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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프로 직장인 다이어리

마케터가 쓴 러닝 크루 1년 후기

나의 러닝 일지

방지연 LG생활건강 마케터

2022. 09. 14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의 시대. 운동을 해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1년째 러닝 크루 활동을 하고 있는 직장인이 보내는 러닝 예찬. 읽으면서 들으면 좋을 ‘브금(BGM)’은 S.E.S.의 ‘달리기’. 유치하지만 달리기가 그렇듯 구관이 명관이다.

내게 “요즘도 달리기해?”는 “잘 지내?”와 같은 의미다. 회사 동료들이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항상 이렇게 물으니까.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건 지난해 7월. 이제 1년이 조금 지났으니 연애로 치면 한창 좋을 시기다. 하기 귀찮고 힘들 때도 물론 있지만 좋을 때가 더 많다. 아마 앞으로도 권태기 없이 꾸준히 좋아할 것만 같다. 그래서 이 글은 달리기가 일상에 스며든 과정을 기록한 일지면서, 콩깍지가 벗겨지기 전 달리기에 보내는 내 연애편지다.

지난해 봄, 바뀐 팀과 직무에 새롭게 적응하느라 바빴다. 그동안 쌓아온 업무 지식이 초기화되고 다시 신입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나를 4년 차 직장인, 그러니까 대리급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에 맞는 업무가 주어졌다. 아직 공식도 채 암기하지 못했는데 당장 다음 날까지 몇 페이지의 심화 응용문제를 풀어 가야 하는 기분. 늦어진 진도를 쫓아가려면 쉬는 시간 틈틈이 학우들에게 보충 설명을 듣고, 야간자율학습을 할 수밖에 없다. 회사와 집만 오가며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벚꽃이 시들어 꽃잎이 흩날릴 때가 되고 나서야 봄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루는 목이 아파 방문한 정형외과에서 운동 부족을 지적당했다. 의사는 일주일에 최소 두 번, 30분씩이라도 땀 흘려 운동하기를 권했다. 당시 나는 업무를 익히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새로운 운동을 배우는 건 물론이고 피트니스센터 등록하는 것마저 새로운 과업처럼 여겨졌다. 그렇지만 매일 아침 출근 시간 타임어택을 위해 뛰는 걸 고려한다면, 달리기 정도는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러 러닝 크루들 중에서 뉴비(초보자)를 따스하게 대해줄 것만 같은 사람을 찾았다. “노을이 지는 시간, 서울 명소를 달린다”는 홍보 메시지가 또 다른 가입 이유다.

마음 대신 몸 고문하기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시작했지만, 진짜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정신 건강에 있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 처음에는 몸이 너무 힘들었다. 특별한 기술이나 암기가 필요하지 않아 진입장벽이 낮다고 생각한 걸 후회할 만큼. 다른 기구의 도움을 받지 않으니 내 몸의 투박한 움직임에 온 신경이 향했고, 정신을 가다듬기가 더 어려웠다. 러닝을 할 때마다 “쉬울 거 같아 선택했는데 오산이었다”며 친구들에게 푸념했다.

그런데 몸이 땀과 피로로 무거워지는 만큼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졌다. 에너지를 육체에 전부 소진하니 내적 갈등 같은 건 일어날 틈이 없었다. 몸의 고통이 회사가 주는 번뇌를 상쇄시켰다. ‘지금 잘하고 있는 게 맞나’ ‘지난번엔 왜 바보 같은 실수를 했을까’ 따위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일단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숨이 가빠지면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단순해지고, 복잡한 생각은 공기 중으로 분해돼 간결해졌다.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는 응원하는 것만 좋아하는 편이다. 팀을 이뤄야 하는 스포츠에는 최대한 참여하지 않는다. 운동신경이 좋지 않아 내가 그라운드에 진출하면 팀의 승률이 낮아지기 때문. 혼자 하는 경기에서 지는 것이야 문제가 아니지만, 팀에 민폐를 끼치면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성격이 어디 가겠나. 회사에서도 팀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과 절대 민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부담감으로 어느 순간 내 역량과 상관없이 ‘예스맨’이 돼 있었다.

