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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behind atelier

지금 가장 핫한 가구 디자이너 문승지

이진수 기자

2022. 08. 26

요즘 가장 잘나가는 가구디자이너를 꼽으라면 단연 1991년생 문승지다. 모던 가구의 성지 덴마크, 그것도 왕실 국고에 그의 의자가 보관돼 있다는 사실. 스물두 살 되던 해 한국 가구 디자인의 미래를 전 세계에 알린 그가 첫 개인전 ‘조각모음’을 열었다.



“혹시 사진 촬영할 때 셔츠를 입어야 하나요? 사무실에서는 셔츠를 잘 안 입어서, 지금의 편안한 차림이 더 좋거든요.”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문승지(31) 작가의 사무실에서 검정색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그가 물었다. 자유분방하고 주관이 뚜렷할 것 같은 느낌. 기자가 만난 문승지 작가의 첫인상이다. 그는 전날 호우로 사무실 일대가 침수돼 퇴근하는 데만 6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눈빛에서 생기가 돌았다. 막힘없는 언변에서 작품에 대한 그의 열정과 확신이 읽혔다.

제주 소년, 서울을 꿈꾸다

“운의 연속이에요.” 자신의 이력을 가리키며 문승지가 건넨 말이다. 그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다. 가구를 공부하기 전까지 그저 운동 좋아하고 수업 땡땡이도 자주 쳤던, 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대학도 성적에 맞춰 제주대 디자인 관련 학과에 진학했다. 이루고 싶은 꿈도, 목표도 딱히 없었다. 그랬던 그를 서울로 이끈 건 ‘바다에 갇혀 살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학과 교수님이 ‘방학 때 서울에 가서 전시를 보고 오라’고 하시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차라리 서울에서 공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고 계원예술대학교 감성경험제품디자인(현 리빙디자인)과에 지원해 합격했어요. 이후 가구 디자인에 발을 들여놓게 됐죠.”



디자인과에 입학하려면 그림 실력을 갖춰야 하지 않나요.

원래 그림은 잘 그렸어요(웃음). 학생 때는 만화 그리는 걸 좋아했고, 미술 학원 알바도 했고요. 디자인에 대한 베이스는 없어도 평소에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어릴 때 과학상자 만드는 걸 좋아해서 발명진흥대회에서 상도 받았어요. 계원예대는 면접 100% 전형이라 미술 실력보다 면접이 더 중요했거든요. 면접을 두세 번쯤 봤는데, 운 좋게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어요.

그냥 운이 좋아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서울에 가고 싶다는 절박함이 커서, 그 모습을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바다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제주도 사람들은 그냥 촌사람이라고 생각했죠. 강남 스타벅스에서 맥북을 켜놓고 있는 모습이나 한강에서 캔 맥주 마시며 노는 모습을 머리로만 그려보곤 했어요. 촌놈이 한 번씩 꿈꿨던 로망, 그런 거죠. 서울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정말 컸어요.

디자인 중에서 특별히 가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뭔가요.

서울에 와서 돈(생활비)을 벌어야 하니까 방과 후 근로 장학생 아르바이트로 금속 제작실에서 일했어요. 그때만 해도 가구에 관심이 없었고, 수업이 끝나면 제작실 가서 학생들이 기계 사용하는 걸 보조해주는 정도였죠. 당시 용접기나 기계를 마음대로 쓸 수 있었는데, 종종 일 끝나고 배운 대로 (기계를) 만져보곤 했어요. 어느 날 제가 그 기계들을 사용하면서 엄청나게 몰입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시간이 금방 지나가더라고요. 남들은 용접하는 게 어렵다고 하는데 저는 일하면서 학생들을 도와주려면 배울 수밖에 없잖아요. 하나둘씩 사용하다 보니까 ‘철이 이렇게 붙으면 튼튼해지는구나’ 스스로 터득하고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가장 빨리 만들 수 있는 게 ‘가구’ 였고요.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가구 공부는 어떻게 했나요.

그때 저희 학교 가구과에 계셨던 디자이너 하지훈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이전에 한번 교수님 수업을 청강한 적이 있었죠. 교내에서 유명하셨거든요. 교수님께 “가구에 관심이 생겨서 부전공으로 가구를 하고 싶다. (가구과) 졸업 작품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안 된대요. 수업은 들을 수 있는데 졸업 작품은 자기 학과 것만 해야 한다고요. 교수님한테 학과 것도 하고, 가구도 한다고 했죠. 그 이후로 교수님 밑에서 가구를 배웠고, 결국 졸업 작품을 하게 됐어요.

