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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희망의 힘

항암치료 끝낸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새봄 메시지

“희망은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글·이남희 기자 / 사진ㆍ김성남 기자

2006. 04. 12

그는 세상을 밝게 만드는 에너지를 지녔다. 암 투병 중에도 왕성한 저작활동을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기 때문. 이제 24차례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봄을 맞이하고 있는 장영희 교수를 만났다.

항암치료 끝낸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새봄 메시지

‘빨리 입원하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이상하게 놀라지 않았다. 꿈에도 예기치 않았던 일인데도 마치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그냥 풀썩 주저앉았을 뿐이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 남보다 조금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 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004년 9월 한 신문에 연재하던 칼럼을 끝내며 자신의 암 투병 소식을 알렸던 장영희 서강대 교수(55·영문학). 이제 24회의 항암치료를 마친 그가 새로운 봄을 준비하고 있다.
기자의 은사이기도 한 장 교수는 늘 그리움과 고마움의 대상이었다. 그의 수업은 늘 열정으로 가득했다. 목발을 짚고 그가 천천히 문 안으로 들어설 때면 교실 안은 작은 행복이 번졌다. 맑은 눈을 깜빡이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시와 소설을 논하던 그의 강의는 ‘지성의 성찬’이었다.
소녀처럼 명랑한 모습의 그도 강단에 설 땐 누구보다 깐깐하고 철두철미했다. 학생들은 영어 단편소설을 한 편씩 읽어낼 때마다(한 학기에 5~6편을 읽는 건 기본이다) ‘공포의 쪽지시험’을 치러야 했고, 빨간 펜 코멘트로 너덜너덜해진 영어 리포트를 돌려받으며 서늘한 가슴을 달래기도 했다. 지칠 줄 모르는 은사의 에너지는 곧 무시무시한 암도 초전박살 낼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갖게 했다.

“암이라는 병 때문에 내 몸의 소중함, 남의 아픔 이해하는 법 배우고 있어요”

암 투병 2년째. 봄이 찾아온 서강대 캠퍼스에서 만난 장영희 교수는 여전히 밝고 유쾌한 모습이었다. 24차례의 항암치료를 끝낸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힘이 넘쳤다. “암 그까이꺼” 하는 자세로 병을 담대하게 받아들여서일까. “대체 아픈 분 같지 않다”는 첫인사에 그는 특유의 넉살을 부린다.
“2004년 가을 척추암을 선고받은 후 열여덟 번의 항암치료를 받게 돼 있었죠. 지난 1월 18회의 치료를 마쳤고, 이후 의사가 ‘여섯 번 더 치료받으라’고 해서 주사를 6회 더 맞았지. 의사가 치료 결과를 보고 곧 내 상태를 알려 준대요.
항암치료 끝낸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새봄 메시지

이번 학기 2개의 강의를 맡은 장영희 교수는 교과서 집필에 들어가는 등 왕성한 활동계획을 갖고 있다.


근데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그렇게 아프지 않았어요(웃음). 몸의 사인을 전혀 읽을 줄 몰라서 그런가봐. 기가 막힌 고통이 아니면 몰라. 육체적 반응에 무감각하고 정신이 더 발달해서 그런 건지. 아주 지독한 통증이 없으면 컨디션은 항상 좋은 편이에요.”
그토록 고통스럽다는 항암치료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다니, 그는 암 투병을 하면서 도(道)라도 닦는 모양이다. 아닌게아니라, 그는 지금 “암이라는 병 때문에 내 일생에 가장 중요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 몸이 얼마나 소중한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조금 더 의미 있는지를, 또한 나의 아픔을 통해 남의 아픔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것.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가 가장 힘겨웠어요. 3번 경추에 암이 생겼는데 그 부위에만 방사선이 닿게 하는 기술이 아직 없거든요. 한 번 방사선을 쐬면 식도가 같이 타 들어가요. 그래서 물 한 모금을 마셔도 칼 조각을 삼키는 것같이 괴롭더라고. 아무 것도 먹지를 못했죠.
그렇게 한참 아플 때, 인터넷에서 ‘무엇인가를 먹고 삼킬 수 있는 게 축복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봤는데 울컥 화가 치미는 거예요.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 말이 지독한 상처가 되더라고. ‘앞으로는 말할 때 조심해야지’ 싶었죠.

