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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업계가 여성 CEO를 사랑하는 이유

글 오홍석 기자

2022. 01. 24

5.8%에 불과한 국내 여성 CEO 비율, 그러나 IT업계를 중심으로 유리천장에 금이 가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차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났다. 아버지는 즉사했고 아들은 병원으로 이송됐다. 응급실 의사가 실려 들어온 환자를 보더니 “이 사람은 내 아들이니 반드시 살리겠다”고 한다. 이 의사는 환자와 어떤 관계인 걸까?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이 수수께끼의 답은 ‘엄마’다. ‘의사는 남성의 직업’이라는 고정관념을 꼬집은 수수께끼인데, 알고 보면 의사보다 더 남성 일색인 직업군이 있다. 기업을 이끄는 최고경영자(CEO)다. ‘2021 보건복지통계연보’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국내 의사 수는 12만242명. 이 가운데 여성은 3만240명(25.1%)이다. 반면 CEO랭킹뉴스에 따르면 금융업을 제외한 국내 상장사 748곳 가운데 여성 CEO는 46명(5.8%)에 불과하다. 이토록 공고한 ‘유리천장’에 금이 가고 있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IT(정보기술)업계다.


IT업계에서 불어오는 여풍

여풍(女風)은 외국계 IT 기업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 ‘알테어’는 1월 7일 신임 한국지사장으로 유은하(52) 씨를 임명했다. 알테어 창사 이래 아시아태평양지역에 여성지사장을 선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알테어는 미국 소재 다국적기업으로 주된 사업 분야는 인공지능(AI)을 이용한 데이터 분석, 클라우드 컴퓨팅이다. 유 지사장은 1994년에 삼성SDS 입사 이후 PTC코리아와 앤시스코리아, 다쏘시스템코리아 등을 거쳐 2017년 한국알테어에 합류했다. 이후 소프트웨어 사업 전반을 담당하며 전문성과 업무 역량을 인정받아 지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SAP코리아도 올 초 여성 CEO 임명 소식을 알렸다. 1월 6일 신은영(56) 현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부사장을 신임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한 것. SAP는 독일에 기반을 둔 소프트웨어 업체로 비즈니스 애플리케이션 제작과 클라우드 컴퓨팅 분야에 강점이 있다. 신 대표는 1990년 컨설팅업체 PwC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뒤, 오라클코리아를 거쳐 2008년 SAP코리아에 합류했다. 그는 SAP코리아에서 여성 경력 개발을 돕기 위해 만든 ‘비즈니스 우먼 네트워크 프로그램’을 이끄는 등 여성 임직원들의 멘토로도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 8월부터 어도비코리아를 이끌고 있는 우미영(55) 대표도 IT업계에서 주목할 만한 여성 CEO다. 우 대표는 경력 30년이 넘는 베테랑으로 시트릭스 한국지사장, 퀘스트소프트웨어 대표이사, 델소프트웨어 남아시아 및 한국 총괄,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부사장 등을 거쳤다.

이 외에 2020년 2월 취임한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이지은 대표도 있다. 이 대표는 컨설팅 기업 액센츄어에서 25년간 근무하다 2017년 한국마이크로스프트에 합류해 글로벌 사업부문장으로 일했다. 클라우드와 AI 등 최신 정보기술을 국내에 도입하고 적용하는 데 힘써온 인물이다.