의지가 대단했네요.

가구를 만드는 것, 그 자체로 멋있었어요. 하 교수님이 외부에서 모셔온 디자이너분들 작업을 보면서, 자기 이름을 걸고 디자인 스튜디오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웹사이트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서 따라 했어요. 제가 약간 ‘오타쿠’ 기질이 있거든요. 하나에 꽂히면 계속 찾아봐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멋있다고 느끼면 그의 모든 걸 다 검색해봐요. 언제 어떤 작업을 했는지, SNS까지 다 들어가서 보죠. 결국 교수님 덕분에 만난 가구 전문가들을 보면서 가구디자이너라는 꿈을 꾸게 됐어요.

미적 감각은 어떻게 키웠나요.

멋있는 걸 쫓아다녔어요. 옷 잘 입는 사람들을 좋아했고요. 10년 전쯤 옷 잘 입는 사람들의 ‘스트리트 패션’을 찍어 올리는 것이 유행했잖아요. 패션 사진 채널에 올라온 누군가가 저한테는 ‘인싸’ 느낌이었어요. 저도 패피(패션 피플)로 사진 찍히려고 많이 노력했고요. 스트리트 패션을 찍는 친구와 개인적으로 친해지기도 했죠. 그때 강남 가로수길을 처음 가봤어요.

좋아하는 것에 누구보다 열정적이던 문승지는 스물두 살 나이에 인생을 뒤바꿀 기회를 얻었다. 2012년 스웨덴 패션 브랜드 코스(COS)로부터 “전 세계 코스 매장 윈도에 작품을 전시해보자”는 제안 메일을 받은 것이다. 졸업 후 개인 브랜드 ‘MUN’을 창업했다가 접고, 엠펍이라는 애견 가구 브랜드를 운영하던 중 무턱대고 외신 기자들에게 제품을 노출해달라고 보냈던 메일이 효과를 발휘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 등 굵직한 매체에 해당 가구 기사가 실린 덕분에 문승지 작가의 존재는 스웨덴에까지 알려졌다. 합판 1장으로 만든 그의 대표 작업 ‘포 브라더스(Four Brothers)’(2012)가 영국 런던 매장에 전시됐다. 그는 “운이 좋았다”며 겸손해하지만 그 이면에는 남다른 실행력이 있었다.

문승지의 존재감, 팀 바이럴스

이번 ‘조각모음’ 전시 작품은 광주 워크숍, 양주 공방, 인사동 호텔 작업실 등을 거쳐 탄생했다.

이번 ‘조각모음’ 전시 작품은 광주 워크숍, 양주 공방, 인사동 호텔 작업실 등을 거쳐 탄생했다.

인터뷰가 진행된 곳은 문승지와 12명의 디자이너가 함께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 레이블 ‘팀 바이럴스’ 사무실이다. 2017년 그는 정창기와 정석병 2명의 공동대표와 함께 디자이너에 의한, 디자이너를 위한 팀을 꾸렸다. 두 해 전 그가 다녀온 덴마크 유학의 영향이 컸다. 유명 가구 브랜드 취업을 희망하던 유학생 문승지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머물 당시 평소 그가 동경하는 프랑스 스타 디자이너 레미 클레멘테와 SNS를 통해 친분을 쌓았다. 레미의 초대를 받아 그의 파리 스튜디오를 찾아간 문승지는 그곳에서 자유와 존중이 머무는,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디자이너 삶의 현장을 목격했다. 순간 ‘취업을 위해서가 아닌 내 것을 하기’로 결심한 그는 ‘어떻게 해서든 나만의 스튜디오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팀 바이럴스는 어떤 팀인가요.

매니지먼트·공간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마음 맞는 형들을 만나 만든 팀이에요. 팀 전체가 하나의 공동 프로젝트를 하고 있고요. 이전에는 디자이너가 개인 작업을 하면서 필요할 때 뭉치곤 했는데 규모가 커지면서 프로젝트만 진행하고 있어요. 한국은 디자이너가 항상 클라이언트보다 저자세인 문화가 있는데, ‘디자이너들이 모여 크리에이티브한 걸 더 재밌게 해보자’는 취지로 만든 팀이자 디자이너 매니지먼트예요. 보수도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일에 대한 이야기도 당당하게 하자는 거죠.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서 공간, 오브제, 브랜딩 세 분야로 팀이 나뉘어 있어요. 아직 큰 회사가 아니라, 소속 디자이너 본인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할 수 있게 판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저희 대표들 작업을 선두로 다 같이 달리고 있습니다.

