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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와인 라벨에 담은 살로메의 치명적인 매력

[와인과 춤]

이찬주 무용평론가

2024. 04. 15

무심코 바라본 와인 라벨 속 춤. 전 세계 와인과 그에 얽힌 춤 이야기를 연재한다.

인트린직 카베르네 소비뇽(왼쪽). 에드워드 아미타지의 ‘헤롯왕 생일의 향연’(1868),

인트린직 카베르네 소비뇽(왼쪽). 에드워드 아미타지의 ‘헤롯왕 생일의 향연’(1868),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벗어나 와인 가게에서 춤에 관련된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기쁨이었다. 몇 년 전 미국 뉴저지의 한 와인 가게에서 붉은 와인만큼이나 강렬한 라벨을 감고 있는 와인을 만난 적이 있다. ‘인트린직(Intrinsic) 카베르네 소비뇽’. ‘고유한’이라는 뜻을 가진 인트린직은 미국 컬럼비아 밸리 와인으로, 워싱턴주 전체 포도밭의 95%가 컬럼비아 밸리에 속한다.

인트린직 카베르네 소비뇽은 워싱턴주의 스타 와인 메이커인 아르헨티나 출신 후안 무뇨즈 오카(Juan Mun˜oz-Oca)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극소량의 포도만을 생산하는 베벌리 빈야드(Beverly Vineyard)와 호스 헤븐 힐스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글 앤드 플로 빈야드(Eagle & Plow Vineyard) 포도로 양조한 와인이다. 보통 침용 기간은 일주일 정도인데, 무려 9개월에 걸쳐 풍부한 향과 타닌을 뽑아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침용이란 수확한 포도를 분쇄해 양조 통에 넣고 깊은 색과 풍미를 추출하는 과정을 말한다.

붉게 타오르는 뜨거운 열망을 품은 와인

라벨 역시 참신하다. 와인병 전체를 붉게 물들인 이 라벨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주목받고 있는 스트리트 아티스트 지머(Zimer)의 그림이다. 풍성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교차시키고 상체를 여유롭게 젖힌 자세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아주 천천히 내뱉고 있는 것만 같다. 붉은색과 대비를 이루는 짙은 회색의 배경 때문인지 주변 공기가 무겁고 진지하게 느껴진다. 격정적인 춤을 추고 있었던 건지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드레스 역시 묵직하게 흔들리며 붉은빛 물결을 만들어낸다. 와인병을 잡고 흔들 때 병 안에서 붉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느낌을 그대로 라벨에 담아냈다.

이 라벨은 영국 에든버러 국립스코틀랜드미술관에서 본 ‘헤롯왕의 연회(The Feast of Herod)’(1633)를 떠올리게 한다. 플랑드르의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가 세례 요한의 잘린 머리를 헤롯왕에게 보여주는 살로메를 그린 그림이다. 살로메의 드레스는 피로 물든 것처럼 선명한 붉은색이다.



살로메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의붓아버지 생일잔치에서 춤을 추고 그 대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다. 사실 세례 요한의 목을 원했던 건 어머니 헤로디아였다. 헤로디아는 남편과 이혼하고 남편의 형인 헤롯왕과 재혼했다. 요한은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왕을 비난했다. 앙심을 품은 헤로디아가 딸을 시켜 요한의 목을 가져오게 한 것. 헤롯왕은 괴로웠지만 모두의 앞에서 한 약속을 번복할 수 없었다. 병사가 요한의 목을 쟁반에 받쳐 가져오고 이를 받은 살로메는 다시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전한다.

이탈리아의 화가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1420~1497)가 그린 ‘살로메의 춤(The Dance of Salome)’(1461~1462)을 보면 헤롯왕이 왜 살로메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춤은 모두의 시선과 마음을 한 번에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다. 특히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고개를 꺾어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은 팜 파탈적 매력을 풍긴다.

문학, 미술, 연극, 영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예술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살로메는 19세기 들어서 청순함을 벗고 악녀 이미지로 변모했다.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1854~1900)는 희곡 ‘살로메’(1893)에서 7개의 베일을 하나씩 벗어던지고 남성을 유혹해 결국 파멸로 이끄는 살로메의 모습을 그렸다.

네덜란드 국립오페라발레에서 초연된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의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일곱 베일의 춤(Strauss’ Salome: Dance of the seven veils)’(2017)은 살로메의 치명적인 매력을 그대로 담고 있다. 벨기에 안무가 빔 판데케이뷔스(Wim Vandekeybus)가 안무한 ‘살로메의 춤’ 장면에서도 관능적인 살로메의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잘 표현되었다.

살로메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춤을 추었다. 원시시대부터 사람들은 기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춤을 추어왔다. 춤은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동작에 그칠 수도 있지만, 염원이 담기면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추는 이도, 보는 이도 이 위력에 빠져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줄 수도, 가질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인트린직 카베르네 소비뇽은 이러한 춤의 절대적인 힘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붉은빛 와인이 찰랑이는 것인지, 여인의 붉은 드레스가 출렁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와인 #인트린직카베르네소비뇽 #살로메 #여성동아

사진출처 인트린직 와인컴퍼니 인스타그램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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