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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아에서 장관 꿈 이룬 장 뱅상 플라세

글 · 김지영 기자 | 사진 · 장 뱅상 플라세 공식 홈페이지 제공 | 디자인 · 김영화

2016. 03. 10

‘아동수출국’으로 한국을 부끄럽게 한 또 한 명의 프랑스 장관이 나왔다. 최근 한국계로는 두 번째로 프랑스 장관이 된 장 뱅상 플라세 녹색당 상원 원내대표 이야기다. 7세 때 모국과 부모에게 버려져 프랑스로 입양된 그가 한국에 대한 원망을 거두기까지는 4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2월 11일 내년 대선을 염두에 두고 부분 개각을 단행하면서 녹색당 원내대표인 장 뱅상 플라세(48·권오복) 상원의원을 국가개혁 장관으로 기용했다. 플라세 신임 장관은 이날 퇴진한 플뢰르 펠르랭(43·김종숙) 문화부 장관에 이어 한국계로는 두 번째로 프랑스 장관 자리에 올랐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 수원의 고아원에 버려진 그는 7세이던 1975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변호사 가정으로 입양됐다. 당시 그의 가방엔 보육원에서 입던 옷 몇 벌과 성경책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모국인 한국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더는 한국어도 배우지 않았다. 지난해 펴낸 자서전 〈내가 안 될 이유가 없지!〉에서 그는 “변호사인 양아버지는 한국어를 배울 것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나를 버린 나라에 대한 거부감과 한국으로 되돌려 보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낯선 나라에서 양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그는 캉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은행법을 공부한 뒤 금융 분야에서 일하다가 1993년 라로셸 지역의 의원 보좌관으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2001년 녹색당에 가입해 유럽 에콜로지 행정사무국 위원으로 환경 분야에서 활약하다 2011년 한국계 최초로 프랑스 상원의원(녹색당)에 당선됐다.



그동안 다 잊은 한국어, 이제 딸과 함께 배우고 싶어

그에게 정치인은 간절히 바라던 꿈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는 역사책을 즐겨 읽고 나폴레옹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손꼽았다. 학창 시절부터 좌파 학생 활동에 참여했다. 그의 자서전에는 “25세 때 나는 40세 이전에 국회의원이 되는 꿈을 꿨으며, 국정을 책임지는 장관이 되고 싶었다. 이런 인생 계획을 화장실 벽에도 걸어뒀다”는 대목이 나온다.
인생 계획보다 3년 늦게 꿈을 이뤘지만 국회의원으로서 그의 활약은 ‘연금술사’로 불릴 만큼 돋보였다. 2012년 대선 득표율이 2%에 그친 녹색당의 상원 원내대표로 선출된 후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장관을 2명이나 배출한 것이 좋은 예. 플라세 장관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른 보수 성향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을 비롯해 대기업 경영자, 유대인협회 등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의 정치 활동과 내각 입각이 순조로웠던 것도 폭넓은 인맥이 한몫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는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장관이 돼 나처럼 외국에서 와 프랑스인이 된 이들도 이곳에서 책임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해주고 싶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해왔고, 이제 그 소망을 이뤘다. 자신을 버린 모국을 향해 닫혀 있던 마음도 2013년 첫딸이 태어나면서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해 한국을 찾아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고, 이듬해인 2014년 돌을 맞은 딸에게 색동옷을 입힌 것은 그러한 심경 변화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난해 가을 2016년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했을 때도 그는 딸에게 한복을 입혀 사진을 찍었다. 또 파리의 한식당에서 가진 프랑스 정치인들과의 식사 모임에서는 “딸이 크면 아버지 나라인 한국을 배우게 하겠다”는 다짐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나보다 프랑스적인 사람은 없다”고 자부하지만 한국 음식인 비빔밥을 가장 좋아한다. 앞으로 딸과 함께 한국어를 배울 계획도 갖고 있다. 친부모와 모국에 버림받았다는 상처로 남모르는 아픔을 안고 살아왔음에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 꿈을 향한 의지를 불태워 스스로 우뚝 선 플라세 장관. 그의 삶이 스스로를 흙수저라 절망하는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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