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외젠 르느뵈의 그림, 화형당하는 잔 다르크(왼쪽). 파리 1구의 피라미드 광장에 있는 잔다르크의 기마상.
신의 목소리를 듣다
오를레앙 전투에서의 잔 다르크 - 쥘 외젠 르느뵈의 작품(왼쪽). 잉글랜드 헨리 보퍼트 추기경에게 심문을 받고 있는 잔 다르크 - 이폴리트 들라로의 작품.
1380년 프랑스 샤를 6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 시절 프랑스는 어지러웠다. 부르고뉴 지방은 영국과 손을 잡고 프랑스 왕실과 대립했다. 그러다 1420년 프랑스와 영국은 트루아조약을 체결했다. 샤를 6세의 딸과 영국 헨리 5세를 결혼시켜 그 아들을 영국과 프랑스의 왕으로 세우자는 내용이다.
1422년 샤를 6세가 죽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의 갈등에 불이 붙었다. 영국은 샤를 6세의 딸과 헨리 5세의 아들인 헨리 6세가 프랑스의 국왕임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프랑스 제후들은 샤를 6세의 아들인 왕세자 샤를을 왕으로 추대했다. 영국과 부르고뉴 연합 세력은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 영토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전역이 전쟁터가 됐다.
이때 한 시골 처녀가 나타났다. 프랑스와 국왕을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신비로운 여성, 바로 이 사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프랑스를 구해냈다. 잔 다르크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헤르베르트 네테는 1977년 독일 로볼트 출판사 인물 평전 시리즈의 하나로 ‘잔 다르크’를 내놓았다. 잔 다르크는 재판을 받으며 진술을 남겼고, 세상을 떠난 후 진행된 복권 재판 관련 인물들의 진술이 남아 있었다. 네테는 잔 다르크에 대한 재판 기록들을 통해 잔 다르크의 삶에 접근했다. 신화와 역사 사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혼란한 이야기들에 휩쓸린 잔 다르크의 생을 그의 책을 통해 살펴봤다.
1428년 프랑스의 오를레앙이 포위됐다. 당시 잔 다르크는 10대 후반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동레미는 부르고뉴와 인접한 지역으로 주민들은 영국과 부르고뉴 연합군의 습격을 피해 요새로 피신해야 했다. 피신에서 돌아오면 마을은 황폐해져 있었다. 프랑스 국왕 편이었던 동레미 청년들과 부르고뉴 편이었던 이웃 마을 청년들은 패싸움으로 피를 흘리곤 했다. 1428년 12월, 잔 다르크는 길을 나섰다. 왕세자 샤를을 정식으로 즉위시키고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서다.
잔 다르크가 신의 음성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열세 살. 어느 날 천사 성 미카엘을 보았다. 음성은 자주 들렸다. 프랑스로 가야 한다고 했고, 오를레앙의 점령군을 몰아내리라고 했다. 음성은 성채의 사령관에게 가라고 했다. 성채의 사령관은 처음엔 잔 다르크를 내쫓았지만 결국 기사들과 함께 잔 다르크를 왕에게 보냈다.
“하늘의 군주께서 맡긴 소임이 2가지 있소. 첫째는 오를레앙을 해방하는 일이고, 둘째는 왕을 랭스로 모시고 가 기름부음을 받고 즉위하게 하는 일이오.”
잔 다르크는 왕을 만나러 온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남장을 하고 머리를 짧게 깎은 채였다. 이때 잔 다르크는 믿기 힘든 일을 보여줬다. 잔 다르크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신하들 사이에 숨어 있던 왕을 찾아낸 것이다. 잔 다르크는 왕에게 영국에 맞서 전쟁을 지휘하겠다고 말했다.
잔 다르크는 화형장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3년 남짓 동안 영국군을 몰아내고 왕의 지위를 단단히 하는 목표를 향해 저돌적으로 나아갔다. 우회로를 택하려는 군대를 다그치고 앞장서서 오를레앙을 되찾았다.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의 해방이, 신이 보낸 사람이 자신이란 표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다음 왕의 대관식을 향해 돌진했다. 장관과 사령관들은 랭스로 곧바로 진군하는 데 반대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앞장선 군대는 영국에 넘어갔던 지역의 항복을 받으며 랭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샤를 7세가 대관식을 치렀다. 잔 다르크는 눈물을 터뜨리며 왕에게 엎드려 이제 샤를 7세가 프랑스의 국왕이라는 게 분명해졌으니 프랑스 전체가 그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관식 후 왕은 부르고뉴와 외교적 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신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소명인 파리 점령을 재촉했다. 그런데 파리 점령에 실패하고 잔 다르크는 부상까지 입었다. 왕이 평화 협상을 진행하는 중에도 잔 다르크는 영국이 점령한 도시들을 탈환하는 전투에 나섰다.
잔 다르크의 최후 전투는 믈룅에서 이뤄졌다. 믈룅은 부르고뉴인들의 주둔을 거부하며 잔 다르크 군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투에 나섰던 잔 다르크 군대가 성으로 다시 퇴각했을 때, 믈룅의 지휘관은 다리를 들어 올려 퇴각로를 막아버렸다.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인들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종교재판과 복권
잔 다르크의 랭스 입성 - 얀 마테이코의 작품.
