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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이두식 교수의 어린이 미술교실

“아이가 만화만 그려도 걱정하지 마세요”

구술정리·장옥경‘자유기고가’ / 사진ㆍ홍중식 기자

2006. 02. 15

아이들이 만화만 그린다며 걱정하는 주부들이 많다. 하지만 만화는 아이들이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그림 소재이며 만화를 그리면서 감수성과 창의력이 풍부해질 수 있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아이가 만화만 그려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게 뭐야?”
“포켓몬이에요. 주인공 지우가 피카추와 웅이, 이슬이와 여행을 떠나는 거예요.”
“이건 디지몬인가?”
“(고개를 끄덕이며)네. 포켓몬과 디지몬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거예요.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제 생각에는 디지몬이 이길 것 같아요.”
일곱 살 된 아이는 스케치북을 펼쳐 보이고 “이건 굼비라몬(쥐), 마구라몬(원숭이), 마니라몬(용), 미히라몬(호랑이), 바지라몬(소)…”이라고 줄줄이 이름을 말하며 “이게 모두 십이신장 디지몬이에요”라고 한다.

아이들은 만화를 통해 감성 키우고 사고의 폭 확대해
“아이가 만화만 그려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자라면서 다양한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는데 그러면서 가장 먼저 빠져드는 것이 바로 만화다. 만화 영화, 만화책, 만화 속 캐릭터를 보면서 아이들은 감성을 키우게 된다. 또 만화를 통해 동물이나 식물, 인물과 가족들의 캐릭터를 인지하고 스토리를 만들며 사고의 폭을 확대하게 된다. 이렇게 연상 작용을 해나가다 보면 어른들의 시각에서는 매번 같은 내용으로 보이는 만화가 아이들의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만화 영화나 만화책을 여러 번 반복해 보면서도 지루해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흔히 접하는 인형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속의 캐릭터 등 아이들의 주변에는 항상 만화적인 요소들이 있다. 때문에 손재주 있는 아이들이 만화를 즐겨 그리는 일은 전혀 이상하거나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친근한 만화 주인공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표현하는 것’ 자체가 미술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대부분 미술가 하면 세잔, 피카소, 샤갈, 마네, 모네 등의 대가들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가들도 어렸을 때는 만화적인 요소를 그려냈다. 표현하는 방법만 달랐을 뿐이다. 미술을 저급과 고급으로 나누어 만화를 저급한 쪽으로 분류하려는 시각들도 있지만, 나는 이런 시각에 동조하지 않는다. 만화는 절대 저급하지 않다. 미국의 대표적인 팝 아티스트 리히텐시타인은 만화를 작품의 주제로 삼기도 했다. 또 피카소의 후기 걸작인 ‘게르니카’에도 만화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돼 있다.
만화를 가볍다고 해서는 안 된다. 만화 속에는 다양한 해학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도 담겨 있다. 누구나 어릴 때는 왕자나 공주가 되기를 꿈꾼다. 남자아이의 경우 태권브이나 공룡이 돼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기도 한다. 또 만화를 그리면서 묘사력도 함께 좋아진다. 여기에 스토리까지 덧붙이게 되면 문학적 소양도 저절로 키울 수 있다.

“아이가 만화만 그려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만화를 통해 왕자나 공주가 되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등 상상력을 기르게 된다.


만화에 몰두하던 아이들도 중학교 진학하면 대개 새로운 관심 분야 찾아
얼마나 흥미를 가지고 있느냐의 정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흥미를 많이 느끼는 아이들은 만화를 꽤 오랫동안 그린다. 보통은 초등학교 5~6학년에 이르면 만화와 만화 아닌 그림을 구분하는데 일부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만화를 그려서 부모를 걱정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6학년까지 만화를 그려도 괜찮다고 본다. ‘아이가 만화만 그리는데 어떻게 하나’라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아이에게 만화를 그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창의력을 막는 것이다. 아이가 만화를 그려놓고 얼토당토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다”고 칭찬해주는 것이 좋다. 만약 학업에 지장이 있다면 약간의 방향을 돌려주는 정도의 테크닉이 필요하겠지만 그 이상의 개입은 바람직하지 않다.
저질 만화만 아니라면 만화를 그리는 시기가 오래가고, 거기에만 몰두를 해도 큰 문제가 아니다. 엄마는 그저 아이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해주는 것으로 족하다. “지금 그린 공주가 아까 그린 공주보다 예쁘네” 하는 식으로 아이 그림에 같이 관심을 가져주면 된다.
아이들은 대체로 인지능력이 성장할 때, 호기심이 많아질 때 만화를 많이 그리게 된다. 일종의 통과의례일 수 있다. 초등학교 때 만화를 열심히 그리던 아이들도 중학교에 가서 새로운 관심 분야를 찾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만일 이때도 여전히 만화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면 만화가가 되는 길을 밟을 수도 있다. 만화도 미술의 일종이다. 미술과 다른 점은 거기에 스토리와 드라마가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정리하자면 아이가 하루 종일 만화만 그리거나 일 년이고 이 년이고 계속 만화를 그려도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두식 교수는요
“아이가 만화만 그려도 걱정하지 마세요”

홍익대 미대 학장. 1947년 경북 영주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화가를 꿈꾸는 아들 손을 잡고 해마다 기차로 8시간 거리인 서울로 국전을 보러 올 만큼 열정적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정성 덕분에 그는 과외 한 번 받지 않고 서울예고에 합격했고 홍익대 등을 거치면서 추상미술 분야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2000년 이탈리아 로마 플라미니오 지하철역에 아시아 화가로는 처음으로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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