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과 벚꽃이 활짝 핀 4월의 교정은 눈부시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보드랍다. 책 한 권을 가슴에 안고 사뿐히 걸어가는 여학생의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에 자리한 서울대 캠퍼스. 봄기운이 완연한 이곳에서 한국의 최고 지성으로 불리는 서울대 정운찬 총장(59)을 만났다. 취임 4년 만에 처음 본지 인터뷰에 응한 그는 교육문제로 고민하는 학부모와 서울대 진학을 꿈꾸는 학생들을 위해 아낌없는 조언을 들려줬다.
정 총장은 서울대 개혁을 주도한 냉철한 수장이기에 앞서, 어느 누구보다 자상한 스승이다. 지난해 봄학기부터 1학점짜리 ‘신입생 세미나’ 강의를 맡은 그는 학생들과 여러 문화공간을 찾아다니며, 대학생활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이번 학기 강좌를 듣기 위해 신입생들이 4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할 만큼, 그의 강의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난주 토요일 ‘신입생 세미나’ 코스를 수강하는 17명 학생들과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린 잠실 야구장에 다녀왔어요. 그날 황사가 심했지만, 두산이 3대 1로 LG를 이겨서 기분은 좋더군요(그는 두산 팬이다). 총장으로 취임한 2002년 이후 전공인 경제학 강의는 한 번도 못했지만, 요즘은 신입생들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렙니다.”
그는 신입생들에게 지성과 덕성, 감성을 겸비한 사람이 될 것을 강조한다. 그는 가슴보다 이성이 더 발달하고, 사회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가는 서울대생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놓는다.
“지성인이란 건설적 비판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최근 서울대 학생회가 쉽게 구성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참 실망스러웠어요. 지성인이라면 자신이 소속된 곳에 관심을 갖고 잘못된 것을 고치려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최근 학생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거든요.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덕성인의 모습도 갖춰야 합니다. 또한 어려운 사람을 보면 마음에서 우러나와 도와줄 수 있는 감성인이 돼야 합니다. 서울대생은 전철에서 구걸하는 시각장애인을 보면 ‘보건복지부에서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지 이게 뭐야’ 하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하지만 측은한 마음에 돈을 꺼내주는, 감성적인 사람이 우리 사회에는 더 필요합니다.”
관심 분야의 책은 깊이 있게, 다른 분야의 책은 넓게 읽는 ‘전방위 독서’ 태도 필요
서울대에 입학하려면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많은 학부모는 매해 달라지는 입시제도를 따라가기조차 버겁다고 호소한다. 고교 내신, 대입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 논술 및 구술 등 준비해야 할 시험도 많아 학생들의 학습부담이 크다. 정 총장은 이에 대해 “입학 전형이 다양화되는 만큼, 자신에게 유리한 전형 방식을 선택하면 준비하기 쉽다”고 조언한다.
“과거에는 모든 과목을 잘하는 학생들이 서울대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2008학년도 서울대 입시에서는 특기자 전형과 지역균형선발, 그리고 정시모집을 1:1:1의 비율로 조정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영어, 수학, 과학, 문학 등 한 분야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특기자 전형이고, 고교 내신으로만 학생을 뽑는 것이 바로 지역균형선발입니다. 내신, 수능, 논술시험을 치르는 기존의 전형이 바로 정시모집이고요.
앞으로 학생들은 모든 것을 잘하려들지 말고, 본인이 선택한 분야에 올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방 학생이라면 내신성적을 잘 받는 데 주력하고, 한 과목에 특출한 재능이 있다면 그 분야만 깊이 파고드세요.”
‘전방위 독서’는 정 총장이 가장 강조하는 입시전략이다. 2008학년도 입시에서 서울대가 통합교과형 논술시험을 도입하며 독서교육의 중요성이 보다 높아지고 있다. 자녀가 얼마나 많은 책을 어떻게 읽도록 지도해야 할까. 정 총장은 자신의 독서 철학에 대해 털어놓았다.
서울대 교정에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정운찬 총장. 그는 서울대 개혁을 주도한 냉철한 수장이기에 앞서 자상한 스승이다.
“독서가 굉장히 중요한데, 어떤 이는 정독(精讀)하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다독(多讀)하라고 권합니다. 저는 ‘정독과 다독을 다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깊이 파고들기 어려운 책이라면, 책의 표지와 목차라도 읽어두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할 때 ‘‘수호지’ ‘삼국지’를 읽어봤느냐’고 말을 꺼낼 정도는 돼야지요. 자신의 관심분야에 대한 책은 깊이 있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넓게 읽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정 총장은 1990년대 주요 일간지에 매주 칼럼을 기고하며,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알렸다. 이렇듯 명문(名文)이 탄생하기까지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글을 돌려 읽히며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글을 잘 쓰는 비결을 알려달라”는 부탁에 그는 “쓰고자 하는 분야를 잘 아는 것만큼 중요한 비법은 없다”고 답한다.