항암치료 끝낸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새봄 메시지

소녀처럼 늘 환한 웃음을 짓는 장영희 교수는 “나야말로 행운아”라면서 삶을 긍정한다.


병원에 누워서 하루 종일 TV를 보는데 제일 웃겼던 것이 바로 화장품, 샴푸 광고였어요. 예쁜 배우가 광고에 나와 ‘피부가 촉촉해져요’ 하는데, 사실 피부가 촉촉하고 말고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에 비하면 정말 사소한 거잖아요. 항암치료를 받아 머릿결이 푸석푸석해지고 피부가 거칠어진 나는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발라도 소용이 없는데….
어떤 여자는 TV에 나와 ‘짝궁둥이라서 성형수술을 했다’는데 그게 어찌나 부조리하게 들리던지. 그냥 궁둥이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 아니에요. 병실에 앉아서 세상을 보니, 사람들이 가치 없는 것들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는 웃기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더군요.
그런데 더 재밌는 게 뭔지 알아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사람 맘이 달라진다고, 퇴원을 하고 보니 나도 다시 화장품 광고에 귀가 솔깃해지더라고요. 호호.”
암 투병이란 삶의 초비상 상태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을 만큼 그는 초연했다.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지 않았고, 몸이 나빠진다거나 죽는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다. 병마와 싸우는 그를 지탱해준 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그에게 삶의 큰 의미가 됐다. 그는 입원 중에도 2004년 여름부터 한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한 ‘영미시 산책’은 끝내지 않았다. 그 코너를 바깥세상과 소통하는 통로로 삼은 것. 그는 물 한 모금조차 삼키기 어려운 아픔을 견디며 연재를 1년간 이어갔다.

병원에서 투병생활하며 1년간 쓴 시 해설 묶어 ‘영미시 산책’ 발간
“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할 때 2개의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죠. 고전문학을 소개하는 독서칼럼과 ‘영미시 산책’이었지요. 치료를 받기 위해 한 칼럼은 마치더라도 ‘영미시 산책’만큼은 계속 쓰고 싶더라고요. 글을 쓰던 사람이 갑자기 그것을 그만두면 금단 증상 같은 게 생기잖아요.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글을 써야 했어요.
병원에서 손바닥만한 노트북 컴퓨터로 자료를 찾아 글을 썼으니 집필 환경은 최악이었죠. 인간은 고통받고 절망할 때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데, 당시 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좋은 조건에 처해 있었다고 생각해요. 시를 선택하고 번역하고 해설하는 그 시간이 가장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아픈 중에 시를 찾는다는 행위 자체가 희망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시를 선정할 때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희망에 관한 시를 찾게 되더라고요. 아픔을 지닌 사람도 시를 읽으면 세상이 밝아지는 걸 느껴요. 사소한 꽃 하나, 돌멩이 하나에도 존재가치를 부여하는 시는 우리에게 자신의 소중함을 일깨우잖아요. 그래서 시에는 훌륭한 치유 능력이 있다고 봐요.”
에밀리 디킨슨의 ‘희망은 한 마리 새’는 장 교수에게 힘을 준 시 중 하나였다.
“희망은 한 마리 새 / 영혼 위에 걸터앉아 /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며 / 그칠 줄을 모른다(…) / 나는 그 소리를 아주 추운 땅에서도, / 아주 낯선 바다에서도 들었다. / 하나 아무리 절박한 때에도 내게 / 빵 한 조각 청하지 않았다.”
그는 이 시에 아름다운 해설을 덧붙인다. 희망은 우리의 영혼 속에 살짝 걸터앉아 있는 한 마리 새와 같다는 것. 상처에 새 살이 나오듯, 죽은 가지에 새순이 돋아나듯, 희망은 절로 생겨난다고 그는 말한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존재한다’는 시의 메시지는 가슴에 훈훈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장 교수는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통곡하는 병원에서 시를 통해 끊임없이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며 1년간 연재한 글을 묶어 ‘영미시 산책’이란 책을 펴냈다.
“시는 크게 ‘머리로 읽는 시’와 ‘가슴으로 읽는 시’로 나뉘는데, 보통 문학 전공자들이 연구하는 시는 전자에 속하지요. 하지만 저는 유명한 영미 시인들이 쓴 시 중에 일반인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시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영시를 읽으면 감동도 받고 영어도 배우는 1석2조의 효과가 있어요.”
‘영미시 산책’은 ‘사랑’편과 ‘희망’편, 두 권으로 이뤄져 있다. 사랑편의 제목은 ‘생일 :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희망편의 제목은 ‘축복 : 희망은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입니다’이다. 두 권의 책에는 각각 49편의 주옥같은 시가 실려 있다. 주로 그가 병원에서 글을 써왔기에, 희망에 관한 시가 많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항암치료 끝낸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새봄 메시지

