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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webtoon

약치기 [혹은] 양치기 작가 양경수의 사이다 처방전

editor 김지은 자유기고가

2017. 01. 17

이 시대의 청장년 세대라면 누구나 앓고 있는 중병 중의 중병 ‘일하기 싫어증’. 이 치명적인 병증에 속 시원한 처방전을 내린 작가 양경수의 남다른 인생.

“말이 잘 안 나오고, 매사에 의욕도 없고, 혼자 있고 싶어요.”

“실어증입니다.”

“네? 언어장애?”

“아뇨. 일하기 싫어증.”

        -〈실어증입니다, 일하기 싫어증〉 中




책을 펼쳐든 순간부터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일면식도 없는 이 남자, 남의 속을 백만 번쯤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어딜가나 또라이 하나씩은 있는데 우리 부서는 그런게 없네”라며 웃는 팀장 앞에서 속으로 ‘너님’을 외치는 팀원들, “보고서가 개판이네”라는 상사의 질책에 “개처럼 일만 시키니까요!”라고 응수하는 부하직원…, 괴롭고 힘들어도 ‘찍’ 소리 한번 내기 힘들던 직장인들의 답답한 일상을 속 시원하게 담아낸 그림 에세이 〈실어증입니다, 일하기 싫어증〉은 웃긴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의 저자 양경수(33)는 요즘 가장 핫한 그림 작가다. 많은 직장인들이 금서처럼 꺼내 보며 낄낄대곤 했던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 수당이나 주세요〉에 그린 삽화는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다고 해도 좋을 만큼 선풍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SNS를 통해 연재해오던 그림들까지 함께 주목받으면서 이제는 광고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최근 들어온 광고만 80여 편, 양경수의 그림으로 패키지를 만든 빵도 출시됐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에서 판매하는 빵 봉지 안에는 그의 그림과 대사가 담긴 스티커도 들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 빵을 사 먹는 사람들 다수가 성인이라는 사실이다. 기존의 빵이나 과자 등에 들어 있던 캐릭터 스티커를 모으는 연령층 대부분이 어린이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 또한 신선한 반전이다.

수입으로 따져도, 들어오는 일의 양만 따져도 이제는 본업(그는 불교미술 작가다)을 월등히 추월했지만 그가 자신의 개인 SNS에 ‘그림왕 양치기’라는 필명으로 한 컷짜리 그림 연재를 시작한 것은 순전히 취미 활동의 연장이었다.

“기자가 집에서 시를 써보는 것과 비슷해요. 기자라고 해서 집에서까지 맨날 기사문만 쓰고 있지는 않을 거잖아요. 혼자 끄적끄적 가벼운 그림들을 그리다가 2013년 스토리콘티 작가로 데뷔했습니다. 〈머니투데이〉에 연재한 ‘비니미’라는 웹툰은 캐릭터랑 스토리만 제 거였어요. 그러다 2014년에는 다음 스토리볼에도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요. 2016년 5월 출간된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 수당이나 주세요〉에는 삽화가로 참여한 거였어요. 저자는 히노 에이타로라는 일본 작가였죠.”



양치기와 약치기 사이

그를 만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것 중 하나가 예명에 관한 것이다. ‘양치기’와 ‘약치기’ 둘 중 어느 쪽이 맞냐는 것인데 사실 ‘ㅇ’과 ‘ㄱ’ 사이에는 적지 않은 무게 차이가 존재한다. 양치기는 한자로 ‘梁治己’, 즉 그림을 통해서 양경수 자신을 다스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반면 약치기는 그의 그림을 본 독자들이 힐링이 된다며 붙여준 별명이다. 도무지 끝나지 않는 야근과 거래처의 갑질, 상사의 부조리한 지시, 감정노동, 박봉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에게 그의 그림은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강력한 ‘처방전’이 아닐 수 없다.

“웹툰 작업을 하면서 사명감이 생겼어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많이 귀 기울이게 되고 그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해낼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웹툰을 그리기 위해 야간 당직 간호사의 이야기를 새벽에 병원을 찾아가 들은 일, 스튜어디스 후배를 만나고 주변을 수소문해 소방관이며 은행원들을 만난 것도 그런 사명감이 점차 큰 부분을 차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십 년 묵은 체증까지 확 내려가는 듯한 속 시원한 이야기들, 말장난 같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날카로운 대사들, 이런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온 것일까.

평범한 직장인으로 산 적은 없었지만 생계를 위해 늘 위태로운 ‘을’의 위치에 있었던 그였기에 친구며 지인들이 소주 한잔 기울이며 털어놓은 애환은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과 출신인 그는 불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꾸준히 작업해 온 회화 작가다. 이건 그가 운전기사 일을 할 때도, 동대문에서 인테리어 가게 실장으로 일할 때도, 벽화 그리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때도, 소셜 커머스 마케팅 팀장으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닥치는 대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틈틈이 지금의 한 컷짜리 그림을 그렸다. 또 밤에는 불화 작업에 집중했다. 언제부턴가 트레이드마크처럼 자리한 다크서클은 늘 잠이 모자란 그의 일상을 대변한다.