삼성 프로젝트 프리즘, 블루보틀 제주 등을 진행한 서울 작업실은 어떤 곳인가요.

이곳은 실용에 최적화된 공간이에요. 작업실이 아닌 그야말로 오피스인데, 제가 하는 대부분의 작업이 이 자리에서 나와요. 내 디자인을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곳이죠. 주로 컴퓨터로 작업하고 디렉팅하는 헤드쿼터(사령부)라고 보시면 돼요. 저희가 만드는 공간과 작품 디자인 모두 여기서 이루어지는, 팀의 핵심 공간이죠.

최근에 팀 실험실을 계약했다고 들었어요.

거기는 랩(Lab), 실험실이에요. 사무실에서는 생각과 아이디어 키워드를 뽑아내는 일을 해요. 창작성을 발휘하는 데 사무실은 한계가 있어서 공장이 몰려 있는 경기도 광주 한 곳을 계약했어요. 거기는 뭔가를 직접 만들고 실험도 해보는 샘플 작업을 위한 공간이 될 것 같아요. 작업 과정을 직접 촬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죠. 아이디어 보드에 써놓은 키워드가 실물로 눈앞에 나올 때가 참 좋아요. 내가 생각했던 구조나 개념이 물체가 됐을 때 느끼는 희열, 그게 좋아서 이 직업을 선택했죠.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인사동 인근 호텔에서 작업했다고 들었어요.

작업하다 잠들 수도 있고, 모든 걸 한 번에 해결해줄 곳이 필요했어요. 전시 준비 기간이 짧아서 떠돌아다니는 걸 줄이자는 생각이었죠. 마침 호텔 지하에 큰 스튜디오가 있어서 뭘 매달아 보거나 할 수 있었거든요. 제가 사무실에서 하는 일 말고, 제 작업을 오롯이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요.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작업하다가 출근하고, 다시 퇴근해서 작업하고 그랬죠.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든 작업실이 될 것 같아요. 종종 찾는 공간이 있나요.

작업하러 가는 건 아니고, 아이디어를 얻고 싶을 때 절에 가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숲속에 있으면 대자연의 조화로운 에너지가 느껴지거든요. 차분해지는 공간을 일부러 찾는 거죠. 1년에 두세 번 가는데, 한 번 가면 2~3일씩 있다 와요. 강원도 평창에 있는 월정사는 인테리어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곳 스님과 인연이 닿아서 찾는 곳이에요. 종종 스님과 함께 차를 마시고, 고민이나 그간 살아온 얘기를 털어놓으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도면을 실물로 만드는 가구 공장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제가 작업하는 건 직접 다 만들 수 있지만, 산업 베이스의 작업이기 때문에 제작은 저보다 더 잘하는 전문가분들께 맡겨요. 어느 정도 공예가 수반된 작업은 제가 하는 게 더 나을 때도 있고요. 예를 들어 선을 하나 수정하려면 전체 작업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경우가 생겨서 비용적인 문제도 있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이 닥치거든요.

나와 맞는 공장을 찾는 게 중요하겠어요.

저희는 공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샘플링을 하는 샘플실이라고 불러요. 초반에는 수십 군데를 돌아다녔어요. 새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콘택트해보고 잘 맞으면 수 년을 함께해요. 반대로 ‘한계가 있다’고 느끼면 다른 곳을 찾아요. 시간이 흐르면 기술도 바뀌잖아요. 당연히 좋은 기술을 가진 업체를 선호하죠. 누군가 좋은 업체를 소개해주기도 하고요. 그 과정이 이 일을 하면서 제일 재밌었던 것 같아요. 동일한 작업물이라도 업체마다 작업 방식이 다르거든요. ‘여기서는 이렇게 휠 수 있는데 저기는 반대로 휘네’ 하면서 또 다른 아이디어를 얻어요. 그렇게 계속 공부하는 거죠.

쌓이고 스미는 삶과 작업의 레이어

문승지의 아이디어가 이미지로 구현되는 ‘팀 바이럴스’ 사무실 책상.