장영희 교수가 최근 발간한 ‘영미시 산책’. 항암치료를 끝내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그는 “많이 떨린다”고 말한다.


‘영미시 산책’의 삽화를 그린 화가 김점선 선생은 이 책을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암도 아름다운 경력”이라고 여긴 장 교수가 ‘투병의 증거’로 빚어낸 감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2년간 병마와 싸우면서 그는 보통사람들도 해내기 힘든 강행군을 했다. 그의 정력적인 활동에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는 지난해 11월 ‘서강대 영문과 후원의 밤’ 준비위원장을 맡아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후속 작업도 만만치 않다. 동문기금으로 서강대 영문과 학생들을 해비타트 운동(집짓기 운동) 등 다양한 국제 봉사 프로그램에 참여케 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전 세계의 젊은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힐 기회를 마련하겠다는 것.
이번 학기 2개의 강의를 맡았고, 교과서 집필에도 들어간다. 과거 선친인 서울대 장왕록 교수와 함께 영어교과서를 집필했지만, 이제는 장 교수가 대표저자가 돼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학생들의 창의적인 감성을 중요시하는 그의 영어교과서는 현재 채택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내년 즈음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독서운동을 주도할 생각이다.

“하루하루를 낫는다는 의지로 살면 그 시간이 쌓여 결국 낫게 돼요”
소아마비를 앓아 어린 시절부터 중증 장애인이었던 장영희 교수는 특유의 생명력으로 삶을 헤쳐왔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힘겨운 순간도 많았지만, 그는 늘 “나는 행운아”라며 자신의 삶을 긍정해왔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잇는 권위 있는 영문학자이자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자리매김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살아 있는 갈대’ ‘종이시계’ ‘톰 소여의 모험’ 등 수많은 번역서도 남겼다. 또한 김현승의 시를 영역해 ‘한국문학 번역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암 투병이 그의 이력에 더해진다.
“얼마 전 문학 관련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프로그램 중간 화면 아래에 내 경력이 자막으로 뜨는 거예요. ‘장영희는 무슨 무슨 학교를 나오고 어떤 책을 쓰고…’ 하면서. 근데 맨 마지막에 ‘현재 암 투병 중’이라는 말로 마무리되더라고요. 이제는 암이 내 경력이 됐구나 생각하니 실소를 금할 수 없었죠.
사실 암은 아무나 걸리는 게 아니잖아요. 암에 걸렸던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결코 알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을 하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암 환자가 건강한 사람에 비해 훨씬 경력이 풍부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웃음).”
장영희 교수는 한 에세이에서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말했다. 대책 없는 그의 ‘희망 바이러스’가 지금도 수많은 독자들에게 침투해 기쁨과 행복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재 고통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을 위해 그는 따뜻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방사선 치료를 받고 식도가 탔을 때, 너무나 고통스러워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보내나 걱정을 했어요. 아침에 일찍 눈이 떠지는데 재밌는 일은 없고 아프기만 하고…. 그래도 ‘내일은 분명 나을 거야’라는 생각을 결코 버리지 않았어요. 물론 그 아픔이 수개월은 지속됐지만, ‘곧 나을 것’이란 의사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죠.
‘내일은 낫겠지, 아니 모레는 낫겠지’ 하고 기다리는 건 정말 짜증스러운 싸움의 과정이에요. 그런데 하루하루를 낫는다는 의지로 살면, 그 시간이 쌓여 결국 낫게 되더라고요. 더 이상 1분도 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을 때, 그래도 1분만 더 버텨 보세요. 결국 고통이 사라질 겁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많이 떨린다”는 장영희 교수. 약의 종류를 바꿔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할지, 아니면 여기서 치료를 끝낼지 의사의 통고를 기다리는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긴 터널을 통과한 그의 어깨에 희망의 새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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