“제가 세상에 내놓은 글들은 타인에게 읽히며 수없이 고친 것입니다. 목요일에 실릴 칼럼을 쓰기 위해 그 전 주 토요일부터 글을 썼는데, 처음 완성된 원고는 가장 먼저 아내에게 보여줍니다. 보통사람인 아내가 이해한다면, 다른 독자도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들과 딸에게, 그 후에는 제가 가르치는 대학원생과 학부생에게도 글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의견을 묻습니다. 글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작업인 만큼 남에게 수차례 보이면서 다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잘 쓰고 말을 잘하려면 역시 전달하려는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지식이 많으면 말과 글은 잘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3월 청와대는 홈페이지의 ‘비정한 사회, 따뜻한 사회’ 코너에 게재한 ‘교육 양극화, 게임의 법칙’이란 글에서 교육 불균형을 정면으로 문제 삼았다. 지난해 서울 강남 고교생의 서울대 진학률이 강북의 최고 9배나 되며, 서울과 지방의 서울대 진학률 차이도 최대 5배나 된다는 것. 이는 ‘부잣집 자녀일수록 공부도 잘한다’는 통념을 그대로 보여주는 수치다.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온 것일까. 정 총장은 이러한 우려에 대해 적극 반박한다.
“서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5%인데, 서울대에서 서울 출신 학생 비율이 대략 40%를 차지하더군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2005학년도부터 도입한 것이 바로 내신으로만 학생을 선발하는 지역균형선발제도입니다. 특히 2008학년도부터는 지역균형 선발비율을 지금의 20%에서 33%까지 늘려 지방 학생들의 소외 문제를 극복할 생각입니다.”
사교육 많이 받은 학생일수록 대학 진학 후 받는 성적은 낮아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바로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다. 고액 과외를 시켜서라도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은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 사교육을 많이 받은 학생이 서울대 진학에 유리한 것일까. 그는 “자녀의 삶을 중장기적으로 볼 때, 과외를 억지로 많이 시키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 역시 아이들이 원할 때는 학원에 보냈습니다. 개별과외는 시키지 않았습니다만(웃음). 대학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과외를 받는 것이 더 유리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과외로 성적을 올려 대학에 입학한 학생은 대학에서 공부를 잘 못해요. 과외를 받느라 지쳐서 상급학교에 와서는 공부를 안 하게 되는 거죠. 서울대 신입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사교육을 많이 받은 학생일수록 대학 성적이 낮다는 통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총장 취임 후 “서울대를 지식 전수기관이 아니라 지식 창출기관으로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른 국가의 산업을 따라잡기 급급하던 과거에는 대학이 ‘지식 전수기관’에 머물렀지만, 몇몇 산업이 세계 1, 2위를 다투는 현 시점에서 대학은 지식창출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 지식 습득에 능한 공부 기계가 아니라 ‘창조적 마인드’를 지닌 인재를 키우는 것이 바로 서울대의 목표다.
“서울대를 지식 창출기관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네 가지가 필요합니다. 창의성 위주의 교육을 실천하며 기초교육을 다지고, 학교 규모를 슬림화하며 대학원 교육을 강화하는 겁니다.
서울대 대학본부 총장실에서 만난 정 총장은 “서울대는 지식 전수 기관이 아닌 지식 창출기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대학을 슬림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 서울대 학생은 모두 2만9천 명에 이르는데 3~4년 뒤에는 2만4천 명까지 줄일 예정입니다. 미국의 하버드대도 총원이 1만6천~1만7천 명에 불과하거든요. 서울대 역시 총원을 2만 명까지 줄여야 진정한 지식 창출기구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 총장은 재임기간 동안 ‘서울대의 국제화’에 큰 공을 들였다. 서울대는 미국 명문 사립인 프린스턴대와 국내 처음으로 ‘카운터파트 프리(맞교환 대상자가 없어도 되는)’ 방식의 학생교류 프로그램을 만들고, 오스트리아 빈 국립대에는 정규 한국학과를 설치하는 등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했다. 미국 예일대도 서울대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정 총장은 서울대생 20여 명을 예일대에 보냈다. 서울대는 세계 대학 평가에서 100위권 밖이었지만, 지난해 영국 ‘더 타임스’가 선정하는 ‘세계 상위 대학’ 순위에서 드디어 93위를 기록했다. “정 총장의 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글로벌 인재가 각광받는 요즘, 많은 학부모는 자녀를 일찌감치유학 보내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에 빠진다. 서울대 역시 해외 유수 대학과의 교류를 넓히며 국제 감각을 갖춘 엘리트를 키우는 데 주력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자녀에게 국제 감각을 키워줄 수 있겠냐”는 질문에 정 총장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줬다.
“세계 시장에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상을 글로벌 인재라고 일컫는데, 이는 반드시 외국어를 잘하거나 다른 나라 사람과 금방 친해지는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글로벌 인재란 세계 어느 곳에서도 현지인의 삶에 잘 적응하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세계공통의 재능, 즉 상식과 교양을 기본적으로 갖춘 이를 말합니다.
글로벌 인재란 세계공통 재능인 상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
영어가 외국인처럼 유창하지 않더라도, 실속 있는 컨텐츠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전공 분야를 누구보다 깊이 있게 알고, 세계인으로서 기본 소양을 갖췄다면 세계무대에 나설 때 두려움이 없겠죠.”
오는 7월19일 퇴임하는 정운찬 총장은 총장직에서 물러나면 다시 경제학 교수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자녀의 진로문제로 고민하는 학부모에게 의미 있는 조언을 남겼다.
“최근 의대나 법대로 인재들이 몰리는데, 학부모께서는 ‘인기학과에 사이클(순환주기)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1960년대에는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시험쳤다가 떨어진 것조차 자랑이었는데, 지금은 과거만큼 경쟁이 치열하지 않거든요.
의사나 법조인이 잘 나간다고 해서 적성을 고려하지 않고 의대, 법대에 진학한다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미래를 예측하며 적성에 맞는 전공을 택한다면, 자녀의 삶이 더 행복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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