문승지의 아이디어가 이미지로 구현되는 ‘팀 바이럴스’ 사무실 책상.

문승지의 작업 과정은 촘촘하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키워드를 아이디어 보드 형식으로 적는다. 텍스트가 이미지로 넘어가는 단계. 생각을 좁혀나가며 이 무드 작업을 두세 번 거친다. 스케치 형태가 나오면 컴퓨터 평면 작업으로 넘어갈 차례. 캐드를 활용해서 도면 작업을 하고, 그걸 다시 3D로 작게 목업(mock up·실물 모형)을 만든다. 완성되면 제조 공장에 찾아가서 도면과 데이터로 샘플을 만들어보고 형태와 강도, 구조를 체크한다. 이후 생지 목업을 제작해 컬러를 입혀보고 실제 작업물이 나오기 직전의 것을 만들어낸다.

그런 그의 작품 중에서 유독 의자가 눈에 띈다. 앉는 부분이 넓고 평평한데 짧은 듯 높은 등받이가 있는 그런 의자. 그의 SNS를 봐도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이 많은 건 기분 탓일까. 롯데갤러리 동탄점에서 열린 ‘조각모음’ 전시에서도 작가의 대표 의자 작업인 ‘포 브라더스’를 비롯해 색을 적용한 신작을 만나볼 수 있었다. ‘조각모음’의 핵심은 가능성. 표준 규격 합판 1장을 부스러기 한 톨 낭비 없이 모두 사용해 만들어낸 사물은 작가의 독창적인 디자인 철학을 담고 있다.

의자 작업을 자주 하시네요.

하다 보니까 의자가 재밌더라고요. 가구 브랜드를 항상 모니터하는데, 역사 있는 브랜드를 보면 스탠더드 의자 디자인이 하나씩 있어요. 왜 그런지 궁금하더라고요. ‘왜 이런 의자가 프리츠 한센(덴마크 가구 브랜드)의 아이콘이 됐을까?’ ‘비트라(독일 가구 브랜드)는 왜 이런 의자를 만들었을까?’ ‘소파보다 왜 의자가 유명한 걸까?’ 그건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작업하고 있고요.

‘스탠더드 체어’를 좋아하는 걸로 아는데, 좋은 디자인의 의자는 어떤 건가요.

스탠더드 체어는 (제 작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자인데요. 누구나 가질 수 있어야 해요. 가구 공부를 시작한 지 10년 정도 됐을 때 찾은(좋은 디자인에 대한) 해답은 ‘웰메이드’예요.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사물이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이 의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스토리도 있어야 하고요. 만드는 사람의 삶이 작업에 투영돼야 좋은 의자라 생각해요. 그 예로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노블록 의자를 디자인의 본보기로 삼아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산업디자인을 하면서 양산을 적용하면 힘들더라고요. 플라스틱으로 의자를 양산하는 공장에 가면 덩어리가 만나서 의자를 찍어내는데, 정말 신세계예요. 모노블록 의자를 금형 개념으로 접근했고, 찍어내면 의자가 된다는 걸 설계한 거예요. 그 과정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정말 어려운 디자인 작업이라는 게 보이더라고요. 스스로에게 자극제가 되는 가구예요. 심지어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고, 해변이나 편의점 등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잖아요. 앉았을 때 편하기까지 하고요. 전 세계 사람이 그 의자에 한 번씩은 앉아봤을 거예요.

문승지의 스탠더드 의자는 탄생했나요.

탄생하고 있죠. 지금도 계속 만들고 있어요. 다만 이걸 잘 버무려서 소비자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최근 팀 바이럴스에서 가구 브랜드를 만들고 있어요. 거의 다 만들었는데 출시일은 아직 안 정해졌어요. 팀 프로젝트의 메인은 아니고, 브랜드를 별도 운영해볼 계획이라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롯데갤러리 동탄에서 열린 ‘조각모음’ 전시장 풍경과 ‘포 브라더스’ 작품(아래).

롯데갤러리 동탄에서 열린 ‘조각모음’ 전시장 풍경과 ‘포 브라더스’ 작품(아래).

