜드는 집안을 떠나 독자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 것. 얼마 지나지 않아 마우리치오가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자기 사무실 근처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구찌는 변화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2004년 프리다 지아니니를 크리에이터로 영입한 데 이어 2015년부터는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구찌의 개혁 방향키를 잡고 지금까지 순항하고 있다.
‘하우스 오브 구찌’로 본 구찌의 패션 코드 6
구찌 패밀리의 가장 호화로웠던 순간을 그려내기 위해 리들리 스콧 감독은 영화 의상 디자이너 잔티 예이츠와 손을 잡았다. ‘글래디에이터’를 비롯해 여러 작품에서 호흡을 맞추며 제73회 아카데미 시상식 의상상을 받기도 한 이들이 새롭게 되살려낸 구찌의, 구찌에 의한 스타일링.“정말 장관이었다. 내 인생에 다시 없을 기회였다.”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의상을 담당한 잔티 예이츠의 말이다.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던 파트리치아를 스크린 위에 되살리기 위해 제작한 의상만 70여 벌. 구찌 후계자 마우리치오를 위한 맞춤 슈트를 비롯해, 구찌 수장인 알도의 중후한 스타일링과, 디자이너를 자처하며 독특한 컬러와 소재의 믹스 매치를 일삼는 파울로의 파격적인 패션까지. 구찌 가문 아카이브를 재현하기 위해 제작한 의상이 무려 500여 벌에 달한다니 디자이너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첫 번째 스타일링, 구찌 아카이브 북에서 포착한 구찌 로고 룩

두 가지 아카이브 룩이 파트리치아의 의상으로 재탄생한다. 구찌의 시그너처인 인터로킹 G 로고를 패턴화한 슈트 한 벌과 실크 블라우스와 가죽 스커트로 구성된 투피스 한 벌이 바로 그 것.
이 두 벌의 옷은 영화에서 구찌를 향한 파트리치아의 짝사랑이 극적으로 치닫는 순간에 각각 노출된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구찌 패턴의 팬츠 슈트는 파트리치아가 구찌 브랜드를 도용한 카피 제품을 찾기 위해 뒷골목을 헤매고, 위조품을 확보한 후 남편 마우리치오와 시숙부 알도에게 카피 제품에 대한 해결책을 촉구하는 장면에 등장한다. 하지만 두 남자는 “구찌는 너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이라고 말하면서 파트리치아를 실망시킨다. 심지어 실크 블라우스와 가죽 스커트는 마우리치오로부터 이혼 통보를 받는 장면에 등장하며 눈길을 끈다.
파트리치아의 호화로운 스타일링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모피 코트와 함께 입은 리넨 캔버스 카프탄 원피스에 주목할 것. 영화 전반에 걸쳐 딱 두 피스만 등장하는 구찌의 아카이브 룩으로, 희소성을 가진다.
두 번째 스타일링, 첫 만남의 강렬함을 상징하는 빨간 드레스

세 번째 스타일링, 새 신부의 수줍음이 빛나는 생일 파티 드레스

네 번째 스타일링, 생 모리츠 스키장에서 펼쳐진 패션 라이벌전

다섯 번째 스타일링, 곳곳에서 등장하는 구찌 아이템

이후 사촌 형제간의 브랜드 사용권 다툼이 불거지면서 언쟁이 일어난 성당 앞 장면에서 파트리치아는 보라색 드레스에 블랙 컬러 페블 백과 네이비 컬러 실크 스카프를 매치해 글래머러스한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영화 후반부 내내 파트리치아의 얼굴 위에서 빛난 오버사이즈 선글라스 역시 구찌에서 오랜 시간 인기를 끌어온 아이템이다.
여섯 번째 스타일링, 로돌포의 역작 플로라 스카프

이 스카프는 1966년 처음 선을 보인 것으로, 모나코 왕비였던 그레이스 켈리가 선물용 스카프를 찾아 구찌 매장에 방문했던 일화와 관련돼 있다. 당시 구찌는 스카프 라인을 전개하지 않았는데, 이후 로돌포가 직접 나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였던 비토리오 아코르네로와 작업을 진행해 플로라 스카프를 완성했다. 이 디자인은 현재까지 꾸준히 재해석되는 구찌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구찌 유니버설픽쳐스 키어링그룹 홈페이지 하우스오브구찌 인스타그램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