열아홉 살의 잔 다르크는 당대 논리로 무장한 60명의 성직자와 학자들에 맞서야 했다. 심문의 초점은 주로 잔 다르크가 들은 음성들, ‘표식’을 통해 보장된 소명 그리고 남장을 했던 것에 맞춰져 있었다. 심문 과정에 관한 기록을 보면 신학적으로 파놓은 함정을 당당하게 피해가는 잔 다르크의 굳은 신앙을 느낄 수 있다.
다행히 재판부는 잔 다르크에게 고문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결과는 원래의 목적과 어긋나지 않았다. 루앙의 재판정에선 다음과 같은 잔 다르크의 죄가 낭독됐다. 음성들, 성인들과 가졌던 교류, 왕과 나눈 비밀, 예언, 남자 옷을 입은 것, 부모를 떠난 것, 자살 시도, 선동과 잔인함, 우상 숭배, 교회에 승복하지 않는 이단성 등이다.
다음 날 화형장에 끌려간 잔 다르크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전향 요구를 받아들여 다시 감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흘 후 잔 다르크는 다시 남자 옷을 입었고, 전향이 화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한 잘못이었다고 밝혔다. 이에 재판정은 이단자에게 마녀의 성질이 재발했기 때문이라며 결국 화형을 재결정했다. 1431년 화형은 집행됐고, 그의 뼛가루는 센강에 뿌려졌다.
그로부터 5년 후 샤를 7세가 파리를 되찾았다. 샤를 7세는 재심을 요청했다. 이에 교황청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 국제 정쟁에 끼어들기보다 잔 다르크 개인의 문제로 해결하려고 했다. 잔 다르크의 어머니가 교황에게 낸 청원을 받아들이는 게 그 방식이었다. 복권 재판은 앞선 재판을 무효화시켰다. 거짓과 중상과 악의와 모순으로 가득했고, 법안과 사안을 다루는 데 분명한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깃발을 흔드는 프랑스의 영웅
프랑스 오를레앙에 있는 잔 다르크의 집.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을 회복해 프랑스 영토를 되찾고 샤를 7세가 프랑스의 국왕임을 인정받게 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신의 음성은 조국 프랑스와 프랑스인들에게 평화를 안겨주기 위한 방법에 들어맞았다. 때는 15세기 중세 유럽, 신앙이 삶의 중심인 시대였다. 잔 다르크도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며 성장했다.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를 따라 경건한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신의 뜻으로 여겨지는 음성을 들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에 신이 자신들의 편이라는 표식을 선물했다. 프랑스 사람들이나 전투를 치러야 했던 프랑스 병사들에게 이보다 더 큰 격려는 없었다.
주목할 건 영국군으로부터 오를레앙을 회복한 후 다른 도시와 성들을 되찾으며 랭스로 나아갈 때 잔 다르크가 보여준 모습이었다. 죽어간 수많은 사람을 보고 잔 다르크는 울었다. 부상당한 포로를 괴롭히는 프랑스 병사의 잔인성에 괴로워했고, 말에서 뛰어내려 죽어가는 포로의 머리를 끌어안고 위로하기도 했다. 영국과 부르고뉴에 증오심을 갖게 됐지만 잔 다르크가 원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였다.
잔 다르크를 대표하는 상징은 칼이 아니라 깃발이다. 재판정에서 잔 다르크는 적이 공격해올 때 사람 죽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깃발을 들었고,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전투는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일이었지만, 평화를 얻기 위해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전쟁과 평화의 모순을 헤쳐나가려는 잔 다르크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용기
영화 ‘잔 다르크의 재판’(1962)(위),‘잔 다르크’(1999) 스틸컷.
다른 나라 사람인 나의 시선을 끄는 건 잔 다르크가 1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복권 심사에서 증언한 사람들은 잔 다르크가 부지런했고 겸손했고 자애로웠고 매우 경건했다고 진술했다. 외향적이라기보다 내성적인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머리를 자르고 남자 옷을 입으며 마음을 다잡았을 거다. 치마를 입은 채로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대하지 않을 거라고 우려했을 것이다. 여성 복장을 하고서는 너무 위험한 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든 그게 죽을죄 중 하나라는 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15세기를 살았던 잔 다르크의 삶이 21세기 현재에도 왜 반복적으로 읽히고 기려지느냐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주의를 먼저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잔 다르크에겐 애국주의를 넘어선 그 무엇이 존재한다. 전쟁에 맞서는 평화에의 소망, 지상의 교회에 맞서는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이고 보편적인 신앙이 아마 그 무엇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당당하고 독립적인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이 21세기에도 잔 다르크를 만나게 하는 것 아닐까. 잔 다르크는 자신의 신앙을 믿었고 자신의 행동에 떳떳했다. 깃발을 들고 맹렬히 전쟁터를 누빈 것처럼 잔 다르크는 자기 내면의 전쟁에서도 꿋꿋이 자존감을 지켜나갔다. 안과 밖의 전쟁에서 잔 다르크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오랜 세월 침묵을 지켰던 교황청은 1909년 잔 다르크를 복자로 추대했다. 이어서 1920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됐다. 그의 축일은 5월 3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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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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