이번 ‘조각모음’은 문승지가 작가로서 연 첫 전시다. 이전에도 간송문화재단, 파라다이스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 파라다이스 ZIP 등에서 2010년부터 꾸준히 전시를 해왔다. 삼성, 까르띠에 등 유명 브랜드가 앞다퉈 찾는 디자이너지만, 이제껏 만든 디자인 사물을 가지고 예술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처음이다.

첫 전시 소감이 궁금합니다.

개인 작업 전시는 (궁극적인) 제 목표예요. 이 일을 왜 이렇게 열심히 하겠어요(웃음). 오롯이 온전한 내 이름을 가지고 천천히 하고 싶은 걸 하는 디자이너가 되는 게 저의 최종적인 모습이에요. 그런데 개인 작업을 지금부터 몰두해서 하고 싶진 않고, 속도가 느릴 뿐 조금씩 해나가는 과정 속에 있어요. 팀 바이럴스를 통해 (디자이너를 위한) 시스템을 다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내 창의력을 최대치로 발현하고 싶어요.

작가와 디자이너의 경계에서 그 역할의 차이가 어떤 것 같나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아직도 어려워요. 어떤 사람은 작가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디자이너라고 부르는데요. 저는 작가라고 불리는 걸 민망해하는 사람이고, (아직은) 디자이너가 좋아요. 제가 그 단어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요. 어떻게 역할을 나누는지 몰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냥 저는 디자인을 계속하는 사람이에요. 삶의 레이어가 많은 사람인데 굳이 분리해야 할까요. 멀티로 하는 게 재밌고, 그냥 이렇게 활동하고 싶어요. 아직도 제가 ‘나는 작가예요’라고 먼저 소개해본 적이 없어요.

요즘 20대들은 작가님을 ‘힙’하다고 표현해요.

저희가 지금 디자이너를 구하고 있는데, 면접 좀 보러 왔으면 좋겠어요(웃음). 사람을 못 구하고 있어요. 협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데, 디자이너가 없네요. 자기 이름을 걸고 작업하고 싶은 친구들은 들어왔다가 많이 나가요. 저도 제 이름을 걸고 하지만, 그 뒤에서는 팀원들이 함께 도와주고 있거든요. 이번 전시도 그렇고요. 그 친구들은 시스템이 있다는 걸 모르고 들어온 거죠. ‘팀 바이럴스’라는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걸 보는 순간 못 버티고 나가더라고요. 그런 점이 아쉬워요.

최대치의 능력을 발현하는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요.

일단 제주도에 살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작업하는 데) 공간 제약이 없을 것 같고, 국가의 제약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시간도요. 아시겠지만 정말 많은 돈이 필요해요(웃음). 저는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계속 일하고 싶어요.

평면에서 시작된 그의 작업은 언젠가 평면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건 문승지가 가구를 만드는 일.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작업을 잘 쌓아가고 있다. 오랜 고민을 통해 더욱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그의 작업을 기대해본다.

#문승지 #가구디자이너 #여성동아

문승지의 인생 터닝 포인트

제주 → 서울 → 유럽 → 서울
이 과정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지금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 제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유럽으로 갔을 때 모두 전혀 다른 삶을 경험했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매번 도전의 이유들이 있었는데, 새로운 곳에 감으로써 그 갈증이 해소됐다. 그때마다 나는 성장했고, 당시 옆에 있던 사람들이 내 성장을 도왔다.

제주에서 서울
로망 실현. 열망하던 서울에 와서 한강을 보고,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매일같이 힘들어도 꿈을 이루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무 살의 나는 항상 서울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꿈을 꿨다. 이때 만난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정말 편한 사이다.

서울에서 유럽
디자인에 관한 경험을 하면서 유럽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모습을 꿈꿨다. 꿈을 그렇게 하나씩 해결하면 또 다음 꿈이 생긴다. 어떤 사람은 ‘목표’라고 부르고 나는 ‘작은 꿈’이라고 하는데, 그걸 반복하는 것이 내 삶 아닐까. 외국에 있는 유명 디자이너들을 만났던 순간도 그랬다.

유럽에서 서울
지금의 창업자들을 만나 디자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팀 바이럴스를 만들었다. 6년째 하다보니 ‘우리 이름을 내건 무언가를 만듭시다’가 됐고, 이를 위해 지금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세 대표의 밸런스가 너무 좋다. 한 명은 일을 벌이고(나), 한 명은 정리하고, 또 한 명은 만들면서 (시스템이) 완벽하게 돌아간다.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롯데갤러리 문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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