이렇게 탄생한 그의 불화들은 현재 팔만대장경과 함께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더 붓다(THE BUDDHA)〉 전에서 전시되고 있다. 일본, 인도 등 세계 10여 개국의 불교 문화제가 함께 열리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2015년에는 노르웨이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서양에서는 불교를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나 철학으로 받아들이는데 그런 점이 무척 신선했어요. 그들은 분명 가톨릭을 믿는 신자이지만 집에 불상을 갖다 놓을 정도로 불교 문화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았습니다. 요가나 명상을 수행하기도 하고요. 다양성을 존중하는 열린 사고가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뒤처진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

불교미술 작가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절간을 놀이터 삼아, 그림 공부방 삼아 지냈던 그에게 불교미술 작가의 길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오히려 그런 그가 추계예대에 진학하면서 동양화가 아닌 서양화를 전공한 것이 뜻밖이었달까.

“부모님께서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입시를 위해 미술 학원을 다닐 때도 학원비를 마지못해 반만 주시거나 등록금을 첫 학기 외에는 지원해주시지 않았던 것도 제가 서양화를 그리는 것이 못마땅하셨기 때문이었죠. 그때는 힘들고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약이 된 것 같아요. 그때부터 방세며 등록금까지 필요한 건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했으며, 아르바이트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가 되었죠. 그때 겪은 일들 중 상당 부분이 제 그림의 아이디어가 되었고, 어떤 일이 닥쳐도 겁먹지 않는 성격이 된 것도 그때의 제가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의 작품 세계는 기존의 불교미술과는 사뭇 다르다. 붓다가 슈트발 잘 사는 멋쟁로 변신해 있는가 하면 힙합 전사가 된 붓다의 제자, 흡사 예수를 떠올리게 하는 제자까지 등장한다. 화려한 색감은 분명 전통 불교미술에서 차용해온 것이지만 등장인물들이 사는 세계는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근엄하거나 무서운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조차 없을뿐더러 즐겁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왜 그래야 할까요?”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 뒤에는 그의 작품 세계를 이끌어온 무한대의 실마리가 숨어 있다.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순응적 태도는 애초부터 그의 삶의 방식과 잘 맞지 않았다. 부모에게는 이유 없는 반항처럼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를 그의 행보에는 사실 다 이유가 있었다.

“부모님이 ‘너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러면서 끌고 다니는 건 무책임한 일인 것 같아요. 남들 하는 대로 하는 것은 오히려 쉽지 않나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만 뒤처질 거 같으니까’라고들 하지만 그건 사실 부모가 마음 편하려고 하는 말이에요. 좋은 거 사주고, 어린이집 보내고, 학원 다니게 하고, 남들 하는 대로만 하는데 무슨 고민이 필요할까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저 역시 학원 같은 곳에서 익힌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원해서 다닌 미술 학원을 제외하고는요.”

웹툰이 인기를 끌면서 자녀를 웹툰 작가로 키우고 싶어하는 부모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에 그는 정색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고민은 오히려 아이가 웹툰 작가를 하게 되었을 때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부모로서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시작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내 아이를 뭘로 키울까만 고민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교육만이 아니에요. 대학도, 직장도 그것이 마치 목표인 양 결정해놓고 살아가니까 너도나도 과정은 같아지고 다른 경험은 전무한 상태가 되는 거죠. 심지어 그 목표를 이루고 나면 허무하고, 해내지 못하면 패배자 같고. 정말 이상하지 않나요?”

그에게 웹툰은 목표가 아닌 과정이다. 상상하고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은 SNS에서 책으로, 웹툰으로, 영상으로, 노래로, 상품으로 다양한 매개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세계에 새로이 발을 들이고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웹툰을 그리는 일이 1천 배는 힘들고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취미로 그릴 때는 몰랐던 고통과 난관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을 그려놓고도 ‘내면의 아픔을’ 어쩌고 얘기하면 꽤 근사해 보이잖아요. 저 역시도 그랬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건 제가 게을러서 그런 거였더라고요.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그리는 것은 익숙하고 쉽잖아요. 남의 생각을 조사하고 다시 필터링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



‘인터뷰 알파고’가 설계하는 미래

그는 확실히 남다른 재담꾼이었다. “최근에 하도 인터뷰를 많이 해서”라고 했지만, 인터뷰 기사마다 그의 재치 있는 말솜씨에 감탄하는 대목이 빠지지 않는 걸 보면 하루이틀 쌓은 내공은 아님이 확실했다. 그래서일까. 그와의 대화에 빠져들수록 텍스트만으로는 그 생동감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위기감이 엄습해왔다. 심지어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에는 그런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싱긋 웃으며, 스스로를 “인터뷰 알파고”라고까지 했다. 어쩐지 그쯤에서 이세돌처럼 의연한 모습으로 패배를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사실 그에게 정말 ‘졌다’고 생각되는 대목은 따로 있었다.

“예술가도 엄연한 직업이에요. 직업이란 건 그걸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작가들한테 ‘재능 기부를 해달라’는 얘길 너무 쉽게 해요. 흙을 푸는 데도 돈이 필요한데 사람들은 아직도 예술에 대해서는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막연히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후배들을 보면 10여 년 전의 제 생활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아니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고요. 작품에 쓸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방세를 내기 위해, 밥을 사 먹기 위해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일을 해야 하죠. 불교의 윤회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을 하고,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가야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그래서 최근에는 재능 있는 후배들을 모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어요. 이 친구들의 재능을 대중적과 접목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들을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어려운 후배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작업이 잘되고 이 그룹에 힘이 생기면 예술가라는 직업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얼핏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잡다한 일들이 양경수라는 작가의 재능으로 뭉쳐지고 그 재능이 다시 세상으로 퍼져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한 축으로 세워지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스스로를 인간계의 빅 데이터, 알파고로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기획 여성동아
사진 홍중식 기자
일러스트 제공 오우아
디자인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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