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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추리소설 펴낸 15년 차 강력계 형사 박주섭 경위

글 이영래 기자 | 사진 지호영 기자

2009. 06. 16

95년 순경으로 첫발을 내디딘 뒤 대부분의 시간을 강력계에서 보낸 15년 차 베테랑급 형사가 추리소설을 펴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재미난 국내 추리소설 찾기가 힘들어 ‘내가 한번 써보겠다’고 나섰다는 별난 형사의 별난 인생 이야기.

추리소설 펴낸 15년 차 강력계 형사 박주섭 경위


토요일 오후,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계 사무실은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수사 때문에 외근을 나갔던 박주섭 경위는 약속시간을 조금 지나 돌아왔다. 듬직한 체구로 보면 딱 ‘강력계 스타일’이지만 얼굴 표정이 너무 순박해 보였다. 눈빛이 선하다 싶어 “범인 못 때려잡을 것 같다”고 농담을 했더니 그는 “‘현장기록 형사’에서 내가 보여줄 건 다 보여줬고…” 하며 녹록지 않은 관록을 과시했다. 그제야 그가 왜 낯이 익어 보이는지 알았다. 3년 전 한창 인기 있던 MBC ‘현장기록 형사’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는 최근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소매치기 전담반에서 근무하던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살인자의 책’(리젬)을 펴냈다.
“어릴 때 추리소설을 좋아했어요. 괴도 루팡이나 셜록 홈즈, 그런 거 참 재미있었잖아요? 그런데 요즘 책 좀 읽어보려고 서점에 가도 재미난 게 없어요. 전부 일본 추리소설인데, 일본 추리소설은 나하고는 안 맞더라고요. 형사 입장에서 보면 내용도 어설픈 게 많고. 그래서 내가 한번 써보면 어떨까? 강력계 형사로 15년을 일했는데 그런 내용이라면 내가 더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죠.”
95년 군 제대 후 순경으로 경찰생활을 시작한 그는 파출소 근무 1년 만에 강력계 형사로 스카우트됐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강력반장이 일할 만한 사람이 보이면 같이 일하자고 불러들이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파출소에 순경으로 근무하던 당시 기소유예자 등을 다수 검거하는 혁혁한 실적을 올린 덕도 컸다고 한다.
그는 경찰생활 내내 경찰청장 표창, 서울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각종 표창만 30여 차례 수상한 모범 경찰이기도 하다. 위험하고 고된 경찰생활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냐고 묻자 그의 순박한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잠시 고민 끝에 내놓는 대답이 너무 솔직하다.
“먹고살려고요.”
유도는 공인 2단. 단수가 생각보다 높지 않다고 하자 그는 “단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예전에 서울극장 앞에서 소매치기 세 명을 동료와 단둘이서 격투 끝에 제압한 적이 있다”며 완력이 만만치 않음을 과시했다. 키는 중키지만 다부지고 단단한 체구, 그 체격으로 밀어붙이면 어지간해선 당해내기 쉽지 않을 듯싶다.
“소매치기 잡는 게 정말 험하고 위험한 일이에요. 이건 현행범이 아니면 잡을 수도 없으니까 반드시 격투가 벌어지게 돼 있거든요. 현행범을 현장에서 잡아야 하니까 형사도 꼭 둘이 같이 다니는데 소매치기 패거리는 세 명, 네 명 된다 이거예요. 그러니 위험할 수밖에 없죠.”
소매치기를 잡는 특별한 요령이 있냐고 물었더니 “소매치기 전담반 시절 처음 6개월 동안은 한 명도 잡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잡아보겠다고 의욕만 앞세우며 무작정 하루 30km씩 걸으며 이곳저곳을 누볐지만 소매치기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먼저 용의자를 선별하고 그들을 따라다녔더니 비로소 실적이 나왔다고 한다. 결국엔 서로 알게 되지만 “용의자와 눈이 마주치면 놓친다”는 말이 있어 신중을 기해 쫓는 게 관건이라고 했다.