러닝 클럽 뉴비 시절에도 페이스가 느려져 그룹에서 뒤처질 때마다 짐이 될까 걱정했다. 기우와 달리 크루와의 러닝은 함께 달리지만 경쟁은 없었고, 목표와 기록은 있지만 순위가 없었다. 자신의 페이스가 느려지더라도 같이 발의 속도를 맞추고, 지친 사람들을 기다려주며 서로의 안전한 완주를 격려했다. 계획한 코스를 다 같이 완주한다는 것에 기뻐했다. 내가 속한 러닝 크루의 기조는 ‘즐겁고 안전한 달리기’다. 참고 버티다 다치는 것보다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속도를 조절해서 다 같이 러닝을 마무리하자는 것이 운영진의 생각이었다.

“더 못 달리겠어요. 우리 잠깐 쉬어요!”

이런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게 될 즈음, 회사에서도 조금은 힘든 티를 내고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같은 목표를 갖고 일하는 동료들인데 의지하면 좀 어때’라는 산뜻한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도 동료가 지쳐 보이면 그의 러닝메이트로서 마음을 들여다보고 격려할 태도를 갖게 됐다.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지금은 ‘러닝 체력’이 생겼지만, 처음 몇 개월 동안은 2km만 넘어서도 머릿속에서 S.E.S.의 ‘달리기’가 자동 재생됐다. 반복적인 움직임은 지겹고, 힘들고, 숨찼다. 그렇지만 이미 시작해버렸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할 수는 없다. 이 고통을 끝내는 가장 빠른 방법은 계속 뛰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체력적 한계에서 오는 깊은 분노와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지만 ‘조금만 더’라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달렸다. 인내심마저 바닥나면 코치님들이 따라와 “좁은 보폭으로 느리게 뛰더라도 멈추지 말라”고 격려해줬다. 달리는 동안 나를 힘겹게 하는 다른 일들을 떠올렸다.

회사 업무는 학창 시절 시험이나 숙제와 달리 시간 내 주어진 양을 끝내버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출제 범위도, 형태도, 기간도 제각각이었다. 금세 종료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일도 있지만, 예상하는 기간을 훌쩍 뛰어넘어 진행되는 지난한 업무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일은 0 또는 1만 있는 이진법 세계 같아서 끝내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다행인 건 결국엔 끝이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꿀맛 같은 휴식과 뿌듯함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다. 뛰면서 수없이 중도에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걸 알기에 희망적이었다. 러닝 밖에서도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았다. 묵묵히 달리면 목적지에 도달할 테니까.

직장 생활에서 ‘미운 네 살’이 되고 나니, 일도 일상도 무료하게 느껴졌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소소한 뿌듯함이 다가왔지만 근원적인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공을 많이 들인다고 비례하는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시점부터일까.

러닝 코스를 완주했을 때는 온전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내 끈기와 몸뚱이로 못할 것 같았던 것을 해내는 게 즐거웠다. 내가 움직이는 만큼 가고, 움직이지 않으면 멈추는 정직한 운동이어서 좋았다. 누군가에겐 성취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것이겠지만, 내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확실한 경험이었다. 혼자서도 시간이 나면 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3km 구간에 접어들면 숨이 가빠지고 내적 비명이 튀어나온다. 그 순간 머리끝까지 뜨거워지며 온몸에서 땀이 날 때의 그 개운함을 잊을 수 없다. 바람이 땀을 말릴 때의 상쾌함도 짜릿하다.

이제는 업무에 시달리던 때가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마음이 편해졌다. 체력이 늘면서 마음의 체력도 늘었기 때문인지, 직장 권태기가 지나갔기 때문인지 정확히는 모른다. 아무튼, 이번 주도 달린다.

#방지연 #러닝크루 #달리기 #여성동아


필자 소개
LG생활건강 코티마케팅부문 4년 차 마케터. ‘구찌뷰티’와 ‘버버리뷰티’ 국내 유통 및 마케팅·PR을 맡고 있다. 행복을 편안한 상태라고 생각하는데,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중이다. 편안함과 거리가 먼 달리기에 빠지게 된 건 아이러니하다.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노을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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