국내 IT업체 중에서는 사피온코리아가 1월 10일 류수정(51) AI액셀러레이터 담당을 대표로 선임했다. 사피온코리아는 SK텔레콤이 사내 AI 반도체 사업 부문을 떼어내 독립시킨 신설 법인이다. 글로벌기업 사피온의 자회사로 한국 및 아시아 지역 사업을 담당한다. 류 대표는 AI 반도체 분야 석학으로,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병렬프로세서 구조를 연구한 뒤 2004년 삼성종합기술원에 입사했다. 이후 삼성전자 모바일 그래픽처리장치(GPU) 개발 담당 임원 등을 지냈고, SK텔레콤 입사 전에는 서울대 교수로 일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네이버도 최수연 글로벌 사업지원부 책임리더를 CEO로 내정해 화제를 모았다. 최수연 내정자는 1981년생으로 2005년 네이버에 입사해 마케팅 분야에서 근무하다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며 회사를 떠났다. 국내 변호사시험 합격 후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최 내정자는 2019년 법조인으로 네이버에 다시 합류했으며, M&A·자본시장·기업지배구조·회사법 등의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 내정자는 3월 네이버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거쳐 CEO로 취임할 예정이다.

국내 대표 소프트웨어 기업 한글과컴퓨터도 지난해 8월 김상철 한컴그룹 회장의 장녀 김연수(39) 씨를 새 대표로 선임했다. 김연수 대표는 2012년 한컴 입사 뒤 클라우드와 기업용 소프트웨어 시장 인수합병 등을 주도해왔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세력 확장하는 여성들

스타트업 업계에서도 최근 여성 CEO의 약진이 눈에 띈다. 지난해 11월 ‘동아일보’가 국민대 혁신기업연구센터와 함께 스타트업 창업자 1462명을 전수 분석한 결과, 여성 창업자 비율은 2011〜15년(회사 설립 기준) 7.5%에서 최근 5년 사이 12.1%로 늘었다. 여성 창업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김슬아(39) 마켓컬리 대표일 것이다. 마켓컬리는 지난해 7월 기업가치 10억 달러(약 1조7000억원) 이상의 기업을 뜻하는 ‘유니콘 기업’ 반열에 올랐다. 지난해 12월 기준 마켓컬리의 기업가치는 4조원으로 평가된다. 김슬아 대표는 골드만삭스, 맥킨지앤드컴퍼니, 싱가포르 국영 투자회사 테마섹홀딩스, 글로벌 컨설팅 회사 베인앤드컴퍼니 등에서 일하다 2014년 마켓컬리의 전신 ‘더파머스’를 창업했다.

스타트업 분야에서 주목받는 여성 CEO 가운데는 최근 ‘무신사’에 인수된 패션 e커머스 기업 ‘스타일쉐어’와 ‘29CM’의 윤자영(34) 대표도 있다. 윤 대표는 23세이던 2011년 스타일쉐어를 세웠고, 2018년 300억원을 주고 GS홈쇼핑으로부터 29CM를 사들였다. 스타일쉐어와 29CM는 각각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와 2030 여성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무신사는 지난해 8월 스타일쉐어와 29CM를 합쳐 3000억원에 인수했다. 경영은 앞으로도 윤자영 대표가 맡아 이끌어갈 전망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기반을 둔 에듀테크 기업 ‘에누마’를 이끄는 이수인(46) 대표도 눈에 띄는 여성 CEO다. 에누마는 3~9세 어린이가 부모나 교사의 도움 없이 읽기, 수학, 영어 등을 배울 수 있는 교육 소프트웨어 제작 업체다. 엔씨소프트 출신 이 대표가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남편 이건호 최고기술책임자(CTO)와 함께 2012년 창업했다.

최근 IT업계에 여성 CEO가 증가하는 원인은 뭘까. 안혜연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 이사장은 “그 배경에는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늘어나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가려는 경향과 여성 창업자 증가라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이다.

“외국 기업은 일찍부터 여성 직원의 경력 단절을 방지하는 제도를 마련해왔다. 여성이 고위직이 되는 것에 대한 편견도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국내에서는 그나마 IT업계가 이 흐름을 가장 빨리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창업 분야에서도 여성의 성공 사례가 축적되며 과거에 존재하던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 여성이 리더가 되면 기업 문화 및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된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기업이 여성 인재 발굴에 노력할 것이고, 그 결과 여성 CEO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SAP코리아·어도비코리아·마켓컬리·네이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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