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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재난이 남긴 것

일본 국민은 쓰나미보다 강했다

최악 참사에도 침착, 인내, 배려…

글·이홍천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1. 04. 18

지난 3월 지진과 쓰나미가 일본 동북부 지역을 강타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자연 재해에 그간 철저히 대비해 온 일본인들은 물론 전 세계인 모두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 특유의 침착함으로 지금 초미의 사태에 맞서고 있다.

3월11일 오후 2시45분, 도쿄 시내에 있는 게이오대 도서관에서 지진을 맞았다.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던 건물이 갑자기 앞뒤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두려움에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지만 눈앞에서는 의자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 갇혀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의식 중에 창문을 연 순간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굉음이 간담을 서늘케 했다.
“도시가 뒤틀린다!”
지갑과 전화기만 챙겨 들고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 건물을 빠져 나왔다. 도서관 앞 광장은 학생들과 교직원으로 가득 찼다. 여진으로 지면이 계속 흔들리고 있어 배멀미를 하는 듯 속이 울렁거렸다. 대학당국의 귀가 요청으로 전철역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지만 전철은 이미 운행 정지. 역 앞에는 귀가길이 끊긴 시민들이 지진 상황을 전하는 TV 앞에서 마을을 삼키는 쓰나미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집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새벽 1시가 지나서였다. 평소라면 1시간20분 정도 걸리던 것이 7배 이상 걸렸다. 전철 대신 버스를 택했는데 탑승하는 데만 1시간 이상 걸렸다. 맨 처음 출발하는 정류장이었지만 버스 안은 이미 콩나물시루에 가까웠다. 그러나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버스를 갈아타려고 내린 시부야 역에서도 버스를 기다리는 줄은 2백m를 넘었다. 기온은 이미 0℃에 가까웠고 바람도 그치질 않았다. 그들과 함께 나도 3시간 이상 묵묵히 버스를 기다렸다. 평소 신문과 방송에서 보고 들은 대로 행동했더니 비록 자정이 지났지만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망자 수가 1만 명을 넘을 것으로 보이는 미증유의 천재지변, 원전 방사능 누출 사고로 인한 공포 속에서도 일본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경이로운 질서의식과 침착한 대응에 세계 각국이 주목하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일본의 시민의식은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고 극찬했다. 한국인들도 이번 쓰나미의 피해 규모와 처참함에 놀랐지만 일본인들의 침착함과 참을성에 더욱 놀랍다는 반응이다.
많은 일본인들이 피해지역 주민들을 생각하면서 “가망스루(我慢する: 참고 있다)”를 연발한다. 지진, 쓰나미, 원전 폭발의 3중 재해에도 일본인들이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게 질서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또 외국인들의 평가(칭찬)에 대해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필자는 일본의 대학생, 회사원, 자영업자, 퇴직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위의 질문을 던져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았다. 가급적 응답자들의 의중과 어투를 살려서 우리말로 옮겼다.

일본의 경이로운 질서의식 어디서 나왔나
“일본에서는 학교, 회사에서 매년 피난훈련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재난에 대해서는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일본에서는 서로 협력하고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치고 부모들도 그렇게 교육하지요.”(다나카씨·긴자 카페 운영)
“해외 언론들이 일본인의 질서의식을 칭찬하는데 일본인에게는 특별한 것이 아니고 늘 해야 하는 일을 한 것뿐이다.” (전직 회사원)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는 통괄부장으로 현장에서 피해 복구를 지휘했다. (일본인이) 규율을 제대로 잡으면 외국인들도 똑같이 행동한다. 한국인도 중국인도 다른 사람을 밀치거나 끼어드는 일 없이 조용하게 차례를 기다렸다.” (타마야씨·전 민간기업 대표이사)