추리소설 펴낸 15년 차 강력계 형사 박주섭 경위

80%는 실제 경험에서, 20%는 허구로 만들어내

소설 속 살인사건의 내용이나 범인의 인생사 등은 허구다. 그러나 등장하는 형사들은 같이 일한 동료들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지하철 노선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연쇄살인범, 그리고 그 살인범을 쫓는 형사들의 심리싸움이 경쾌한 필치로 전개돼 순식간에 읽혔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썼어요. 쓰다 보니까 스토리를 짜놓고 써야겠더라고요. 심리묘사며 당시 정황묘사까지 다 쓰다 보니까 A4용지로 4백80장짜리 소설이 됐는데 많이 쳐냈죠. 아내가 많이 도와줬어요. 처음엔 보고 막 웃더니 나중엔 자기가 고치더라고요. 책으로 나오고 나니까 지금은 무척 좋아해요. 우리 아이도 뿌듯해하고요.”
소설을 쓰던 당시 그는 서울 용산경찰서에 근무하면서 ‘현장기록 형사’에 출연 중이었다. 당시 촬영팀이 무려 9개월 동안이나 그를 쫓아다녔는데 드라마 ‘대장금’ 작가 김영현씨도 방송작가로 용산서에 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원고를 보여줬더니 김영현씨가 “재밌다, 내용이 좋다”고 해서 계속 쓰게 됐다고 한다.
실제 소설의 모티프가 된 살인사건들은 용산서 근무 시절에 발생한 일이라고 한다. 당시 관내에 살인사건이 몇 건 일어났는데 그중 한 건은 결국 미제로 남고 말았다고. 당시 그 사건에 대해 워낙 고민을 많이 했던 터라 그 고민들이 소설로 이어졌다고 한다.
“제가 용산서 가기 전에 발생한 사건인데 가자마자 인계를 받았죠.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살해당했는데 입을 청테이프로 막아서 죽였어요. 없어진 물건도 없어서 치정 관계나 원한 관계로 보고 수사를 시작했는데 주변 인물들이 다 알리바이가 있는 거예요. 질내에서 정액이 나와 용의자들과 DNA 대조를 해봐도 안 맞고. 사실 DNA가 맞다고 하더라도 그 정액의 주인이 범인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해볼 거 다 해봐도 못 찾겠더라고요. 그럴 때 잠이 안 와요. 눈앞에서 놓친 거 같고, 원혼이 남을 거 같고.”
소설 속에는 신발 자국으로 범인을 추적, 검거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또한 당시 용산서 관내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얻은 경험을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족 남편이 보험금을 노리고 부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는데, 죽은 걸 확인하려고 남편이 부인 얼굴을 발로 밀어본 탓에 검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직접 겪은 사건은 아니지만 살인용의자를 쫓다가 그가 휘두른 흉기에 형사 2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묘사한 부분은 지난 2004년 ‘이학만 사건’에서 따왔다. 당시 살해당한 심모 경사는 박 경위와 경찰 동기였는데, 위험에 노출돼 있는 형사들의 현실을 보여줘 고인들의 넋을 위로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내성적이고 온순한데 연쇄살인을 저지르잖아요? 근데 실제 범인 잡아보면 그런 경우가 많아요. 진짜 흉악한 강력사건 범인의 경우 범인은 진짜 잔인하고 나쁜 놈이든가, 진짜 평범한 놈, 딱 두 종류예요.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순한 사람이 오히려 강력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더라고요.”
그는 강력사건에 대한 수사 노하우 등을 경찰끼리 공유하는 일종의 ‘지식검색’ 사이트인 ‘경찰청 범죄지식’ 사이트에서 ‘강력범죄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과 정보를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는 셈.
본업은 물론 형사지만 그는 앞으로도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생생한 경험이 보태진 좋은 추리소설을 계속 쓰겠다고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세계적인 작가로 성공한 전직 경찰 조지 오웰처럼 작가로서 유명해지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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