일본 국민은 쓰나미보다 강했다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를 본 주민들이 물과 생필품을 기다리고 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도 침착하게 차례를 지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친구도 동생이 쓰나미를 당해서 죽을 뻔했다는데 열심히 일하고 있거든. 그 친구는 부모님과 할머니가 원자력발전소 30km 안에 사시니까 그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지. 어떻게 도망을 가겠어. 지금 누가 한 명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도망가면 남은 사람들이 힘들어지지. 그 일을 누군가 대신해야 하니까. 일본인이라 질서를 지켜야한다는 특별한 의무감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내 멋대로 행동하면 주변사람들을 괜히 불안하게 만들어 버리고 혼란을 일으키게 돼.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엄청 많을 텐데, 그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 내 생각만 하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고. 물론 직장에 안 다니는 사람이나 임산부, 아이들은 되도록이면 먼 곳으로 보내주고 싶어.” (나오코씨·심리치료사)
“일본은 10년에 한 번씩 큰 지진이 오기 때문에 늘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해외에서 칭찬하는 질서의식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일본인들은 줄을 서는 것이 습관화돼 있다.”(게이오대 재학생)
“혼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방사능 오염 때문에 후쿠시마 원전에서 2백km 떨어진 도쿄에서도 탈출하는 사람도 있다. 피해지가 아닌 곳에서도 석유, 쌀, 화장지를 사재기 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통신 관련 연구소 연구원)
“일본인으로서 왜 다른 나라에서는 재해가 발생하면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나요? 일본인은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하면서까지 살아남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미국은 타인보다 자신을 더 중요시하지만 일본인들은 ‘자신=단체’로 생각하거든요. 다른 사람 대신 양보해서 죽는 사람의 경우 일본인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를 칭송합니다. 조직과 화합을 중시하는 문화가 이번 참사에서도 큰 힘을 발휘한 것 아닌가 생각되네요.”(외국인 회화 강사 소개업 대표)
“일본인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 ‘곤란할 때는 서로 돕고 산다’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반대로 왜 해외에서는 이런 상황에 빠져서 약탈을 하게 되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번 일이 오래 간다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네요.”(시스템엔지니어)
“지금 미국에 체류 중입니다. 미국인들로부터 재해 시에 일본인들은 왜 줄을 서서 식료품을 구입하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오히려 왜 당신들은 재해가 벌어질 때마다 폭동이나 약탈이 벌어지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런 행동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지만 일본인들은 너무 얌전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들어요. 정부가 무언가 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면이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그렇지만 외국 정부의 대응은 ‘오버’라고 생각됩니다. 유학생들이 귀국하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외국 정부의 자국민 철수 대응에 정부나 도쿄전력이 뭔가 정보를 은폐하는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증폭시키거든요.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정부 해결을 기다리는 일본인들도 동요하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CNN을 보면 일본은 아주 끝장났다는 보도가 넘쳐나는 게 인상적입니다.”(메이지대 교수)
“재해 연구에서 보면 대재해가 발생했다고 해서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언론들이 패닉 상황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대부분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대재해=패닉’이라는 등식은 고정관념에 불과합니다. 한국에서 같은 재해가 발생했을 때 큰 혼란이 일어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개발도상국에서 약탈이나 폭동이 일어나는 배경에는 심각한 빈부격차와 사회적 대립이 잠재돼 있기 때문입니다. 재해를 계기로 그런 모순들이 분출하게 된 거죠. 따라서 그런 모순이 없는 한 혼란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회는 사회적 유동성이 적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깁니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일본인들의 침착, 질서를 지키는 행동은 ‘국민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심리학자)

한국 언론에 소개된 한 중국 유학생의 멘트가 인상에 남는다.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본인은 믿을 수 있다.”
위의 내용들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필자의 의견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에서는 재해와 위기에 대한 교육이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감을 가진다는 것이다. 몸으로 체득한 내용은 무의식중에 행동을 유발한다. 꾸준히 준비하고 반복하는 소걸음 같은 우직함이 필요하다. 둘째, 경제적 격차가 적다는 것이 위기상황에서 사회적 불만으로 폭발하지 않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이익공유제를 논할 때 한번 생각해 볼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신뢰가 구축된 사회는 쉽게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줄을 서면 반드시 내 차례가 온다는 믿음, 뒤쪽에 있다고 손해 보지 않는다는 믿음, 각자 제 자리에서 맡은 일에 충실하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간다는 믿음이 있다. 이번 일본의 재난이 한국 사회를 다시 생각해 보는 거울이 됐으면 한다.



* 이홍천 교수는 한양대 수학과를 나와 ‘기자협회보’ 차장을 거쳐 일본 게이오대에서 정책미디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일관계, 미디어, 매니페스토를 주제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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